익구닷컴 정리 안내

익구 2014. 2. 12. 15:20 |

제 누추한 홈페이지 익구닷컴은 20037월 개설 이후에 10년 이상 꾸준히 유지해왔습니다만,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이래 거의 관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2013년 하반기부터는 페이스북(http://www.facebook.com/liberal.gu)으로 틈틈이 소통하고 있으니 이쪽으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오류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성실히 고쳐나가는 방편으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에 2003년 이래로 제가 했던 잡생각들이 거의 온전히 보관되고 있습니다. 인생의 한때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을 돌아보며 오늘날의 제 자신을 다잡는 삶는 꿈꾸었습니다.

 

 

매번 옳은 생각, 바람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드물고, 누구나 틀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어느 시점의 생각 하나만을 발췌하여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식의 온라인 신상 털기는 삼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과 실패의 기억이 그 사람을 단정 짓는 징표로만 활용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본래는 제 지인들을 위한 공개된 일기장에서 출발된 것이었기 때문에 너무 사사로운 기록들을 많이 남긴 듯싶습니다. 이제 익구닷컴의 새로운 방향성을 고민하면서 새단장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잡글들의 상당수를 정리할 예정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SNS는 옛날의 죽간(竹簡)과 닮았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춘추를 집대성했다고 전하는 공자께서도 당연히 죽간을 쓰셨죠. 동양 정신의 고갱이로 평가 받는 춘추필법은 붓으로 기록함으로써 나쁜 것을 단죄하는 필주(筆誅)를 핵심으로 하는데 SNS도 그런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하는 듯싶습니다. SNS에서의 필주가 남을 해치는 무기가 아니라 세상의 아픔을 덜어내는 수술칼로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왕림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

저는 당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에 대한 탐구를 늘 하려고 애씁니다. 이따금 저란 녀석을 소개할 일이 있을 때 제가 생각하는 제 모습을 늘어놓는 것이 참 어렵더군요. 그러던 참에 제 지인들이 저를 두고 평한 이모저모를 나열해보는 것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익구에 대한 말말밀> 연재물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유치원부터 대학 시절까지 학교 안과 밖에서 들었던 오만가지 이야기 중에 몇 개 추려본 헛짓이 어느덧 5탄을 선보입니다. 좀 더 옥음을 모으면 한꺼번에 정리할 날도 있겠지요. 주로 좋은 말들로만 정리한 것이니 진실은 이렇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주세요.

3월부터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2기로 입학하게 된 것을 기념하며 오랜만에 정리해봤습니다. 명백한 오타를 수정한 것을 제외하면 원래 발언 그대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대는 뒤죽박죽 섞여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형은 전생에 아마 사림(士林) ㅋㅋㅋ
- 04학번 후배의 문자

형님은 200년 전에 집현전 대제학이셨을 거 같아요.
- 07학번 후배의 댓글

익구는 글을 짧게 못 쓰는 병이 있어.
- 대학 동기의 정확한 지적!

머리에 쥐나게 하지 마
- 내가 쓴 세밑 인사를 두고 고등학교 동창의 핀잔

비관습적이기도 하지 ㅡ.ㅡ
- 내가 비사교적으로 살아온 것 같다며 한탄할 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의 추가 설명

형... 익구닷컴에서 글 좀 참조하여,,,레포트 좀 쓸게요 ㅎㅎㅎㅎ
- 05학번 후배의 쪽지, 그 과제가 무엇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음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정말로 찾아보기 어려운(?) 캐릭터세요 =ㅁ=;;
- 언어의 마술사님과의 대화 중

그런데 정말로 익구형과 대화하면 되게 생각이 많아져요.^^
- 06학번(07학번?) 후배와의 대화 중

항상 철학적 분위기를, 학구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너에게 감사하다. 앞으로도 네 순수하고 고뇌하는 모습 잃지 말아라.
- 고등학교 동창의 생일 축하 편지

거추장스럽다는 듯 언급하신 규범주의나 도덕주의는 익구, 그 자체의 모습인걸요?
- atopos님의 댓글

누구와도 먼 사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내성적인 것과는 별개의 느낌이네요.
- 연애편지님의 댓글

내가 볼 때는 더 이상 들 ‘철’이 없는 것 같은데
- 철드는 것이 소망이라는 내 말에 고등학교 동창의 격려(?)

니가 철이 덜 들면 누가 드니-_-
- 격려(?) 두 번째

너의 시비라면 얼마든지 기분 좋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음. ㅋ
- 대학 동기

넌 참 써먹을 데가 많을 거 같아
- 나에 대한 과찬이 취미(?)인 고등학교 동창

수다맨은 아닌데, 수다스러운 남자.
뭔가 심오한 이야기를 만화책 줄거리 이야기하듯 이야기 하는 남자.
- 대학 동기

익구 같은 사람이 법 공부 열심히 해서 우리 다음 세대는 좀 더 좋은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
- 대학원 진학을 축하하며 고등학교 동창이 해준 덕담

형 좋아하시는 일 찾으실 거예요 ㅋㅋ 형을 사람들이 안 내버려둘걸요...
- 05학번 후배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 훈련소에서 내게 보내온 편지에도 논어의 한 구절을 ‘한자로’ 써서 보냈던 녀석.
우리 나이 대에 걸맞지 않은 압도적인 독서량과 풍부한 지식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물론 읽기 버거운 건 있다.)
- 대학 동기가 자신의 블로그에 익구닷컴을 소개해주면서 쓴 글

익구는 정말 살아 있는 reference 야. 훗훗훗
이런 저런 생각하는 거나 말투도 그렇고 진짜 틈이 안보이네
최익구도 알고 보면 똘끼 대마왕!
- 만나 뵐 때마다 즐거운 경선누나

조신하게 지내는 건 너에겐 이룰 수 없는 꿈같은 걸?
- 대학 동기
 
익구야~ 이민가지 마
- 고등학교 동창, 2007년 대선 직후 나눈 새해 인사

형은 절대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 헛소문을 들은 09학번 후배

익구 진짜 강의 하나 차려라 구민회관 같은데 강좌 하나 차리면 잘 되겠어
- 밤새 대화를 나눈 고등학교 동창이 뜬금없이 건넨 말

형님은 항상 얼굴에 웃음이 꽃펴있어서 세상을 되게 즐겁게 사시는 거 같아요
- 08학번 후배
 
하여간 말이 길어 ㅋㅋㅋ 잘 지내는 것 같구나 ㅎㅎ
- 나의 말 많음을 염려하는 00학번 선배님

진짜 이름 잘 외우시네요,,, 형은 딱 정치인 스타일
- 04학번 후배

전 나중에 신문 칼럼에서 익구형 이름을 읽게 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작정입니다.
- 05학번 후배

익구형님. 이번엔 얼마나 금주를 하실 건가요 ㅋㅋ 
- 금주에 대한 고견을 청했을 때 07학번 후배
 
넌 충분히 바른생활 사나이다 ㅋㅋ 그만 자제해라 ㅎㅎ
- 희영누나

불쌍한 (익구의) 간장(肝臟)님
- 나의 과음을 염려한 고등학교 동창

네가 인문학 했으면 잘했을 거 같다 이런 생각
- 고등학교 동창
 
형은 꼭 공직에 나가셔서 우리나라 발전에 기여하셔야 해요. 정치든 공무원이든... 기업 쪽으로 가셔도 훌륭한 오너가 되실 듯
- 지인지감(知人之鑑)을 좀 더 연마해야할 듯한 04학번 후배

익구 같은 분이 회사나 학자가 되기보다는 우리나라 행정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문자

10년 뒤에도 어제처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네.
- 노무현 대통령님 서거를 접하고 침통했을 때 만나 뵈었던 97학번 선배님

고등학생은 아니죠?
- 2009년 11월 21일 대학원 면접을 앞두고 간단히 점심을 먹으려고 들른 식당 주인 아주머니께서 하신 말씀, 그 때 당시 학부 면접이 같은 날 있어서 아마 그런 오해를 하신 모양임

근데 난 너랑 대화하면 어려운 문제가 더 어렵게 느껴져
익구 쉽게 말하는 법이나 문제를 단순화하는 법을 연습해 보는 것은 어때
풍부한 어휘나 너의 필력은 잘 알겠지만 결국 커뮤니케이션이자나
정확한 정보 전달 만큼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이해를 이끌어 내는 거니까
- 나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건넨 고등학교 동창

항상 궁금한 건데 넌 왜 경영학과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ㅎㅎ
경영학과 내에서 너의 입지를 궁금해 하는 것보다도
너 개인적 의지와 학문적 욕구 같은 걸 짐작해봤을 때 궁금한 거라서.
- 대학 동기, 자주 듣는 질문이었으나 경영학과 무사졸업을 그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음

익구의 글은 유명논객이 썼다고 해도 믿을 만큼 훌륭하지만 저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젊은이의 글은 통찰, 균형감각 같은 미덕보다는 늙은이들을 자극할 만한 치밀한 분별, 신선한 발상 등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시비를 건 건 제가 익구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라고 봐 주시길.
- young님의 댓글

최익구-가만 생각해보면 인터넷을 가장 건전하게 사용하는 녀석이다.
진지하다 어렵다 그럼에도 긍정적이다
난 생각한다. 녀석은 무슨 재미로 살까?
- 고등학교 동창

익구 이놈한테는 글을 쓰기가 너무 조심스러워. 분명 맞춤법/띄어쓰기 등 틀린 글자가 마치 워드에서처럼 빨간 줄이 자동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지.
- 00학번 선배님

“자기를 다스릴 때는 가을기운을 띠고,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봄기운을 띠어야 한다(律己宜帶秋氣, 處世宜帶春氣)” 내가 늘 그렇게 해야 겠다고 품고 사는 생각을 미리 실천해나가는 익구형. 익구형의 성격을 좋아하고 익구형의 글을 좋아하고 익구형의 생각을 좋아하고 익구형을 좋아한다.
- 04학번 후배와 게시판 글을 주고받다가

지금 네 정도의 성향도 극렬 좌파라 오해받는, 명문대 경영학도들의 무관심과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너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너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게 아니길, 이정도도 오해받는데 더 반대편으로 기울면 어떻게 하지 소심해 하는 게 아니길 바란다.
- 고등학교 mannerist님의 정감어린 말씀

한번쯤 ‘인용을 하나도 쓰지 말고’ 글을 써 보는건 어떨까? 당신 글을 볼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게 주장은 명확하지만 그에 따르는 근거로 제시하는 ‘옛 성현들의 말씀 인용’은 모호한 경우더라구. 역으로, 익구공의 글에서 인용을 싹 들어내고 어떤 야마가 남나 한번 따져보길. 당신만큼 ‘옛 성현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우와 이 양반 만만찮게 글도 쓰고 멋도 부리는구나’라고 놀라겠지만, 글에서 야마 뽑는 재주, 그리고 더 나아가 글쓴이의 심리 상태까지 읽어내는 사람들에게 호사스런 취미가 쫌 지나친 양반이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니까.
- mannerist님의 또 다른 충고

익구형님과의 밤을 잊은 대화. 때로는 학자같은 면모를 보이시다가도 때로는 정치가 같은. 뭐랄까 가공할 만한 식견을 지닌 달변가라고 해야할까. 역시나 오늘도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평소 관심만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있던 주제에 대한 화두도 던져주시고.
(중략)
나도 꽤나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익구형은 남달랐다.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 같은 측면 뿐만 아니라 흥미를 가진 분야에 대한 남다른 시선. 역시 학생으로서 모델로 삼고 싶은 선배 중 한분이다. 많이 배워야지 흐흐흐 이런 분 알게 된것도 분명 행운이니깐
- 06학번 후배와 밤새 대화 나누고 난 뒤 후배가 쓴 대화 후기(?)에서 발췌


부록으로는 고등학생 시절 짝을 했었던 석민이가 저에 대해 평한 글을 퍼온 것입니다. 친구가 재담을 통해 웃자고 과장광고를 한 것일 뿐이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달 동안 지켜본 익구씨의 모습...]
- 2001.05.01 작성, 출처 - 서울외고 6기 중국어과 동호회 ‘我是誰’

난 2달 남짓한 시간을 최형(본명:최익구 18세)과 함께 짝궁이란 명목으로 생활을 같이했다.
7시20분에 만남, 계속 동거동락, 11시에 헤어짐 다시 7시간 후에 만남...
부모님보다도 더 오래 생활을 한 나로서는 최형의 몸가짐과 행동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먼저 그의 단아한 자태...
한 마리의 봉황을 보는 듯 하다. 가지런한 손가짐...
바른 몸가짐... 곧은 걸음걸이...

두 번째... 수려한 말솜씨...
그의 수식어구에는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세 번째... 해박한 지식...
철학, 종교, 법, 사회, 문화, 한문, 문학...
우리반, 과, 학교에서는 적어도 최형을 따라올 인재는 없는 거 같다.

네번째...온화한 인품...
절대 거절이란 것을 모르는 부처, 공자, 예수 같은 마음~~~

다섯 번째... 철저한 준비 정신...
솔직히 우리 반에서 쉬는 시간에 다음시간 예습, 준비를 하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최형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다...

여섯 번째...겸손함~~~!!!

아마 이 글을 읽고서... 분명 꼬리에다가...
"아닙니다 정형... 제가 뭘요..."라고 쓸 것이다.

내가 더 쓸수도 있지만... 최형의 심기가 불편할까봐...
그리고~~~

요새 최형 보고 변태라고 하는 불순분자들이 있는데...
절대 아님... 절대... never...
그럼....모두 안녕~~~

최형 사랑해영~~~!!!

담혜선생팬클럽 모집
신청:석민동자에게...


물론 이 글에 날라 들어온 돌들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휴... 최익구 안티싸이트는 벌써 활동중 입니다.”
“난 안티 최익구이다... 그는 거절을 안다...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러지마 익구도 가끔 착할 때도 있어.”
“정석민... 널 보니깐 과거 2년 동안 속고 지내왔던 나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과거를 보는 거 같군... 너도 곧 깨닫게 될 것이야...”

Posted by 익구
:

생일에 읽은 자경문

익구 2009. 7. 18. 10:09 |

1995년 7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복귀를 선언합니다. 그 후로 내내 야당 분열과 정계은퇴 번복이라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제 생일날 다시 돌아온 그분을 저는 덜 미워했습니다. 제 생일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때 만들어졌던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을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중학교 2학년 때는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응원했습니다. 1994년 7월 18일에는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이 주사파의 배후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주장하여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신공안정국을 형성하기도 했었죠.


서기 660년(의자왕 20년) 7월 18일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했습니다. 1401년 7월 18일 조선 3대 임금이 신문고를 설치했으나 유명무실한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이 일들은 양력인 제 생일과는 크게 관련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굳이 양력 기록을 찾아보자면 64년 7월 18일에는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는데 네로 황제가 범인을 크리스트교도로 지목하면서 엄청난 박해를 가했습니다. 1840년 7월 18일(음력 6월 16일)에는 영국이 청나라를 공격하면서 아편전쟁이 시작됩니다. 1936년 7월 18일에는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합니다. 공교롭게도 피 흘린 이야기가 많네요.^^;


1953년 미국의 예일대학교에서는 졸업생을 대상으로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글로 써서 소지하고 있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꿈을 글로 기록해서 간직하고 있다고 답한 학생은 3%였다고 하네요. 20여년 후에 살펴보니 목표를 정해 기록해둔 3%의 졸업생이 그렇지 않은 97%의 졸업생 전부가 모은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65세 정년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고 합니다. 젊을 때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글로 적어 놓은 사람들이 상위 3%의 부를 누리고 있었다고 하네요(인터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정확한 출처는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부만을 측정했기 때문에 진정한 삶의 성공이라고 보기에는 성급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몇 줄 글로 압축해서 써둔다면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당장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기 힘들다면 좀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라도 적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가령 스물 두 살의 키에르케고르는 일기장에 “온 세계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진리,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진리”를 갈망한다고 썼습니다.


생일을 맞은 어스름 새벽에 청년 율곡이 스무 살에 쓴 자경문(自警文)을 여러 번 읽고 새겼습니다. 미욱한 제가 이 시린 마음을 얼마나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고마운 분들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제 이상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점검하는 하루 보내겠습니다. 자경문 원문은 최인호 선생님의 『유림』에 나오는 번역본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번역본을 참조해서 풀이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자경문(自警文)>
 
1. 입지(立志)
먼저 마땅히 그 뜻을 크게 품어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터럭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선수대기지 이성인위준칙 일호불급성인 즉오사미료


2. 과언(寡言)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 때가 된 뒤에야 말을 한다면 말이 간결하지 않을 수 없다.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심정자언과 정심자과언시 시연후언 즉언부득불간


3. 정심(定心)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放心)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힘을 얻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번뇌와 망상을 없애는 힘(定力)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마음이 어지럽고 어수선할 때에 의식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해서 그것을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뒤숭숭해지는 것과 같다.
마음은 갑자기 일어났다가 홀연히 없어졌다가 하여 나를 말미암지 않는 듯이 여겨진다. 설령 잡념을 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 ‘끊어야겠다는 마음’은 내 가슴에 가로막혀 있으니 이것 또한 망령된 잡념이다.
마음이 어지럽고 어수선할 때는 정신을 가다듬어 살며시 비추어 살필 일이지 집착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오래하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정해지는 때가 있다. 일을 할 때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는 것 또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다.

久放之心 一朝收之得力 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구방지심 일조수지득력 기가용이 심시활물 정력미성 즉요동난안 약사려분요시 작의염오 욕절지 즉유각분요
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숙기홀멸 사불유아 가사단절 지차단절지념 횡재흉중 차역망념야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당어분요시 수렴정신 경경조관 물여지구왕 용공지구 필유응정지시 집사전일 차역정심공부


4. 근독(謹獨)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도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게을리 함이 없다면 모든 나쁜 생각들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만 가지 악은 모두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음’에서 생겨난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浴沂詠歸).’는 의미를 알 수 있다.

*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浴沂詠歸)’는 세속의 명리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자리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출전은 『논어』 선진편 마지막 꼭지를 참조.

常以戒懼謹獨 意思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상이계구근독 의사존저흉중 염념불태 즉일체사념 자연불기
萬惡 皆從不謹獨生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만악 개종불근독생 근독연후 가지욕기영귀지의미


5. 독서(讀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쉬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해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홀로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학문을 하는 셈이다.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효기 사조지소위지사 식후 사주지소위지사 취침시 사명일소위지사 무사즉방하 유사즉필사 득처치합의지도 연후독서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독서자 구변시비 시지행사야 약불성사 올연독서 즉위무용지학


6. 소제욕심(掃除慾心)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財利)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榮利)은 비록 그에 대한 생각을 쓸어 없앨 수 있더라도,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다. 더욱 살펴야 할 일이다.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영리 수득소제기념 약처사시 유일호택편의지념 즉차역리심야 우가성찰


7. 진성(盡誠) 
무릇 일이 나에게 이르렀을 때, 만약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거나 게으름 피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딱 잘라 끊어버려서 내 가슴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범우사지 약가위지사 칙진성위지 불가유염권지심 불가위지사 즉일체절단 불가사시비교전어흉중


8. 정의지심(正義之心)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거나,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상이행일불의 살일불고 득천하불가위저의사 존제흉중


9. 감화(感化)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악행을 가해오면, 나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를 감화시키려고 애써야 한다. 집안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쪽으로 변화하지 않음은 다만 나의 성의를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횡역지래 자반이심성 이감화위기 일가지인불화 지시성의미진


10. 수면(睡眠)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서도 안 된다. 비록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충분히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든 일어나 몇 바퀴 걸어 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비야면급질병 즉불가언와 불가파의 수중야 무수사 즉불와 단불가구박
晝有睡思 當喚醒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주유수사 당환성차심 십분맹성 안피약중 기이주보 사지성성


11. 용공지효(用功之效)
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이 몸을 형벌을 받게 하고 치욕을 당하게 하는 일이니,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다.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용공불완불급 사이후이 약구속기효 즉차역리심 약불여차 육욕유체 편비인자

Posted by 익구
:

익구 대학 졸업하다!

익구 2009. 3. 2. 03:05 |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지난 2월 25일 대학교를 졸업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새내기처럼 지내다가 미적대지 말고 쿨하게 떠나자는 결심을 얼마나 지켰는지 모르겠다. 24일 도서관 마감 시간까지 그간 빌렸던 책을 대강 넘겨보고 모두 반납했다. 졸업일 전까지 대출 도서를 반납하라는 공지를 지키고 싶어서다. 마무리의 첫걸음은 아무래도 비움이나 내려놓음이다. 무사 졸업이라는 대업(?)을 이룬 지금 좀 더 간소해져서 어디든 옮길 준비를 해야겠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을 때 어느 외국 외교관이 “이처럼 즐겁지 않은 황제 즉위식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핀잔했다고 한다. 즉위식 당일 아침 고종은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여파였는지 행렬의 출발을 지연시키는 등 몽니를 부렸다. 아무리 좋은 의식이라도 설렘 만큼이나 두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흰 손(白手)을 뽐내야 하는 내 처지는 두려움이 설렘을 압도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졸업식 즈음해서는 끝맺음에 대한, 혹은 떠남에 대한 영감이 마구 떠오를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머리가 하얘졌다. 학생 신분은 벗어나지만 딱히 어디 거처를 마련한 곳은 없어서 대학 도서관을 이용한다는 핑계로 학교 출입이 잦을지도 모르겠다. 지역 도서관을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학교 도서관에 대한 향수를 금세 지우지 못할 듯싶어서다. 책은 빌려주지 않아도 열람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오래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닌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수로부인에게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라고 노래했던 헌화가의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기에 아름다웠다. 있을 때 잘하고 아쉬울 때 내려오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미련에 허덕이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다. 나는 내가 졸업을 했답시고 미련한 젊음 대신 유능한 점잖음을 택하고, 우직한 고집 대신 표변하는 영특함을 예찬할까 아슬아슬하다. 내 지인들에게 평소처럼 나를 따끔하게 꼬집어주었기를 재차 부탁했다.


내가 존경하는 위인 가운데 한 분이 잠곡 김육 선생님이다. 격렬한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칠순이 넘어서도 대동법(大同法) 확대 실시에 일생을 걸었던 잠곡의 신념을 흠모한다. 잠곡은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줄여나가는 노력의 전범으로서 내게 각인되었다. 당시 대동법 반대론자들도 공납의 폐단이 심각함을 알았지만 그네들은 호패법을 강화해 농민의 유망을 막자는 방책을 내놓았다. 잠곡은 백성을 통제하고 감시해서는 민생 안정을 이룰 수 없으니 호패법을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석탑의 뜰을 떠나며 잠곡의 정신, 대동법 정신을 이어 받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대동법과 호패법의 대립은 결론을 내리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또렷한 해답이 있기보다는 ‘비율과 조합’의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비율과 조합 앞에서는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열린 자세,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개개인의 각성을 존중하는 것이 비율과 조합의 문제를 푸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상론과는 달리 우리 사회는 특정한 각성만을 강요하고 상찬하기 일쑤다. ‘교정’의 대상이 아닌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이 우리 사회를 윤택하게 만든다. 나도 그 풍요로운 마음을 모으는데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보태길 희망한다.


2.
옛사람의 사귐에 대한 글을 묶은 『거문고 줄 꽂아놓고』라는 책에서 읽었던 일화가 자꾸 떠오른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벗 사귐에 차이가 컸던 모양이다. 정약전은 여항의 술꾼들과 가까이 지냈지만 정약용은 주로 깔끔한 엘리트들과 어울렸단다.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형제의 처지가 위태로워졌을 때 형의 벗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약전 형제를 잘 대해주는데 아우의 벗들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다산은 “이 점이 바로 내가 형님께 못 미치는 점!”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이래저래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밀기도 했다. 대학 시절 동안 얼마나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었는지 반성해본다.


2002년 대학 새내기 시절 나는 대학교 사람들에게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고등학교 친구들만 쫓아다녔다. 대학교 반 활동에 너무 소홀하다 보니 나중에 내가 돌아갈 자리가 딱히 없었다. 감사하게도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반을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여러 사람을 알게 되었고 나쁘게 말하면 대학에서의 교우관계가 좀 흩어져버린 셈이다. 내 어수선한 새내기 시절을 함께 보내준 원혁, 세일, 병채, 훈석, 현수(김), 아름이 등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이런 혼란이 있었지만 이게 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하려 했던 내 의지였기 때문에 크게 서운하지는 않다. 앞으로 사회에서 어떤 별 같은 분들을 만나 뵐지 모르겠지만 그 때에도 빈천지교(貧賤之交)를 나눈 대학 사람들, 고등학교 친구들을 찾아다닐 게다.


내가 반 활동이 늦은 편이라 선배님들, 동기들, 후배들을 뒤늦게 만났고 지금도 새로 만나고 있지만 그래서 더 각별했던 것 같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한 때나마 내가 여기 계속 머물러야 하는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고심 끝에 육두품이라도 좋고, 서얼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함께 하자고 결심했다. 육두품이라는 한계를 한탄하면서도 시무10조를 올려 흔들리는 신라를 바로잡으려 했던 최치원 선생님이, 서얼이라는 설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한 나라 조선을 고쳐야 한다며 <북학의>를 지었던 박제가 선생님이 되자는 허풍을 늘어놓았다.


자신들을 박절하게 대한 나라에게 애정을 쏟은 그 분들에 비하면 고대 경영 단결 飛반인들께 두터운 은혜를 입은 나는 그야말로 행운아니 좀 더 수월하게 본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능력이 모자라 그 마음을 다 지키지는 못했다. 지난해 4월 飛반인의 밤 행사 때 방명록에 生我者父母 知我者飛班也라고 썼다.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라는 관중의 유명한 말씀을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서 더 보탤 말이 없다. 내 졸업 인사를 한 해 전에 이미 써둔 셈이다. 너무 빨리 잊지 마시고 조금 천천히 잊어주시면 고맙겠다.


이제 갓 선배가 된 후배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없냐는 질문에 잔소리는 하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했는데 결과적으로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고종석 선생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모든 선배는 후배가 저보다는 나은 선배가 되길 바랄 테니 괜찮겠지?^^;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 후배 앞에서 많이 말하기보다는 많이 들으라고 조언했다.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후배들 말을 잘라먹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는 개인적인 경험담을 덧붙여서 말이다. 나도 후배들에게서 좀 더 많이 배우고 싶었는데 아쉽다. 나는 내 젊음을 알차게 쓰지도 못하면서 후배의 어림을 탐내는 못난 선배였다.


그저 바라만 봐도 아름다운 시기인 09학번 새내기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군소리일 테다. 조심스레 건넨다면 자신의 안목을 갈고 닦는 연습을 위해 의심을 해보길 권하고 싶다. “작은 의심을 품으면 조금 나아가고, 큰 의심은 크게 나아가며, 많이 의심해도 괜찮다. 그러므로 분명한 곳도 의문이 있는 것처럼 봐야한다(小疑則小進 大疑則大進 多著疑不妨, 故無疑處有疑看也)”라는 주희의 말씀이 참 좋다. 대학교 저학년 때는 의심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까. 나도 아직 내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에게 읽히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괴감이 드니 그리 만만한 요구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3.
학교 다니면서 저지른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졸업 무렵에 유독 생각났던 사건이 있다. 2006년의 일로 기억하는데 후배들과 함께 엠티 후발대를 가게 되었다. 기차표가 모자라서 무임승차를 해야 할 처지가 되자 내가 다음 기차를 기다리든가 아예 엠티를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시외버스를 타고 엠티 장소로 향했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을 덜 어기는 게 민주시민의 덕목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내가 좀 넘쳤다. 나는 내 고결함(?)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선배의 권위를 이용해 후배들을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끌고 다녔다. 그때 당시 후배들을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고마운 분들이 참 많지만 여기서 다 나열하다가는 전화번호부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배운 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건승하세요.^-^ - [無棄]

Posted by 익구
:

예전에 썼던 50문 50답의 문항을 몇 개 수정하고 최신 답변으로 업데이트 해봤습니다. 평소 익구에게 궁금한 점이 있으셨다면 댓글로 질문해주세요. 성심 성의껏 답변 드리겠습니다. 이 글이 익구닷컴 최고의 스크롤의 압박을 자랑할 듯싶은데 이제 이런 긴 글은 정말 자제할게요. 알면 알수록 오히려 할 말이 줄어드는 역설 속에서도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일평생 “무지의 안락”과 싸우겠다는 것뿐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인터넷을 배우고 온라인 상에 이런저런 잡글을 쓰기 시작한지 일곱 해입니다. 안 했으면 좋았을 말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런 실수들도 제 성장통이 되고 제 인식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말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실행되지 않는다면 말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言工無施 不若無言)”는 백사 이항복 선생님의 말씀을 천금처럼 여기고 게으른 심신을 다독여서 꾸준히 배우고 익히겠습니다. 응원해주세요.^-^


익구닷컴 방문객 10만명 돌파에 지대한 공을 세워주신 스팸 로봇님들께 심심한 감사를!


1. 이름(실제...^^)
최익구. 높을 崔자에 날개 翼자에 구할 求자입니다. 이름의 뜻은 “높이 날아서 구하라”라는 거창한 뜻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스스로 호를 지어서 쓰고 있습니다. 평생토록 쓸 호가 정해진 것은 아니니 좀 더 좋은 호가 생각이 난다면 몇 번 더 변경될 여지는 있습니다. 최근에 무기(無棄)라는 자호(自號)를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박연이 세종대왕에게 시각장애 악공들의 처우 개선을 요청하며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天下無棄人也)”라는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간 제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남을 미워했던 것을 반성하는 의미기도 합니다. 제 미움을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 제 옹졸함이 빚어낸 것임을 자각하고, 저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이들에게서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일전에 드라마 신돈을 즐겨 볼 때 한동안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뒤지며 고려 말기 역사에 빠졌었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고요. 저마다 약점이 있는 사람들끼리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약점에 집착하기보다는 장점을 도두보는 노력을 함께 해보고 싶어요. 훌륭한 목수는 버리는 재목이 없고,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으며, 웅숭깊은 스승은 아랫사람에게서 배우며, 부지런한 학생은 자신이 증오하는 것에서도 장점을 취하듯이 말입니다. 편협하거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너그럽고 섬세하며 온유하기란 참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여하간 제가 지은 호대로 사람이든 꿈이든 원칙이든 제가 맺은 인연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으려고요.


2. 생년월일과 고향

1983년 7월 18일(음력 6월 9일)입니다.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가뜩이나 더운 대구이지만 그 때는 더 더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위에 무척 약합니다.^^; 제 명목상 고향인 대구가 이런저런 사건사고로 말미암아 디시인사이드 사건사고갤러리에서 고담 대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었다고 합니다. 배트맨이 활약하던 그 우울한 도시와 대구가 포개지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지요.


3. 혈액형
A형입니다. 저는 혈액형 심리학은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누차 강조합니다. 뭐 다들 알면서 농담 삼아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이상하게 혈액형 운운하는 게 탐탁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혈액형 심리학이 유행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네 가지 혈액형의 분포가 비교적 골고루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경우 A : B : O : AB형이 34 : 27 : 28 : 11로 비교적 균등하게 나오는 편입니다. 일본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데 이 때문에 한국과 일본에서 혈액형 심리학이 성행하고 있지요. A형과 O형의 비율이 압도적인 유럽 나라들에서는 혈액형별 성격유형을 따질 실익이 없으니 말입니다. 여하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적인 특성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바넘효과(Barnum effect)라든가, 혈액형별 성격 유형에 자신을 꿰맞추는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같은 것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MBTI 같은 보다 정밀한 성격심리 검사를 해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저는 MBTI심리검사 상으로는 INTJ형, 심리학자 칼 융의 분석 상으로는 내향적 사고형입니다.


4. 장래희망

졸업을 앞둔 중학교 교실의 심드렁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책이나 주워 읽던 중에 담임 선생님께서 넌지시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장래희망의 뭐냐는 질문에 별 생각 없이 대학 교수라고 말씀 드렸지요. 담임 선생님께서는 분개하시며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 결국에 나 같은 선생님 정도에 그친다며 1시간 동안 열변을 토해내셨습니다. 당신께서도 소싯적 꿈은 대학 교수였다며 좀 더 큰 꿈을 주문하셨고 귀가 얇았던 저는 그 때의 여파였는지 허풍만 늘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막연히 제 장래희망을 국무총리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둘러대면서 말이죠. 국무총리는 직선 대표가 아니기는 하지만 한번쯤 꿈꿔 볼만한 직업(?)이니까요. 인사청문회법을 통해 임명직 대표인 국무총리나 국무위원에 대한 검증이 보다 더 섬세해진 것은 환영할 일이고요. 그만큼 민주적 정당성을 갖추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국무위원과 중앙행정기관의 장, 정부위원은 모두 정부조직법에 그 범위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행정부 최고 심의기구인 국무회의는 대통령이 의장, 국무총리가 부의장이 되며 18부 장관 및 기획예산처 장관이 국무위원이 됩니다.

여기서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이 아니라 국무회의 구성원이라고 칭해야 합니다. 따라서 현행 국무회의 구성원은 21명입니다. 여하간 제 장래희망은 국무회의 구성원입니다. 꿈을 위해 매진하다가 제 한계에 맞닥뜨리면 그 때 가서는 정부위원으로 할인(?)하든지 하려고요.^^; 세상사는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 일을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한다고 해서 그 일이 밥벌이가 잘 되는 것도 아니며, 절실히 원하고 살뜰하게 노력한다고 해서 뜻하는 바를 끝끝내 이루는 것도 아니니까요. 중도에 지쳐 쓰러지고 힘에 부칠 때, 희망과 신념을 위해 한번 오롯이 바치고 난 거기까지가 제 한계라면 안달하지 말고 다른 꿈을 품어볼 생각입니다.^^;


5. 아이디, 뜻, 그리고 만든 이유

인터넷을 쓰기 시작한 초기에는 철학자 칸트를 흠모하여 kant가 들어간 아이디를 쓰다가 제 스스로 호(號)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때부터는 호를 따서 아이디를 만든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담혜(澹兮)에서 따온 damhye, 소권(疏權)에서 따온 sogwon, 우약(憂弱)에서 따온 uyak 등이 그것입니다. 요즘에는 어지간하면 liberal을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미 가입된 아이디인 경우 생각은 힘이 세다라는 뜻으로 만든 strongthink를 쓰기도 합니다. 아이디가 아닌 별명(닉네임)으로 많이 쓰는 건 새우범생입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에서 영감을 얻은 건데, 대가들 틈에 끼어서 부지런히 새우등 터져 가며 열심히 배우겠다는 제 나름대로의 향학열(向學熱)을 표현한 겁니다.


6. 주량

지난 여름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를 벤치마킹한 “술 술 술 술을 마십시다!” 프로젝트를 통해 내수 경기 진작에 대한 강한 열의를 나타냈습니다. 이 숭고한 취지에 동감하는 분들께서 우리 경제가 도약하는 발판을 함께 마련해 주셨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 트레이드마크를 “릴렉스 롱런(쉬어가며 오래가는)” 음주 대신 “1+α(일단 한 병은 먹는)”음주로 전환했습니다. 『논어』 향당편(鄕黨篇)에 보면 공자는 술을 마시는 데 한도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술에 취해 어지러워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고 했습니다. 정해진 주량은 없으나 취하지는 않고 기분이 좋은 정도로 그친다는 말입니다.

저는 유주무량과 불급난의 아름다운 결합을 지향하지만 굳이 수치를 제시하자면 1.5 단위 이상을 넘기지 않는 선에서 마시려고 합니다. 즉 소주 1.5병, 맥주 1500cc 이상을 마시는 것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2004년에 사발식 시주 7번 한 이후로 범막걸리 계열의 술은 어지간하면 피합니다.ㅜ.ㅜ 저랑 막걸리나 동동주 마시자고 하면 곤란해요. 제가 좀 덜 가난하거나, 덜 충동구매 했다면 남는 돈으로 포도주를 즐겼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참 그리고 소비자 후생을 필연적으로 깎아먹는 독점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처음처럼 한 병쯤 챙겨주세요.


7. 자신의 성격, 20자평!

이 세상에 한 뼘의 자유라도 넓히고 싶은 자유주의자, more liberal!


8. 나만의 징크스나 콤플렉스

중국어와 영어를 능숙하게 한다는 여섯 살 소년이 뉴스가 된 적이 있다. 그때 한 친구의 말이, 전생에 태어났던 나라의 말은 쉽게 배운다는 것이다. “그럼 난 한국에서만 계속 태어났나 봐. 외국어에 영 젬병이니.” 내가 원통히 뇌까리자 그 친구가 얄밉게 말했다. “넌 사람으로 처음 태어난 거 아닐까?”

황인숙 시인님이 2006년 5월 한국일보에 기고하신 [영어공부]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나는 왜 영어를 이리 못할까?”라고 한탄하면서 쓰신 수필의 일부입니다. 저도 어쩌면 사람으로 처음 태어난 건지 모르겠어요. 적어도 영어권에서는 태어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세계화의 거센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는 제 자신이 측은하지만, 늦게까지 모국어의 속살을 헤집는 녀석으로 남고 싶어요. 비록 국내용 인재에 그치더라도 여전히 글로벌 인재보다 그 수요가 많은 만큼 그 수요에 부응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9. 자신의 이상형은?

제 주제는 파악 못하고 눈이 높은 편입니다. 일단 저보다는 똑똑한 사람이 좋아요. 저보다는 좀 더 재치 있고, 유연하며, 현실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좋고요. 저보다 나아 보이는 면이 많아야 평생 보고 배울 수 있겠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해서 티격태격 싸울 일이 없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저보다 외국어를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눈물은 아끼되 세상의 서러움에는 눈물 흘리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자리를 신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제 눈이 하늘 높이 달렸다고 구박하셔도 달게 받으려고요. 그러나 이상형이라면 모름지기 까다로운 측면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상형을 그리는 까닭은 그것이 반드시 옳거나 유익해서가 아니라 드물고 찾기 힘들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10.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녹색과 노란색


11. 좋아하는 음식

순두부찌개, 냉면, 제육볶음, 통닭, 참치김밥, 메밀국수, 처음처럼(?)


12. 싫어하는 음식

오이 ㅡ.ㅡ


13. 좋아하는 사람 타입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는 뜻으로 무기(無棄)라는 호를 지어 쓰고 있는 만큼 기왕이면 모든 사람의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 진시황이 다른 나라 출신들을 의심해 모두 국외로 추방하려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릴 때 초나라 출신 이사는 간축객서(諫逐客書)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태산은 작은 흙덩이도 사양하지 않았기에 그처럼 크게 되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처럼 깊게 되었다(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이라는 이사의 주장에 진시황은 축객령을 철회하고 이사를 중용함으로써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뤄냈습니다.

그래도 굳이 타입을 말하라면 “자유만큼 책임을 생각하는 사람”이 참 좋습니다.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은 “자유만큼 책임을 생각하는 언론”이라는 사시(社是) 혹은 모토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2004년 경영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학생회장 인사 시간에 제가 새내기들에게 했던 첫 번째 당부가 “자유를 만끽하시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시기 바랍니다"였기도 합니다. “자유만큼 책임을 생각한다”는 말은 저 같은 자유주의자에게 있어 그 어떤 모토보다 명징한 신념이 아니지 싶어요.

경영학의 비용편익분석에서 영감을 얻어 주어진 자유만큼의 책임을 다했는가하는 자유책임분석(Liberty-Responsibility Analysis)을 생활화하려고요. 회계학적으로 보자면 분개할 때 차변에 얼마만큼의 자유를 쓰면, 대변에는 그만큼의 책임을 기입해야 대차평균의 원리가 맞는 셈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란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4. 좌우명

명언명구 수집이 삶의 한 부분인 저로서는 좌우명 삼고 싶은 말들이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실력 있는 이상주의자가 되자”,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는 말을 패러디한 “지성감인(至誠感人)”  정도가 제가 만들어서 쓰는 것이고 나머지는 다 선현의 말씀을 빌려와 쓰고 있습니다. 몇 개 소개하자면 『도덕경』 2장의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서 살지 않는다(功成而弗居)” 공을 쌓아도 그 공을 주장해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언가 이룬 것이 있을 때 마치 저만의 공인 것처럼 자랑하지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여조겸의 『동래박의』에 나오는 “군자는 제가 약한 것을 걱정하지 적이 강한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君子憂我之弱 而不憂敵之强)”저는 이 말을 언제나 자신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을 인식하자로 받아 들였습니다. 『맹자』의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하다면 천만인이 가로막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는 구절도 제게 힘이 됩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계원필경(桂苑筆耕) 서문에 보이는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한다(人百己千)”는 구절은 열심히 살기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원나라 명재상 야율초재가 말씀한 “하나의 이익을 얻는 것은 하나의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보다 못하고, 새로운 일을 한 가지 하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한 가지 수고를 더는 것보다 못하다(興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도 요즘 저를 흔들고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의 노력으로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는 철학자 칼 포퍼의 말씀은 정말 아름답죠. “장기에는 우리는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며 장기적으로 경제는 균형에 이를 것으로 낙관하던 고전학파 경제학에 신랄한 비판을 한 경제학자 케인즈의 말씀도 여러모로 시사점이 많습니다. 최근에는 저의 2대 선조님인 문헌공 최충 할아버지께서 “선비가 세력으로써 출세하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어렵고, 훌륭한 학문과 행실로써 영달하여야 비로소 경사가 있다(士以勢力進 鮮克有終 以文行達 乃爾有慶)”는 말씀을 새기고 있습니다.

제게 좌우명을 하나만 골라보라고 물으신다면 그 질문은 너무 잔인합니다. 하지만 대외 홍보용으로 하나 정할 필요는 있을 거 같아요.^^;


15.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프로포즈를 한다면 어떻게?

제 역할 모델인 칸트께서는 “진실한 사랑에 빠진 남자는 그 애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제대로 사랑을 고백하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수줍음이 많아서 프로포즈 같은 건 여러모로 애로가 많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뭔가 그럴듯한 프로포즈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다른 프로포즈가 없어도 좋아하고픈 녀석이 되려고요. 화려한 이벤트보다는 시시한 일상의 실천으로 보답하고 싶어요.


16. 요즘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은?

밖에서 놀거나, 일찍 자거나, 인터넷에 열중하는 경우가 많아서 티비는 잘 챙겨서 보는 편은 아닙니다. 그나마 사극을 즐겨 봅니다. 요즘은 [주몽], [대조영], [연개소문]이 무척 재미나던데 개인적으로는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본 [신돈]이 기억에 나네요. [100분 토론]을 비롯한 토론 프로그램이나 온게임넷 스타 경기 중계를 애청합니다.


17. 감명 깊게 읽은 책

중학교 1학년 때 어쩌다가 노자의 『도덕경』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기막힌 인연이었어요. 어린 마음에 무언가 얽매이지 말고 착하게 살자라는 교훈 정도만 얻었지만... 강박관념과 완벽주의에 시달리던 저에게 여유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준 것 같습니다. 동양고전 하나 읽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신 분들은 사서(四書)보다 도덕경을 먼저 건드려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곱씹어볼 말들이 무척 많지만 그 가운데 최근 제 마음을 흔든 건 27장의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 물건을 잘 아끼고, 아무것도 버리지 않습니다. 이를 일러 밝음을 터득함(襲明)이라 합니다(是以聖人常善求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라는 구절입니다. 왕필(王弼)은 주석을 통해 성인은 나아갈 것과 향할 것을 만들어서 진보에 뒤쳐지는 사람들을 못났다고 버리지 않으며, 저절로 그렇게 됨을 도와줄 뿐 새롭게 일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다”라고 풀이합니다. 

노자의 “사람을 버리지 않음”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갈라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을 한결같이 대한다는 점에서 보통사람의 차별주의적 세계관을 뛰어 넘어 선악과 시비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 같아 조금 공허하게 들리기도 하지만요. 그러나 그런 식의 공허한 개념이라기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혹은 세속적으로 해석해서 사람을 구제하기를 즐기며, 스스로의 편견으로 말미암아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없는 자세로 본다면 얼마든지 실천 덕목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남자』에서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사람에 버릴 사람 없고, 물건에 버릴 물건 없다(人無棄物 物無棄物)”고 말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다시금 제 호인 무기(無棄)가 여기서도 많은 영감을 얻었음을 밝힙니다.

60장의 “작은 생선을 굽듯 해야 한다(若烹小鮮)”는 말도 좋아합니다. 작은 생선을 굽는다며 젓가락으로 헤집고 뒤집기를 반복한다면 생선살이 부서지고 말 겁니다. 가만히 놓아두고 지켜보는 것도 어렵고, 적절한 시점에서 뒤집기는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생선을 은근하게 굽는 마음처럼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쥐어 짜내지 않고, 자연스레 배어나고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약팽소선은 도가적(道家的) 자유주의자를 지향하는 제가 그리는 “억지로 하지 않기에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의 고요함과 치열함이 아닐까 싶어요. 생선이 새카맣게 탈 때까지 야윔의 고착화를 방관하지도 않고, 노릇노릇 익기도 전에 뒤집으려고 서러운 눈물을 요구하지도 않겠습니다. 전체주의의 젓가락이 생선살을 들쑤시는 것에 맞서고, 인위적인 손길이 센 불로 높여 생선껍질 태우는 데 고개를 젓겠습니다.


18. 자신의 보물 1호(‘자신’을 제외한..^^;)

제 온라인 보금자리인 익구닷컴(www.ikgu.com)입니다. 2003년 7월 개통한 이후 제 잡글들을 틈틈이 모아둔 저의 분신입니다. 요즘 딴에는 공부한답시고 긴 글을 예전처럼 자유로이 쓰지 못할 거 같아서 매일매일 짤막한 일기를 쓰는 데 주력하고 있지만요. 저란 녀석이 궁금하시면 주저말고 놀러오세요.^-^


19. 가장 행복할 때는? or 가장 행복했던 때는?

중국의 운문선사의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이라는 가르침을 생활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Eleanor Roosvelt)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and today is a gift, that's why they call it the present.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이며, 오늘은 선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를 선물이라고 부른다”니 정말 멋진 말이에요. 정말 오늘 하루를 선물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그만한 행복이 없겠죠.


20. 타인에게 가장 듣기 좋은 말은? or 듣고 싶은 말은?

“너와 함께 해서 유익했다”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고 싶다” “소중한 인연이다”
저란 녀석과 교류하는 것이 살림살이에 코딱지만큼이라도 보탬이 되고, 쥐꼬리만큼이라도 유쾌해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랜 시간 곁에 두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픈 녀석으로 평가된다면 일개인으로서 그만한 영예가 없겠죠.


21. 10년 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빌어먹지 않고 “벌어먹는” 삶을 살고만 있다면 감지덕지겠죠.


22. 거울을 본 후 자신의 생각은?

수염을 기르면 미염공(美髥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일찍 잘까? 술을 줄일까?
슬퍼하지 마라. 거죽은 머잖아 하향평준화 될지니...


23. 최근에 슬프거나 울었던 기억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지한 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실패가 가슴 아픕니다. 제 지지자들에게서 버림받는 정치인처럼 처량한 것도 없다지만, 자신의 꿈을 투자했던 인물에게서 실망을 느끼는 지지자도 서럽기는 매한가지일 거 같아요. 지난 5월 지방선거가 끝나고 친구네 집에서 밤새도록 통음하다 꺼내든 책에 정현종 선생님의 『대학시절을 향하여』라는 글이 보였습니다. 퀭한 눈으로 읽다가 “우리의 열망과 꿈이 정당한 것이라면 정당한 것일수록 스며드는 아픔도 클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콧잔등이 시큰해졌어요. 술을 더 마셔야 했기 때문에 울지는 않았지만요. 푸하하

저는 3년 전 열린우리당이 창당할 때 제대로 된 보수정당으로 달려갈 만한 가능성이 가장 많이 보인다며 추켜세웠습니다. 우리당이 실적이 엉망이라며 아우성인 투자자들을 외면할 때도 솔직히 조금 더 넉넉하게 지켜봐 줬습니다. 저는 어쩌면 이 정당이 너무 많은 기대를 이루어주길 바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잘 살면서 따뜻하기까지 한 나라”에 대한 꿈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청부안민(淸富安民)의 꿈은 독점 불가능하잖아요. 우리당의 실패가 온건 보수 노선, 개혁적 자유주의 노선이 통째로 폐기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제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케인즈의 유효수요(effective demand) 개념을 빌려 왔습니다 이 실패를 거름 삼아 다시금 괜찮은 보수정당을 꿈꾸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품습니다. 저는 아직 젊은 데 벌써 제가 지향하는 바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려니 섭섭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걸 미련이라고 해야 할까요?^^; 노무현 대통령님과 참여정부가 얼마나 더 초라해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네들이 소나기를 맞으며 물러갈 때 함께 비를 맞아주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행동이 옳아서가 아니라 드물기 때문입니다. 아 너무 솔직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네요. 그만큼 여러분들께는 솔직하고 싶어요.^-^


24.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주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미시경제학 공부를 하다가 일반균형분석(general equilibrium analysis)이라는 화두를 얻었는데 이 안목을 선물하고 싶어요. 이건 일방적인 선물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것이겠지만요. 단기간의 부분균형분석에 집착하지 말고, 장기간을 포함해서 서로 연관된 모든 시장들을 함께 분석하는 일반균형분석의 아이디어를 이제야 깨닫다니 제 무식을 고백하는 거 같아 부끄럽네요. 한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른 시장의 균형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부분균형분석은 복잡한 경제현실을 단순화함으로써 특정 시장에서 균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용이하게 분석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각 시장 사이에는 연관성이 존재할 수 있으며, 한 시장의 변화가 다른 시장의 균형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두 분석 기법 모두 저마다의 가치와 유용성이 있지만 제게는 일반균형분석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제도를 고쳐나가는 시각이 좀 더 필요할 거 같아요. 지금 당면한 현상 너머의 파급효과와 상호작용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해봐야겠습니다. 그것이 좀 더 사회적 후생을 증진시키는 일이 될 거예요. 함께 해요.


25. 꼭 봤으면 하는 영화

영화를 많이 안 봐서 잘 모르겠네요. 유치찬란한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 [오렌지 카운티]를 추천합니다. 국내에서는 영화로 개봉하지 않고 곧바로 비디오로 나온 것 같은데 그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 별명 가운데 하나가 미스터 빈인데 저는 그런 식의 유치한 영화가 좋아요.^^


2004년 10월 1일 종묘 답사부터 시작된 목조건축에 대한 관심이 고구려 고분벽화나 고려청자, 불화, 불상, 석탑 같은 고미술 전반으로 확장되더니 이제 문화산업이나 문화정책까지 눈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이기 이전에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사진 배경인 종묘 정전(正殿)은 여느 고궁과는 달리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제사를 위한 건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종묘 정전은 남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月臺, 대궐의 전각 앞에 놓인 섬돌)가 넓게 펼쳐 있지요. 종묘 정전의 웅장함에 몸서리치면서도 허구한 날 죽은 이를 위한 정성을 쏟느라 살아있는 자들의 고통은 제대로 돌보지 못한 우울한 역사가 떠오르네요.

여하간 그럼 다시 이어집니다.^^;


26. 생일날 받고 싶은 선물 리스트!

저는 생일에 그리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분들의 생일에도 무심한 편이지요. 저는 단순한 생일보다는 개인적인 기념일이 더 크게 다가오거든요. 가령 1월 14일을 사색의 날, 9월 10일을 독서의 날 이런 식으로 기념하는 참 특이한 녀석이지요.^^; 좀 더 첨언하자면 생일보다는 망일(亡日)이 더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요. 여하간 생일 선물은 문화상품권이 좋고 포도주 같은 술 선물도 좋을 거 같아요.


27.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걷는 걸 좋아합니다. 소요(逍遙) 혹은 만보(漫步)라고 할 수 있지요. 가끔 그 정도가 지나쳐서 저랑 문화유산 답사를 가는 친구들은 탈진 답사 모드라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발 운동으로 뇌의 혈류량이 증가하면 뇌도 함께 활성화되어서 좋은 생각도 많이 하게 되는 거 같기도 하고요. 오후 4시에 어김없이 시작하는 칸트의 산책을 보며 사람들이 시계를 맞췄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죠. 또한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란 글을 남기기도 했지요.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내 마음은 언제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제게는 그나마 산보가 최고의 운동인 셈입니다. 이 밖에도 필 받아서 잡글 쓰기, 애견 야니 안마해주기, 온오프라인 헌책방에서 충동구매하기 등이 있습니다.


28. 결혼 후 가족 계획은?

국가적인 저출산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두 명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29. 나는 이럴 때 죽고 싶다

죽고 싶을 때 덜컥 죽는 것은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열심히 살아서 행복에 겨워 살면 정말 죽고 싶지 않겠죠. 저는 좀 더 살고 싶은데도 천수를 누린 만큼 어쩔 수 없이 죽으려고요.^^ 일세를 풍미했던 고려 태조 왕건의 붕어가 임박하자 슬퍼하는 신하들에게 웃으며 말하길 “덧없는 생명이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浮生,自古然矣)”라고 한 말이 참 감명 깊습니다. 마지막에 이런 멘트 날리면서 그래도 너희들은 열심히 살아라 이렇게 말하고 떠나면 얼마나 뿌듯할까요. 푸하하


30. 친구와 약속, 친구가 오지 않는다면?

고대 타임에 물들어서 솔직히 저도 약속 시간을 자주 늦는 편이라...^^; 대개는 독촉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편입니다. 제가 남을 기다리게 했던 과오들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죠. 가까운 곳에 서점이 있으면 냉큼 들어가기도 합니다.


31. 지금, 자신의 핸드폰 첫 화면에는 뭐가 써있나요?

익구닷컴 놀러와요


32. 자신의 습관이나 버릇

실내에서 무언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으면 막대기나 부채 같은 거 하나 들고 왔다갔다하면서 생각합니다. 영화 [어 퓨 굿맨]에서 탐 크루즈가 고심할 때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죠.


33. 자신의 장점과 단점

제 장점은 “편애하되 편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나 사회적 이슈 등에 있어 제 입장과 주관을 비교적 솔직하게 말하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검토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을 늘 새기면서 편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그간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제 입맛에 맞는 정보만 골라먹고 듣기 좋은 소리만 귀담아 듣고 제 협량한 경험에 기대어 세상사를 재단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보려 하고, 그림자까지 파헤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싶은데 참 어렵네요.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단순한 산술평균이 아니라 숙고한 반성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는 점이 묘미입니다. 편식하지 않되 편애하겠다는 제 삶의 태도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보다 해볼만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공사 분간도 못하는 흐트러진 녀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공과 사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고요, 어떤 자원을 배분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편애를 싹 거두고 최대한 공평하게 나누도록 할 자신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불편부당과 무색무취일랑 벗어 던지고 제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말씀드릴 겁니다. 기왕이면 옳은 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애쓰되 사심 없이 복선(伏線) 없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를 아껴주시는 분들께 늘 투명하고 거짓 없이 대하는 게 마땅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 사람이라면 허장성세를 부리지 않고 제 깜냥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가며 알콩달콩 성실하게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도록 살겠습니다.

제 단점은 너무 많습니다. 제 구질구질한 생활 태도에서부터 모자란 성품까지 오만가지를 들 수 있겠죠. 일단 제가 너무 재미가 없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오죽하면 제 앞에서 농담 삼아 말도 잘 못하겠다고 하고, 뜬금없이 좌중을 심각하게 몰고 가는 제 보이지 않는 힘(?)에 기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상대방 이야기에 맞장구를 잘 못 쳐주는 데 있는 거 같더라고요. 심오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그 말을 거꾸로 받아들이면 재가 그만큼 쉽게 표현하지 못하고 에둘러서 말하는 간접화법을 즐기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 누구보다 솔직하겠다면서 직설화법은 최대한 피하는 모순에 빠져 있는 셈입니다. 좀 더 “열려 있고 쉽고 낮은” 후배, 친구, 선배가 되기 위해 한참이나 더 노력해야 할 거 같아요.

국어 교과서에 나온 일석 이희승 선생님의 딸깍발이를 너무 감명 깊게 읽었던지 알게 모르게 딸깍발이를 닮아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정말 딸깍발이 샌님 같이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어요. 딸깍발이 재판관으로 유명한 조무제 전 대법관님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 갑자기 옆을 돌아보면 떨어질 수도 있다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결같은 사람을 저의 제일의 모토로 삼은 이래로 다양한 가치들을 부지런히 키워왔지만 한결같음에 대한 갈구는 그칠 줄 모릅니다. 조지훈 선생님의 「지조론」에 열광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요.

저의 고지식한 꼬장꼬장함과 고답적인 깐깐함이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는 거 같아서 여간 미안한 게 아닙니다. 일전에 후배들과 함께 엠티 후발대를 가게 된 일이 있는데 표가 모자라서 무임승차를 해야할 처지가 되자 제가 다음 기차를 기다리든가 아예 엠티를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시외버스를 타고 엠티 장소로 향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좀 너무 했구나 싶어요. 여하간 제 개인적 의리와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쓸데없는 원칙주의를 고수하거나 별 다른 이유가 없을 때는 통상관례를 끔찍이도 아끼는 보수적 태도가 많아서 역시 최씨 고집이라며 지탄받기도 합니다. 『장자』 칙양(則陽)편에는 위(衛)나라 대부인 거백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늘 자신이 딛고 있는 것의 잘잘못을 조회하며 일진월보(日進月步)하는 자세를 칭송하는 내용입니다.

거백옥은 나이 육십에 육십 번 변화했다. 처음에는 옳다고 했던 일도 나중에는 잘못이라고 물리쳤다. 육십 세가 된 지금 옳다고 생각한 것도 실은 59세까지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장차 잘못된 것으로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蘧伯玉行年六十而六十化. 未嘗不始於是之. 而卒詘之以非也. 未知今之所謂是之非五十九非也.

이 말처럼 스스로 돌아봐서 잘못을 했을 때는 깨끗이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자세를 갖추고 싶습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일관성과 유연성을 잘못 섞어서 헝클어진 인생을 살다 갔듯이 저 또한 부단히 경계해서 지인들께 괄목상대(刮目相對)하는 기쁨을 안겨 드리고 싶어요. 아무튼 이렇게 두서없는 횡설수설이 너무 잦다는 점도 제 단점입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고 써야 하는데 조바심 때문에 늘어놓기 일쑤지요. 맛깔스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가득한데 몇 년째 잡글을 쓰면서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제 허술한 글재주도 불쌍한 약점이겠죠. 이토록 모자란 게 많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조금씩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34. 만화책이나 소설책에서 한번 되어봤으면 하는 주인공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짓고 안인회 선생님이 번역한 『폭력에 대항한 양심』이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 카스텔리오가 되고 싶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려고 평생 노력할 생각입니다. 카스텔리오는 칼뱅 정권이 세르베토를 처형한 사건을 관청에 의한 살인사건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칼뱅이 광신적인 독선 때문에 한 인간을 살해하였고, 그와 함께 종교개혁 안에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도 살해해버렸다고 고발합니다.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라며 당대 최고의 권력자에게 맞선 카스텔리오의 자유로운 양심을 본받고 싶어요.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평합니다.

인간의 피를 흘린 것은 언제나 유죄이며, 절대로 세계관을 이유로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진리는 퍼져나가는 것이니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학설도, 어떤 진리도 소리지르고 악쓴다고 더 올바르고 더 참된 것이 되지는 않는다.

다원화된 사회가 될수록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그저 다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납니다. 저는 유시민 선생님의 표현대로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 톨의 진실도 담지 않은 사상은 없”다고 믿습니다. 옳고 그름은 판정 내리기가 비교적 쉽지만, 다름의 문제 앞에서는 선택의 자유를 움켜쥐고는 하염없이 고독해집니다. 실컷 고심해서 내놓은 결론도 남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편파적이고 자기본위의 주장이기 일쑤니까요. 그러나 자유 정의 진리를 독점하려는 이들에게 맞서고 제 자신도 독점하려는 유혹을 포기하려고 애쓰겠습니다. 고종석 선생님 표현을 빌려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으로 사상의 자유시장을 수호하는 병졸이 되고 싶어요. 여담이지만 머잖아 헌법 개정이 된다면 사상의 자유를 명문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양심의 자유에 포함되는 걸로 애매하게 되어 있거든요.

제가 비겁하고 문약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경계하는데 카스텔리오는 큰 그림자를 드리워줬습니다. 점점 자신은 없어지지만 다시금 다짐합니다. 외로워서 적당히 타협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눈치껏 영악해지더라도 끝끝내 제 영혼마저 팔지 않기를. 지조나 소신도 좋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은 얼마나 근원적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구차하게 살지 말기를 또 다짐합니다. 세상을 세련되게 욕하기는 쉽지만 티끌만큼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강자와 기득권의 편을 드는 건 쉽지만 이네들을 거스르기는 두렵습니다. 저는 얼마만큼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며 부귀에 누추하게 빌지 않고, 권세에 욕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마음이 약해질 때 저는 카스텔리오를 생각하겠습니다. “한 번 어려움에 부딪쳤다고 졸지에 자기가 지키던 뜻을 버린다면, 선비라고 할 수 없다(若因一困拂而遽喪其所守 則不可謂之士矣)”는 퇴계 이황 선생님의 말씀대로 어려울수록 그 사람의 진가가 나온다는 진리를 늘 명심하겠습니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에밀 졸라처럼 “나는 고발한다(J’accuse, 자퀴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35. (남자일 경우) 남자라서 안 좋은 점은?
(여자일 경우) 여자라서 안 좋은 점은

국방색 사회로 말미암아 제 나이 또래 남자들이 군대 문제로 고심해야 하는 지적, 물적 낭비가 너무 아깝습니다. 일전에 병무청 홈페이지에서 “병역은 젊은 날의 권리, 병역의 특권을 가진 여러분은 우리의 자랑입니다”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언짢았습니다. 병역은 권리 혹은 특권이 아니라 헌법에 규정된 의무일 뿐이며 모든 국민이 골고루 나누는 사회적 부담일 따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여전히 한국 사회의 성역이며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징병제에 대한 근본적 검토나 부정적 군대문화 청산을 위한 노력은 참 힘든 일이고 대신 여자들이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핀잔하는 건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진짜 사나이라면 조금 힘든 이 길이 지름길이며, 옳은 길이라고 믿고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개성 있는 청년들이 병역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멋지지만, 징병제가 사라진 나라가 훨씬 더 멋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36. 휴일에는 보통 뭘 하는지?

휴일이면 늦잠을 자는 습관은 좀처럼 고치기 힘듭니다. 제가 흠모하는 칸트의 1/10만이라도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칸트와 제가 같은 꿈을 품었더라도 이렇게 천지 차이가 나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에 대한 관용도의 차이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토요일은 사실상 제 개인적인 휴일이라 공부를 한다거나 사무를 처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토요일에는 급박한 시험 공부라도 거의 손에 안 잡혀서 편법으로 금요일 밤에 이은 토요일 새벽과 토요일 밤에 이은 일요일 새벽시간을 이용해왔지요. 이렇게 하면 순수한(?) 토요일은 최소한도로 줄이고 금요일과 일요일을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와서 그나마 조금 낫거든요. 요즘도 별일(?) 없으면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시간이 제 달콤한 휴식시간입니다.


37. 미리 쓰는 묘비명

“나에게 항상 새롭고 무한한 경탄과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가 있으니,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과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 속의 도덕률”이라는 칸트의 묘지명이 어릴 적부터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96자의 한시 형식으로 된 퇴계 이황 선생님의 자찬묘지명 가운데 “오는 세상을 어찌 알리오/ 지금에도 이룬 것이 없거늘/ 근심 속에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었네(寧知來世 不獲今兮 憂中有樂 樂中有憂)”라는 구절도 짠하게 다가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는 해학적인 묘비명을 직접 지은 극작가 버나드 쇼 익살도 빼놓을 수 없지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는 마르크스의 묘비명도 거인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니까”와 소설가 스탕달의 “썼노라, 살았노라, 사랑했노라”도 무척 매력적인 문구입니다. 미국의 비평가이자 작가인 도로시 파커의 묘비명인 “먼지를 일으켜 죄송합니다”도 두고두고 미소 짓게 만듭니다.

아참 바람의 딸, 빛의 딸 한비야님이 준비한 묘비명은 “몽땅 다 쓰고 가다”라고 하네요. 정말 그답죠? 지금까지는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했고 제 묘지명을 지어본다면 만약 짧게 쓴다면 “너는 내 운명, 自由!”나 “自由여, 좀 더 낮게!”를 새기고 싶어요. 물론 만연체를 애호하는 저는 또 장황한 잡설을 늘어놓을 공산이 크지만요. 아마도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자찬묘지명을 능가하는 방대한 분량이 될지도 몰라요. 그만큼 알차게 살아 봐야죠.^^


38. 보통 하루 수면시간은?

수면시간의 분산(variance)이 큰 편입니다. 밤새서 잘 놀기도 하지만 다음 날은 하루종일 잠에 빠져서 결국 총 수면량은 똑같아집니다.^^ 한가할 때는 낮잠도 즐겨서 평균보다는 수면시간이 긴 편입니다.


39.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

김동률, 박경림, 양희은, 권해효, 조혜련, 박명수, 지상렬, 노영심, 유재석, 안성기, 백윤식, 박수홍


40. 알라딘, 램프의 요정이 말했다, “세 가지 소원을 말하시오.”

고종석 선생님의 “덤의 보상에는 절제가 수반돼야 한다”는 말씀,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몫이 돌아가는 것이 사회후생을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본 존 롤즈 선생님의 “최소극대화원칙”, 남이 먹을 수 있는 충분히 좋은 것을 남겨두고 부를 축적하라는 뜻의 “로크적 단서”, 신영복 선생님의 “평등은 자유의 최고치(最高値)”라는 말씀 등을 종합해 제 소원을 3단계로 정리해봤습니다. 이런 유토피아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인생이 오직 한번뿐이라고 믿기 때문에 현세에서 최대한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사람이 많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1. 능력 있는 사람이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 사회를 바랍니다. 이런저런 연줄로 사람의 가치가 왜곡되지 않는 사회가 그것입니다. 열심히 살면 정말로 성공하는 능력주의 사회를 원합니다. 단 출발선상에 너무 차이가 나서 능력만으로 따라잡기 힘들지 않도록 어느 정도 보정이 있었으면 합니다.

2. 또한 능력 있는 사람의 성과에 미치지 못했지만 제 나름대로 노력한 사람도 적절한 보상을 받는 사회를 꿈꿉니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노력(!)이 부족했거나 어쩔 수 없이 재주가 모자라 유능한 사람에 미치지는 못해도 그 보상의 차이가 성과의 차이보다 현격히 차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3. 끝으로 능력도 모자라고, 노력도 부족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가장 못난 자에게도 너무 압도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부과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장 못난 사람의 후생복지의 향상을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는 시혜적 평등의 의미가 아니라 한 사회에 공유하고 합의하는 인간다운 삶의 최소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 3번 소원에서 놀고 먹느라 시간을 허랑방탕하게 보낸 이들의 후생까지도 염려하는 건 일견 자유주의 미감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까닭은 보다 확산된 자유가 인간적인 삶을 고양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일구는 번영은 마땅히 사람답게 살게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자유주의자가 그리는 사상의 자유시장이 자신이 증오하는 사상이라도 받아들이듯이, 게으른 사람의 궁핍함을 덜어주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가 빚어내는 차이가 먹고사는 것의 무지막지한 차별을 방기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 램프의 요정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데 라며 짜증을 낼지도 모릅니다. 진짜로 소원을 빌라고 하면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겠죠.


41. 결혼하고 싶은 나이는?
독신으로 살 계획은 없다는 것밖에 아직 정한 것이 없어요.^^;


42. 노래방 애창곡

노래를 잘 못해서 노래방을 즐기지 않다 보니 애창곡 같은 개념이 없네요. 다만 이소라의 [처음 느낌 그대로]나 보보의 [늦은 후회]를 노래방 첫 곡으로 자주 불렀던 거 같습니다. 김동률, 이승환 노래 일부와 [아침이슬]도 종종 부릅니다. 최근에 노래방용으로 연습하는 노래로는 이문세의 [기억이란 사랑보다], 안치환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등이 있습니다.


43. 누군가와 다섯시간 이상 인터뷰를 한다. 누구와 하고 싶은가?

우리 시대 가장 매혹적인 자유주의자이시며, 제 영혼의 스승이신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저는 제 방을 고종석 선생님을 보배롭게 만드는 서재,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보고재(寶高齋)”라고 이름지어 쓰고 있습니다. 평소 흠모하고 사숙하던 선생님과 같은 기품 있는 자유주의자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아! 고 선생님 없는 익구란 상상하기도 싫어요. 최근에 나온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를 비롯해 『자유의 무늬』, 『서얼단상』을 권합니다.


44. 최근에 읽은 책

최근에 읽었던 책 가운데 추천할 만한 책으로는 고종석님의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최장집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백낙청님의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김원중님이 완역한 『사기열전』, 이덕일님의 『조선 선비 살해사건』, 김만권님의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홍은주님의 『그림으로 이해하는 경제사상』, 박세일님의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한비야님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등이 있습니다. 20대에 1,000권 이상의 책을 읽는 게 목표입니다. 뭐 전부 정독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통독과 발췌독이 대부분이겠지만요.^^;


45. 취미생활

최근 생긴 취미생활은 일기 쓰기입니다.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보 제153호 일성록(日省綠), 국보 제 303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같은 유구한 기록정신을 이어 받아 저도 흉내를 좀 내보려고요.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참 무섭습니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 내 자신에 좀 더 엄격해지는 계기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46. 좋아하는 음악 리스트

김동률님과 전람회 노래 거의 전부를 좋아하며 주로 잔잔하고 가사 많은 발라드곡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굳이 몇 곡 들어보자면 전람회의 [다짐], [10年의 약속], 카니발의 [벗], [거위의 꿈], 김동률의 [동반자], [희망], [귀향], [잔향], 이소라의 [처음 느낌 그대로], 이승환의 [다만], 신승훈의 [오랜 이별 뒤에], 임현정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양희은의 [그대가 있음에], 하은의 [아프고 화나고 미안해], 박효신의 [눈의 꽃], 해바라기의 [지금은 헤어져도], 민중가요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Bob Dylan의 [Blowin In The Wind], Beatles의 [Let It Be], [Imagine], Don McLean의 [Vincent] 등이 있습니다. 음악 감상도 잘 안 하는 편이라 자주 듣지는 않아요.^^;


47. 전생에 자신은 무엇이었을까?

농담 삼아 역사서를 편찬하는 사관(史官)이 아니었을까 말을 해보지만 저는 전생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이 땅에 한번 태어나서 한번 살다가 한번 죽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능한 한 옳고 아름답게, 착하고 재미나게 살 계획입니다. 한번뿐인 삶을 대충 살수는 없잖아요.


48. 요즘 최대 관심사

고심 끝에 행정고등고시 일반행정직을 준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자존심이 너무 높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제가 이런 시험 공부를 안 하고 다른 공부를 한다면 그에 못지 않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기회비용을 치르면서 하는 시험 공부인 만큼 반드시 성사시켜야 제 기회비용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지만요. “바람은 쓸쓸히 부는데 역수의 물이 차구나. 장사가 한번 떠나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는 노래를 읊으며 자객 형가(荊軻)는 훗날 진시황이 된 진나라 왕을 암살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우등생은 아니었고 그저 제 때 수업이나 챙겨듣는 모범생에 불과한 제 한계가 얼마나 드러날지도 궁금합니다. 형가가 역수를 건너기 전에 길벗을 기다렸듯이 저 또한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시린 마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은 희망차면서도 불안합니다. 서둘지 말고 쉬지 말자고 하지만 조바심도 나고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오지 않는 길벗을 기다리듯이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버려가며 무엇을 이루려는 결단은 참 힘듭니다. 모든 빼어난 것은 드물기에 아름답겠지요. 제가 좋아하는 칸트의 말씀을 늘 곁에 두고 힘을 내겠습니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만 하니까!(Du kannst, denn du sollst!)

* 2008년 3월부로 행시 공부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 중에 있습니다. 저는 끝내 역수를 건너지 못했습니다.


49.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말들의 풍경 19편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시인 김수영이 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따온 제목인 듯싶어요. 고종석 선생님은 당신이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낱말 열 개로 가시내, 서리서리, 그리움, 저절로, 설레다, 짠하다, 아내, 가을, 넋, 술을 꼽았습니다. 김수영 시인님은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꼽았고요. 그래서 저도 이런저런 진통 끝에 제가 아름답게 여기는 우리말 열 개를 뽑아봤습니다. 참고로 이에 대한 친절하고 세세한 해석은 익구닷컴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글을 검색해보시면 됩니다.

벗, 끼니, 차마, 이태, 젊음, 고맙다, 너그럽다, 처음처럼, 애면글면, 부끄러워하다


50. 존경하는 인물

돌아가신 분들 가운데 존경하는 스승 스물네 분만 꼽아보겠습니다. 본래 제가 열두 분을 뽑으려다가 하도 넘쳐서 부득이 두 배로 늘렸어요.^^;특별한 순서 없이 무작위로 말씀드릴게요. 삼국사기에서 빠졌거나 고의로 빼 버린 많은 사실들을 삼국유사에 수록해 우리 역사를 자주적으로 해석해 문화의 독창성을 일깨워준 일연 스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동법 시행에 일생을 걸어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려 한 민생을 생각했던 행정가 잠곡 김육, 우리나라가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했던 백범 김구, 끝끝내 대세에 영합하지 않아 선비정신의 고갱이가 된 온건 개혁가의 표상 포은 정몽주.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는 말씀을 과학입국으로 실천한 세종대왕,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빼어난 정치를 선보인 성군 중의 성군인 영민한 학자군주 정조대왕, 꿈에서도 가볼 수 없는 지적 깊이와 더불어 치열하되 재미나는 삶을 가르쳐준 대철학자 칸트, 평생 전체주의와 싸운 자유주의자로 점진적 사회공학을 주창한 칼 포퍼,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시대의 과제를 해결한 매력 넘치는 엘리트주의자 J.M 케인즈.

계급사회의 차별과 폭력에 맞서고 평화와 자비를 설파하며 물질적 행복을 넘어서는 정신의 고매함을 일깨워준 부처님(Buddha), 허리를 굽혀 섬기는 사람은 위를 보지 않는다며 늘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더 가난한 이를 섬긴 마더 테레사, 세속에 찌들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불의에 온몸으로 맞선 맑고 매운 유관순 열사,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이라는 탄식으로 배운 자들에게 부끄러움을 각성시켜준 전태일 열사, 해동공자·문헌공도라는 영예와 더불어 문무겸전의 아찔한 경지를 보여주신 내 할아버지 문헌공 최충.

지공무사(至公無私,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음)로 약소국을 이끌었던 인간미 넘치는 법가사상가이자 유연한 원칙주의자 제갈공명,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그 사회의 최소수혜자 계층의 입장을 최대한 증진시킨다는 조건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차등원칙을 제시해 못 가진 자, 덜 가진 자에게 애틋한 시선을 보낸 존 롤즈, 폭력에 대한 반대를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해 인류의 감수성에 한 획을 그은 마하트마 간디, 사생취의(捨生取義)하는 대장부의 헌걸찬 기개를 맛깔스럽게 풀어 내려간 맹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라며 한국사의 스파르타쿠스가 된 만적.

백의종군을 감내하고도 “제게는 아직도 전선 열두 척이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희망의 언어를 말했던 충무공 이순신, 꼿꼿하고 호방한 선비이자 차마 미워할 수 없는 기품 있는 보수주의자 면암 최익현, 인간국보 1호, 걸어다니는 국보라는 자칭이 아깝지 않은 소권(笑權, 웃을 권리) 옹호론자 무애 양주동 박사,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과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통해 어떻게 벌고 쓰는 지를 알려주신 경영학도의 사표 유일한 박사, 문화유산 유출을 막는데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간송 전형필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스승이 오늘날 저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구접스러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분이 부디 없기를 바랍니다. 에이 설마요.^^;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 [無棄]

Posted by 익구
:

옛사람들은 자신의 호를 짓거나 남에게 호를 지어 줄때 그 글자의 출전이나 뜻을 밝힌 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호변(號辨) 또는 호기(號記)라고 하는데 옛사람들의 글 중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새로 바꾼 호에 대한 호변을 좀 늘어놓으려고 합니다. 소선(小鮮)을 쓴지 7개월 만에 새로운 호를 쓰게 되어 제 변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 하지만 제가 쓰는 호라는 게 재미 반, 목표 반이니 만큼 앞으로 평생 쓰겠다 싶은 호가 나오기 전까지는 또 변경되고 그럴 듯합니다. 아호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 소개는 익구닷컴 “아호(雅號) 단상 - 小鮮에 부쳐”라는 글을 참조해주세요.



내 초등학교 일기장에는 『사기』 맹상군열전(孟賞君列傳)을 읽고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맹상군의 정신을 본받아야겠다는 구절이 보인다. 얼마 전에는 역사 속 장애인 이야기를 다룬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제목의 책이 나오기도 했다. 그 책의 모티브가 된 것은 박연의 상소문이었는데, 박연은 시각장애 악공들의 처우 개선을 요청하며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天下無棄人也)”고 말한다.<주1> 물론 무기(無棄)라는 표현은 비단 박연의 독창적인 표현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자주 쓰이는 관용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전국시대 제나라의 맹상군은 그 전성기 때 6만호의 식객들을 거느리고 살았다고 한다. 오만 사람이 다 모였을 텐데 그러다 보니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도 나오게 된 것이다. 닭 울음소리나 내고 개구멍으로 물건을 훔치는 따위의 변변치 못한 재주도 버리지 않았던 맹상군의 사람 쓰는 재주는 오늘날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주2>


버림이 없다(無棄)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는 『춘추좌전』 성공(成公) 9년조에 거(莒)나라가 방비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 초나라에 망한 사실을 둔 이야기<주3> 가운데 나오는 “비록 실과 마로 짠 베가 있다 해도 띠풀이나 왕골 같은 물건을 버리지 말 것이며, 희성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할지라도 여위고 못생긴 이를 버리지 말 일이다. 무릇 모든 군자에게는 자신의 결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雖有絲麻 無棄菅蒯 雖有姬姜 無棄蕉萃 凡百君子 莫不代匱)<주4>”가 있다. 여기서는 거나라가 방비를 소홀히 함을 지적하며 유비무환의 자세를 강조한 말이지만 뛰어난 것이 있다고 모자란 것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자세를 일컫는 말로도 많이 쓰이게 된다.


명주실(絲)과 삼실(麻)은 좋은 옷감을 만드는 실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질 나쁜 갈(菅)이나 사초(蒯)로 비유된 미천한 사람을 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무기관괴(無棄菅蒯)<주5>의 고사는 『삼국사기』 설총 열전에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설화로 알려진 화왕계에서 백두옹(白頭翁, 할미꽃)의 말 가운데 “옛말에 이르기를, 비록 사마(絲麻)가 있다고 해서, 관괴(菅蒯)를 버리는 일이 없고, 군자는 부족에 대비하지 않음이 없다(故曰 雖有絲麻 無棄菅蒯 凡百君子 無不代匱)”라며 춘추좌전을 인용하는 대목이 나온다.<주6>


『도덕경』 27장에는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 물건을 잘 아끼고, 아무것도 버리지 않습니다. 이를 일러 밝음을 터득함(襲明)이라 합니다(是以聖人常善求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라는 구절이 있다. 왕필(王弼)은 주석을 통해 성인은 나아갈 것과 향할 것을 만들어서 진보에 뒤쳐지는 사람들을 못났다고 버리지 않으며, 저절로 그렇게 됨을 도와줄 뿐 새롭게 일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다”라고 풀이한다.<주7> 노자의 “사람을 버리지 않음”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갈라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과 사물을 한결같이 대한다는 점에서 보통사람의 차별주의적 세계관을 뛰어 넘어 선악과 시비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 같아 조금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공허한 개념이라기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혹은 세속적으로 해석해서 사람을 구제하기를 즐기며, 스스로의 편견으로 말미암아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없는 자세로 본다면 얼마든지 실천 덕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회남자』에서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사람에 버릴 사람 없고, 물건에 버릴 물건 없다(人無棄物 物無棄物)”고 말하고 있지 않나 싶다. 편견과 집착을 버리고 사람을 대하려는 노력은 『맹자』에서 “탕임금은 중용을 실천하시고, 어진 이를 쓰는 것에 모난 것이 없으셨다(湯執中 立賢無方)”라고 한 것과 통한다. 無方을 “일정한 방법이 없다”로 해석하여 신분이나 지역 또는 출신을 따지지 않고 어진 사람이라면 등용했다라고 풀이하기도 하고, “같은 무리를 찾지 않는다”라고 해석하여 오직 그 사람이 현명한가 아닌가로만 판단해야 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편견과 편애에 대한 절제와 경계를 일컫는 말이다.


내 새로운 자호(自號, 스스로 자신의 호를 지음)를 무기(無棄)로 하려 하는 건 이런 너그러움을 갖추고 싶기 때문이다. 너그럽다는 행위는 나와 다른 것을 인고(忍苦)하는 것이며, 그 사람의 약점에 천착하기보다 장점을 도두보는 노력이다. 훌륭한 목수는 버리는 재목이 없고,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으며, 웅숭깊은 스승은 아랫사람에게서 배우며, 부지런한 학생은 자신이 증오하는 것에서도 장점을 취한다.<주8>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 진시황이 다른 나라 출신들을 의심해 모두 국외로 추방하려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릴 때 초나라 출신 이사는 간축객서(諫逐客書)라는 상소를 올린다. “태산은 작은 흙덩이도 사양하지 않았기에 그처럼 크게 되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처럼 깊게 되었다(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이라는 이사의 주장에 진시황은 축객령을 철회하고 이사를 중용함으로써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뤄낸다. 편협하거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너그럽고 섬세하며 온유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신작 『부의 미래(원제 Revolutionary Wealth)』에서 ‘쓸모없는(obsolete)’과 ‘지식(knowledge)’을 결합해 만든 ‘무용지식(obsoledge)’라는 신조어를 통해 쓸모없는 지식의 폐단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람에게 적용해서 무용(無用)한 사람이란 것은 성립할까? 내 잣대에 어긋나는 사람을 함부로 내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재주다(Allen Menschen recht getan ist eine Kunst, die niemand kann)”라는 독일 속담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는 그저 “그 사람의 약점으로 그의 장점을 버리지 않음(不以人所短棄其所長)<주9>”을 실천하고 싶다. 지금도 여전히 배운 것은 부박하고 성정은 거칠지만 좀 더 긴장하고 의식하며 열린 마음을 품기 위해 애써야겠다. 내가 어떤 공부를 하든, 무엇으로 밥 벌어 먹고 살든 간에 남의 눈에 서러운 눈물 흘리게 만들기 보다는 그 눈물을 닦아 주거나 그도 아니면 차라리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그 눈물을 덜 흘리게 하는 일을 하는 것도 값지겠지만.


‘버리지 않는다’는 불기(不棄)와 ‘버림이 없다’는 무기(無棄)는 뜻빛깔이 미묘하게 차이난다. 불기(不棄)는 세상에는 버려야 할 사람도 있지만 기왕이면 덜 버리고 끌어안고 가겠다는 의미인 반면, 무기(無棄)는 애초에 버림 받을 사람이란 없다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혹시 버림 받은 사람도 다시 거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이건 내 멋대로 해석이고 아닐 不 보다는 없을 無자가 좀 더 맘에 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끝으로 불가의 역행보살(逆行菩薩)을 떠올려 본다. 남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일부러 못된 짓을 하는 이로 변장한 보살, 스스로 반면교사가 되어 중생을 가르치는 보살이라는 넉넉함이 애틋하다. 내 미움을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 내 옹졸함이 빚어낸 것임을 자각하고, 내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이들에게서도 배워야겠다. 사람이든 꿈이든 원칙이든 내가 맺은 인연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기를 다짐한다.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라는 만화 슬램덩크의 명언이 떠오른다. 버릴 사람은 없다. 신념을 버리지 않겠다. 꿈을 포기하지 말자. - [無棄]


<주석> 다양한 출전 정보와 용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주1>
박연의 상소를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의 제왕은 모두 시각장애인을 사용하여 악사를 삼아서 현송(絃誦)의 임무를 맡겼으니,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이며, 또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미 시대에 쓰임이 된다면 또한 그들을 돌보아 주는 은전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古先帝王皆用瞽者, 以爲樂師, 委之絃誦之任, 以其無目而審於音, 且以天下無棄人也。 旣爲時用, 則疑亦有矜恤之典也。
- 『조선왕조실록』 세종 54권 13년 12월 25일 (병진) 005 / 박연이 무동의 충원과 방향의 제조, 맹인 악공 처우 등의 일을 아뢰다


<주2>
하지만 송(宋)나라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던 왕안석(王安石)은 「독맹상군전(讀孟嘗君傳)」이라는 글에서 이런 내 견해를 통렬히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맹상군은 그저 계명구도들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어찌 선비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孟嘗君特鷄鳴狗盜之雄耳 豈足以言得士)?”라고 말한다. 제나라의 강성함을 마음대로 활용한 위치에 있었던 맹상군이 한 사람의 선비를 얻었다면 계명구도의 힘을 빌리지 않았어도 진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다는 논설이 날카롭다. 즉 맹상군은 참된 선비는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3>
춘추좌전은 시경(詩經)을 인용했는데 이는 일시(逸詩)다. 일시(逸詩)는 시경과 같은 시대에 읊어진 고시로서 지금 전하는 시경(詩經)에서 빠진 것이다. 실전되어 시경에 싣지 못한 옛 시라고 보면 된다.


<주4>
춘추시대 희(姬)는 주(周)나라의 성이고, 강(姜)은 제(齊)나라의 성이다. 그래서 희강(姬姜)하면 큰 나라 여인을 가리키며, 또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리키기도 한다. 다른 풀이에서는 희강(姬姜)이 전설적인 삼황오제인 황제(黃帝)가 姬성, 염제(炎帝)가 姜성인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여하간 본래 대국의 왕비, 궁중의 여인이란 뜻에서 미인의 범칭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주5>
관괴(菅蒯)를 버리지 않는다의 용례를 이율곡 선생의 상소에서 만날 수 있다. 관괴를 버리지 않았다는 말은 옛사람들이 겸양을 표하는 상투적 표현이었던 셈이다.

신은 본래 경솔하고 졸렬하여 스스로 쓸 만한 인재가 못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초야에서 지내는 것을 감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성상께서 관괴(菅蒯)를 버리지 않으시고 과분한 은혜를 누차 내리셨으므로 감히 끝내 피하지 못했는데, 한 번 은총과 영광에 얽매이게 되자 혼미해져 돌아설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臣本輕踈迂拙, 自知非才, 甘老溝壑。 幸際聖明, 不遺菅蒯, 誤恩屢下, 不敢終遯, 一縻寵榮, 迷不知返。
-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 17권 16년 6월 1일 (신해) 002 / 양사가 이이를 파직시킬 것을 연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자 중지하다

또 무기(無棄)는 태평성세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김육의 『잠곡유고(潛谷遺稿)』에는 유배를 가는 아들에게 그리며 읊은 시에서 “성조에선 버려지는 사람 없으니(聖朝無棄物)”라고 노래했고,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성명 세대라 버려진 물건 없음을 비로소 알았으니/ 이제부터 남은 여생 벼슬길에 맡기리(始識明時無棄物 從今日月屬官家)”라며 자신이 벼슬길에 나간 것을 감개무량해하고 있다.


<주6>
서애 유성룡은 널리 인재를 구할 것을 청하는 계에서 무기관괴(無棄菅蒯)를 언급하는데 다음과 같다.

옛사람이 “비록 사마(絲麻, 명주실과 삼실)가 있어도 관괴(菅蒯, 왕골과 기령풀)를 버리지 말라.[雖有絲麻無棄菅蒯]” 한 것은 작은 재주도 반드시 취하란 말이요, “비록 희강이 있어도 초췌함을 버리지 말라.[雖有姬姜無棄憔悴]” 한 것은 천한 사람도 버리지 말라는 말이며, “순무를 캐고 무를 캐는 것은 뿌리만을 먹으려는 것이 아니다.[采葑采菲無以下體]<*>”라는 것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가지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말대로 하면 사람을 등용하는 도리를 다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반드시 구비하기를 구하여 비록 백 가지 장점이 있으나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버려서 취하지 않습니다. 또한 문벌로 한정하고 지위와 명성으로 비교하여 비록 탁월한 재주가 있어도 불행히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면 사람들이 모두 업신여겨서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남의 작은 허물이나 숨은 잘못을 드러내는 데에는 교묘하여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비방하는 가운데에 있어서 하나도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초야에 버려진 현인이 없고 모든 공적이 다 빛나기를 구하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적에는 사람 취하는 도리가 심히 넓어서, 혹은 노예에서 발탁하고 혹은 군사에서 뽑으며, 혹은 장사치에서 떨쳐 올려서 오직 재주만을 취하고 다른 것은 묻지 않았으니, 진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卷七 啓辭 제7권 請廣取人才啓九月

* 采葑采菲 無以下體(채봉채비 무이하체)는 시경(詩經)의 패풍(邶風) 곡풍(谷風)에 있는 말로, 봉(葑)과 비(菲)라는 채소는 잎줄기는 아름답지만 뿌리가 좋지 못하다. 그러나 뿌리가 나쁘다 하여 좋은 줄기까지 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일부의 나쁜 점 때문에 전체의 좋은 점을 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 雖有絲麻 無棄菅蒯, 雖有姬姜 無棄憔悴와 비슷한 맥락이다.


<주7>
사람을 버리지 않음(無棄人)에 대한 왕필 주석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성인은 실제의 성적(形)과 의론(名)의 일치를 내세워 사물을 구속하지 않고, 나아갈 것과 향할 것을 만들어서 진보에 뒤쳐지는 사람들을 못났다고 버리지 않는다. 만물의 저절로 그렇게 됨을 도와줄 뿐 새롭게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다”라고 했다. 현명하고 유능한 이들을 기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적이 되지 않고, 욕심날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혼란되지 않는다. 늘 백성들의 마음이 욕심 없도록 하고 현혹되지 않도록 한다면 사람을 버릴 일이 없다.

聖人不立形名以檢於物, 不造進向以殊棄不肖. 輔萬物之自然而不爲始, 故曰 無棄人也. 不尙賢能, 則民不爭, 不貴難得之貨, 則民不爲盜, 不見可欲, 則民心不亂. 常使民心無欲無惑, 則無棄人矣.


<주8>
“훌륭한 목수는 버리는 재목이 없”다고 한 것은 다음의 출전이 있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허침(許琛) 등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허계(許誡) 등이 상소하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착한 임금의 사람 쓰는 것은 목수가 재목을 마르는 것과 같아서, 크고 작음과 길고 짧음을 또한 그 적당함을 얻도록 하기 때문에, 밝은 임금은 버리는 사람이 없고 훌륭한 목수는 버리는 재목이 없습니다.

傳曰: “聖主之用人, 如匠之制木, 小大長短, 亦得其宜。 故曰明主無棄人, 良工無棄材。”
- 『조선왕조실록』 성종 281권 24년 8월 27일 (기축) 002 / 허침 등이 윤은로의 일을 말하다


<주9>
진수의 삼국지 오서(吳書)에 나오는 제갈량의 조카 제갈각(諸葛恪)의 전기(傳記) 중에 제갈각이 승상 육손에서 보내는 편지의 일부에 출전이 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자는 한 사람에게 완전히 갖추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공자의 문하생 대략 3천 명 중에서 특별하게 돌출되는 72명, 자장(子張)ㆍ자로(子路)ㆍ자공(子貢) 등 70명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아성(亞聖)의 덕을 갖추고 있지만, 각기 단점이 있어 전손사(顓孫師:자장)는 편벽되고, 중유(仲由:자로)는 법을 만들지 못했고, 단목사(端木賜:자공)는 자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어찌 이들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결점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중니(仲尼:공자)는 이런 제자들이 갖추고 있지 못함을 문제 삼지 않고 손을 이끌어 친구로 간주했으며, 사람들의 단점 때문에 그들의 강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현재는 인재를 채용함에 있어 마땅히 지난 옛날보다 관대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愚以爲君子不求備於一人, 自孔氏門徒大數三千, 其見異者七十二人, 至于子張、子路、子貢等七十之徒, 亞聖之德, 然猶各有所短, 師辟由喭, 賜不受命, 豈況下此而無所闕?且仲尼不以數子之不備而引以爲友, 不以人所短棄其所長也. 加以當今取士, 宜寬於往古, 何者?
- 『三國志』卷六十四 吳書十九 諸葛滕二孫濮陽傳(제갈등이손복양전)第十九

Posted by 익구
:

7월 18일 제 생일을 맞이해서 조금 급하게 익구에 대한 말말말 4탄을 정리해봤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그리운 이름들을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며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라고 탄식했지만 저는 좀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좀 더 그윽해진 모습으로 오래도록 곁에 두고픈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그리움에 사무치고 외로움에 절망할 때 하잘 것 없는 저란 녀석의 손을 잡아주었던 아름다운 마음들을 생각하겠습니다.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를 지키려고 애쓰는 저이지만 이번만큼은 오버를 하고 싶네요. 여하간 생일 특집이라 주로 좋은 말들로만 정리했습니다. 진실은 이렇지 않다는 거 감안하시고, 너그러이 양해해주세요. 푸하하


잘 실험 관찰했어요. 계속적인 관찰을 한다면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어요.
- 초등학교 5학년 때 달팽이를 가지고 관찰실험 보고서를 제출한 것에 대한 선생님의 코멘트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런 극본을 썼구나. 선생님이 지켜볼 제자이구나 축하한다.
- 초등학교 6학년 때 방학 과제로 써낸 극본 권선징악에 대한 선생님의 코멘트

나중에 신문을 유심히 봐야겠구나.
-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 나중에 신문에 내 이름이 날 수 있는 명사가 되기를 축원해주시며

본받을 점: 온순함. 무슨 일이 있어도 화를 잘 내지 않는 것. 친근감.
고칠 것: 너무 순해서 탈이다. 필요할 때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 중학교 1학년 도덕시간에 했던 친구 장단점 써주기 시간에 나에 대해 나온 말

익구는 책을 열심히 읽고 착하고 맡은 일에 책임감이 있다. 단점으로 판단력이 부족하다.
- 역시 도덕시간에 했던 장단점 써주기

익구야! 너는 착하고 순수해서 좋아. 그렇지만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나쁜 놈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을 너무 믿지 마라. - 중학교 2학년 시절 절친했던 친구의 고언(?)

"자기를 다스릴 때는 가을기운을 띠고,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봄기운을 띠어야 한다(律己宜帶秋氣, 處世宜帶春氣)" 내가 늘 그렇게 해야 겠다..라고 품고 사는 생각을 미리 실천해나가는 익구형. 익구형의 성격을 좋아하고 익구형의 글을 좋아하고 익구형의 생각을 좋아하고 익구형을 좋아한다.
- 04학번 후배녀석의 오버(?)

그리고 개인주의자시라는 말이 친근하게 와닿는군요. 이상한 의미로 잘못 수입된 가짜 개인주의가 횡행하는 우리 나라에서 개인주의를 스스로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은 보기 힘듭니다. 친근하군요.
- 몽테님의 말씀

스무살이 지나고나면
스물 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살 그 후가 오는 것이라고...
어느 시?에서 그러던데 형의 신입생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 민망한 질문을 던지던 04학번 후배녀석

익구는 정말 사람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지니고 있구나..
- 다정다감하신 선배님의 말씀

하여간 너같이 입대한지 1년 8개월만에 편지 쓰는 인간도 드물 거다. - 식이

언젠가 나이 40 쯤 되서도
웃으면서 소주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었음 하네요~
- 그 약속 지키고 싶게 만드는 영민한 후배의 말

아무리 생각해도 익구의 논리는 콩깍지에 씌어져 한부분만을 보는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 내게 정치적 반대자를 만나는 기분을 선사한 외우(畏友)... 나는 "나는 한 부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부분에 더욱 중점을 두는 것일 뿐이다"라고 받아쳤다.^^;

예전에 ㅈ랑 ㅅ이랑 이야기할 때 익구형은 지적인 매력이 최고의 무기라는 말이 나왔었어요.
- 아부도 잘하는 귀여운 05학번 후배

소개팅 하면 꼭 익구닷컴을 여자분께 소개해주시면 집에 가서 형의 매력을 알게 될 거예요.
- 후배가 알려준 소개팅 전술

익구의 별명이 새롭게 바뀐다!!!!!
그 이름 하야
엄지군!!!!!!
아...ㅜ ㅜ정말 환상적인 닉네임이야
최엄지
엄지군
엄지공
엄지씨
엄지9...
아아 ㅜ ㅜ 좆쿠나~
- 내게 엄지군이란 별명을 선사한 정형

너는 가계의 부채(負債)다. - 내 유흥비 탕진과 도서 충동구매를 염려한 각영(刻影)공의 말씀

민폐강박증 환자 ㅋ - 유강님의 말씀

저희 새내기 때 애들이 익구형 귀엽다고 막 그랬었는데
- 04학번 후배, 어느덧 인생(?)을 배우다.^^;

프로토스로 치면 하이템플러 같은 존재시지
- 04학번 후배, 인생을 함께 배우고 있었다.

익구형처럼 되야지 ㅋㅋ
- 잘못된 희망을 품어버린 05학번 후배녀석

똑 부러지는 녀석.... - 싸이 일촌평 中

행복한 이상주의자가 되고파 하는,,'엄지손들기'를 즐겨하는 친구^^ - 싸이 일촌평 中

의외성과 부드러운 카리스마, 내면의 깊이, 그리고 유머감각까지 갖춘 멋진 선배님 ^^ - 싸이 일촌평 中

익구는 새해인사가 너무 심오하구나. - 내수경기 진작을 호소하는 문자를 받으신 어느 형님

익구형도 입학하실 때 논술 쓰고 입학하셨겠죠? .. 익구형이 쓰셨을 입시 논술 글을 보고 싶어지네요-_-b
- 뭐라고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익구형 글재주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싶은 능력중, 단연 1위입니다. - 웹진 후배님의 과공비례

지관(地官) 하려고 그러냐?
- 문화유산 답사 가운데 무덤 순례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두고

무슨 놈의 사진을 그렇게 미친듯이 찍냐!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진 찍기에 집착하는 나를 두고

차라리 네 방에 사당을 차려라.
-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에 가자고 친구에게 제안했다가 들은 소리

책 좋아하고 글 좋아하는 사람들 최대 약점이 뭔지 알아? 몸으로 살아내야 할 일도 책에서 배운 것 찾고 머리로 재는 거. 책 덜 읽는 사람들 한 수 아래로 접어보는것. =)
- mannerist님의 충고, 나는 "잇힝 부인할 수가 없군요. 뭐 그렇다고 제가 요즘 책을 많이 읽거나 그런 것도 아니지만요"라고 답했다.

'자유는 힘이 세다'라는 짧은 문장에서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낍니다. 물론 이 캐치프레이즈에 걸맞는 홈페이지주인 '익구'님의 풍성한 노작들이 없다면 두근거리는 가슴은 곧 멈춰버리겠죠.
진취적이고 사려깊은 한국 젊은이의 모습을 보고싶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이 곳으로 가 보십시오. 머리가 꽉 차는 흐뭇함과 탄탄한 내용들의 깊이에 빠져 헤어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원래 제가 속이 좁아서 남의 홈페이지를 링크하고 남의 글 퍼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저는 하다못해 익스플로러에 즐겨찾기도 등록하지 않습니다.)이 곳은 저로 하여금 닫혀있던 즐겨찾기 메뉴를 처음으로 열게 하는군요. 자 모두 가서 자유가 얼마나 힘이 센지를 느껴봅시다!
- 반전할까요님의 상부상조 덕담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들이 다 그저 그런 것 같지만,
늘 고민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10년 후는
분명히 다름을 40년 가까운 세월을 사는 동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최군도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하여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룩하세요.
- 즐거웠던 행정학개론 선생님께서 주신 메일 中

자신을 포지셔닝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면 훌륭한 성과입니다. 사실 나도 늘 나 자신을 제대로 포지셔닝하고 있는지 반문하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폭넓은 교양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정확한 것입니다. 사회과학 분야는 물론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교양을 쌓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대학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들을 잘 실천해나간다면 성공적인 삶이 최 군의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 흠모하는 경영대 교수님께서 주신 메일 中

보내준 메일 잘 받았습니다.
남이야 어찌되든 사사로운 자기이익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인 대학가의 현실에서...
보다 큰 문제로 고민하는 청년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 아주 보기가 좋군요.
다양성과 편파성이라....
Tocqueville같은 사람은 미국정치 분석을 통해 파벌, 다시 말해 편파성이 민주주의 발전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단언하기도 했었습니다. 여하튼, 편파성없는 다양성도 있을 수 없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파성도 무의미 하겠지요. 그렇다고 중간적 입장에서 적당히 수렴하는 것이 마냥 옳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아무리 논리적 근거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기호가 반영될 수밖에 없겠지요..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단순히 비판을 위한 비판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비판인지, 생산적 비판인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 내 지적 향상에 큰 영향을 주신 정외과 엄상윤 선생님께서 주신 메일 中

최익구가 중국어랑 인연이 있는 것 같게 느꼈다면 이것은 정말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해요. 그것 만으로도 성공한 셈이죠. 그리고 고민하지 말아요. 중국어를 선택했을 당시 이미 고민은 끝난 거예요. 시간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지나가고 있어요. 그러니 이미 시작한 중국어 계속하기를 바래요 현상유지를 위해서든 실력 향상을 위해서든 꾸준히 계속하면 중국어도 아마 자기 모국어 만큼 사랑스러워 질 때가 있을 거예요 절대 그만두지 않기를 바래요.
- 경영외국어 선생님의 말씀... 이 고마운 말씀에도 불구하고 중국어 공부를 못하고 있다.ㅜ.ㅜ

자신이 어떤 입장이고 어떤 정체성을 지녔는지 모르는 체 '선한' 척 하는 것이 타락의 주범입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다른 사람의 착취를 욕하고, 자신이 외치는 것은 순 키보드워리어 수준임을 모른 채 진보와 개혁의 편이라고 착각하는 것 - 이런 사람들이 의식주 문제에 부닥치면 여지없이 '한나라당'에 가까운 입장으로 바뀌는 것 ? 제 개인적 경험이 일반화될 수는 없겠 지만 '수없이' 보아왔다는 것, 말씀드립니다. 조중동이 싫다하는 학생도 언론사 취업시장에 뛰어들면 조선일보부터 선호하듯이 말입니다.
- 인터넷 서점 알라딘 서재에서 벌어진 위서가님과의 논쟁 中

'전선'을 얘기할 땐 어느 정도의 단순화는 불가피한 것이라 봅니다. 신자유주의-반신자유주의의 전선을 거론한 것이 곧바로 새우범생님 말씀처럼 '두부 자르듯이 가름하는 행위'는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님의 말씀대로라면 어떤 전선을 얘기하든 그것은 이분법에 사로잡힌 행위가 돼버리는 거겠지요(저는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단순화 내지는 이분법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경제 속에서 차지하는 '주변부'로서의 위상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 배척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희박하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닐 테지요. 그러한 문제의식을 '신자유주의-반신자유주의 전선'이라 표현한 것이고, 이는 어디까지나 용어상의 문제입니다. 단순화 없는 요약이 가능할까요.
- groove님이 주신 댓글 가운데 신자유주의 관련 대목

기억의 습작을 듣다가 갑자기 자네 생각이 나서ㅎㅎ
- 성균관 명륜당의 설경을 감상하던 중에 운치 있게 날아 온 문자

캬...익구형 색깔은 늘 다양하면서도 또렷하네요^^ㅋ
- 조선 당쟁에 대해 쓴 글에 달린 댓글

익구야 너 인사하는 법 어디에서 배웠니!!? 너무 좋아!!!! 꺄아~
- 나만 보면 예의바르다고 칭찬해주시는 고마운 누님

90도에 육박하시던데요..옆에서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요..ㅋㅋ
- 허리까지 숙여야 나오는 각도인 70도에 육박하는 인사를 하려는 나의 "70도 인사"에 대한 후배의 평

고3처럼 보이는데요.
- 정확히 2006년 7월 19일 노원역 어느 고깃집 종업원에게 들은 말

걸신 그 자체 같으니라구./ 익구형은 엥겔지수가 무지 높으신 거 같아요.
- 지인들은 나를 보고 많이 먹고도 살이 안 찐다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사실 나는...^^;

뒷좌석에서 항상 안전벨트를 매는 익구 ㅜㅜ
- 오로지 준법과 안전을 위하여...^^;

경영학과 가더니만 이해타산만 늘었어.
- 청원이

너가 만약 장교가 되었다면 무척 까다로운 간부가 되었을 게야.^^;
- 내 잔소리를 마뜩잖아하는 친구

항상 생긋 웃는게 참 착하게 보였는데~
아마도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아.ㅋㅋ
- 내 썩은 미소를 생긋 웃는다고 순화해준 고마운 친구

형 덕분에 제가 최고학번이 아니었어요! 늘 감사해요 형 ㅎㅎ
- 2006년 봄 엠티 따라갔다가 들었던 소리... 이제 그만 가야겠다.^^;

형의 선비같은 모습 발끝도 못미치네요
- 잊을 만 하면 등장하는 선비 소리... 덜덜

솔직히... 익구형 글은 너무 길고 내용이 힘들어요. ㅠㅠ 귀차니즘 세대인 저로서는, 뭔가 핵심을 집어주셨으면 좋겠어요. ㅠㅠ
- 게을러서 글을 줄이지 못하고 있다고 답해줬다.^^;

행정병이나 정부 부처에 있는 어지간한 공익보다 나은 거 같은데.
- 예비군 업무 감사관이 내게 해준 말. 그분들은 내게 이런저런 찬사를 선사해주셨다. 더 열심히 하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덜덜

돌아와서도 형과 평생 돈독한 관계로 지내고 싶어요.
- 이제 곧 입대하는 愛후배와의 금석맹약

새우범생님이 너무 일찍 염세주의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내 영혼의 스승께서 해주신 따뜻한 염려의 말씀

넌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안 변하냐. - 휴가 나온 친구ㅡ.ㅡ;

Posted by 익구
:
지난 3년여간 써왔던 제 호인 憂弱(우약) 대신 새로운 호를 만들어 쓰기로 했습니다. 여조겸의 [동래박의]에서 君子憂我之弱 而不憂敵之强(군자는 제가 약한 것을 걱정하지 적이 강한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憂弱은 언제나 저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을 인식하자는 다짐이면서도 약한 것, 어려운 것, 힘겨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자는 뜻이었습니다. 둘러댄 유려한 의미에 부합하지는 못했더라도 늘 제 호를 염두에 두고 노력했다는 것만큼은 자부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부정적인 한자어로만 구성된 제 아호가 종종 불만스러웠습니다. 약함을 근심한다는 것인지, 약해져서 걱정스럽다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제 천성이 변덕이 많은 것인지 이런저런 흠을 잡아 싫증도 냈고 말입니다. 그러던 참에 잊고 지내던 약팽소선(若烹小鮮)이란 도덕경 구절을 만나던 순간 이거구나 싶었습니다. 도덕경 20장에서 따온 잠잠히 흐르는 모양, 담담하구나!라는 뜻의 澹兮(담혜)라는 제 생애 최초의 호를 쓸 때의 마음이 새록새록 되살아났습니다. 제 영감의 원천인 도덕경에서 이번에도 신세를 좀 져야겠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自號(스스로 만들어 쓰는 호)를 짓는 것이 온당키는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이름을 매우 중요시하고 소중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이름에 떳떳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고명사의(顧命思義)라 하여 항상 자신의 이름이 품고 있는 뜻을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생각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름마저 수신(修身)의 방책으로 삼은 옛사람들의 집요함을 마냥 찬양할 생각도 없지만, 그네들의 노력이 헛된 파닥거림이라고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세월의 무게는 참으로 대단한지라 과거에는 상식과 양식이던 것들이 후세에는 고루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선현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호와 자를 분간하는 것도 힘들어합니다. 옛사람들은 태어나면 이름(名)을 갖게 되고, 성년식의 일종인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자(字)를 받고, 호(號)도 지어 쓰며, 특별한 공적이 있는 사람은 국가에서 사후에 시호(諡號)까지 내려 주었습니다.


특별히 왕의 경우에는 묘호(廟號)와 능호(陵號), 존호(尊號)를 받았습니다. 묘호는 돌아가신 왕의 신주를 모실 때 부여하는 호칭이고, 능호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일컫는 호칭이며, 존호는 왕과 왕비의 공덕과 업적을 찬양하며 왕 또는 신하들이 올리는 호칭입니다. 조선시대 세종의 경우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叡武仁聖明孝大王)이라는 긴 호칭이 부여되었는데, 세종은 묘호, 장헌은 중국에서 준 시호, 영문예무는 존호, 인성명효는 아들 문종이 올린 시호입니다. 아울러 세종대왕릉은 영릉(英陵)이라는 능호로 불립니다.


자(字)는 성인 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어서, 태어난 후 받게 된 이름 외에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별도의 칭호로 쓰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중국 송나라 때부터 호(號)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자도 이름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자를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이름과 자의 제약을 피해 누구나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어 쓴 것이 바로 호입니다. 호는 아호(雅號)나 당호(堂號), 댁호(宅號)와 함께 불가의 법명(法名)까지 포괄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훈련소 법당 수계식에서 받은 법명은 명각(明覺)입니다.^^;


호가 이렇게 성행하게 된 까닭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어진 이름과 자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지어 쓸 수 있었던 호를 선호하는 인지상정 때문이었겠지요. 후대로 갈수록 호가 일상화되면서 자마저도 이름처럼 함부로 부르지 않게 됨으로써 호의 사용이 더욱 촉진되었습니다. 시호는 넓게는 호의 일종이나 일반 호와 달리 사후에 생전의 업적을 참작하여 국가에서 왕이나 유공자에게 내린 칭호입니다. 중국 주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고, 후대로 갈수록 시호법이 정착되어 정형화되게 됩니다. 특히 文, 武, 忠, 孝 같은 글자가 많이 쓰인 것은 익히 잘 아시리라 사료됩니다.


이처럼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은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말할 때 이름 두 자를 붙여 함께 말하지 않고 한자씩 떼어 "아무 字 아무 字"라고 하는 것도 피휘(避諱, 피하고 꺼림)의 일종으로서 이름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하간 이런 복잡한 메커니즘을 통해 서로의 품위와 인격을 존중하고 예우하고 배려하려했던 옛사람들의 자세는 곱씹어 볼만합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선현들의 아호 중에 백범 김구 선생과 무애 양주동 박사의 그것이 있습니다. 白丁의 白과 凡人의 凡을 딴 白凡이라는 아호를 두고 김구 선생은 "가장 미천한 사람까지 모두 나와 함께 애국심을 가져야겠다는 것이 나의 소원임을 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양주동 박사는 "나는 가없는 것을 좋아한다. 바다를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하고, 가없는 사랑을 사랑하고, 가없는 뜻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自號를 ‘无涯’라 하였다"고 밝힙니다. 두 분 다 자신의 호에 걸맞은 삶을 사신 분들이라 더욱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너무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이제 새로 지은 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옛사람들은 자신이 호를 짓게 된 변(辨)이나 기(記)를 남기거나, 남에게 호를 지어 줄 때 그 의미와 전거(典據)를 밝힌 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호변(號辨) 또는 호기(號記)라고 하는데 옛사람들의 글 중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새로운 호에 대한 호변을 좀 늘어놓겠습니다. 아참 저도 그간 실수하던 건데 자신의 호를 우아한 호라는 뜻의 아호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으로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호를 쓰는 사람이 드물어서 아호라는 표현을 꺼릴 필요가 있겠냐 싶기는 하지만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小鮮은 도덕경 60장의 治大國若烹小鮮(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듯 해야 한다)에서 따왔습니다. 작은 생선을 굽는다며 젓가락으로 헤집고 뒤집기를 반복한다면 생선살이 부서지고 말 겁니다. 가만히 놓아두고 지켜보는 것도 어렵고, 적절한 시점에서 뒤집기는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생선을 은근하게 굽는 마음처럼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쥐어 짜내지 않고, 자연스레 배어나고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약팽소선은 도가적(道家的) 자유주의자를 지향하는 제가 그리는 無爲而無不爲(억지로 하지 않기에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의 고요함과 치열함이겠지요. 제 자신이 작은 물고기(小鮮)가 되든, 팽소선(烹小鮮)을 하는 자리에 가게 되든 말입니다.


小鮮이라는 자호에 부끄럽지 않도록 이 세상에 한 뼘의 자유라도 더 넓히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생선이 새카맣게 탈 때까지 야윔의 고착화를 방관하지도 않고, 노릇노릇 익기도 전에 뒤집으려고 서러운 눈물을 요구하지도 않겠습니다. 전체주의의 젓가락이 생선살을 들쑤시는 것에 맞서고, 인위적인 손길이 센 불로 높여 생선껍질 태우는 데 고개를 젓겠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숙고된 균형감각을 바탕으로 한 점진적 사회개혁을 추구할만한 깜냥이 될지 여전히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나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인에 대한 연민과 애정만이 익숙해진 절망을 헤쳐나가는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자중자애(自重自愛)하자는 의미에서라도 제 둘레에 아호 하나쯤 만들어 쓰는 지인들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어주거나 짓는 것을 도왔던 각영(刻影), 무념(無念), 무본(務本), 우로(雨露) 등의 벗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새삼 궁금하네요. 여하간 새로운 호인 소선(小鮮)을 의연하고 당당하게 써나갈 테니 많은 질정편달 부탁드립니다. 한번뿐인 삶을 알차게 살기 위해서 자신의 신념과 목표 등을 표상하는 호 문화에 빠져보심은 어떨까요? 고맙습니다. - [小鮮]


<참고 문헌>
신용호·강헌규. 1997. 『先賢들의 字와 號』. 전통문화연구회.
김석제. “[儒林 속 한자이야기] (69) 雅號(아호)”. 서울신문. 2005. 4. 30.
국립중앙박물관 안내문 중 "묘호, 존호, 시호, 휘호"
Posted by 익구
:

보고재(寶高齋) 전경

옹방강은 당시 78세였다. 그는 소동파를 좋아하여 서재 이름을 "소동파를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라는 뜻으로 보소재(寶蘇齋)라고 했다. 추사는 이를 본받아 귀국 후 자신의 서재를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만드는 서재"라고 해서 보담재(寶覃齋)라고 하였다.
- 유홍준, 2002, 『완당평전 1』, 학고재, 91쪽


얼마 전 읽은 완당평전에서 다음 구절을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추사 김정희는 청나라 연경학계의 원로인 옹방강을 스승으로 모시며 서재 이름을 저렇게 지었다고 한다. 또한 정약용이 유배되었던 전남 강진 다산초당의 현판 글씨를 써주면서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고 써주는 데 보정산방이란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이다(유홍준, 2002, 『완당평전 2』, 학고재, 551~552쪽 참고). 옛사람들이 나눈 절절한 사모의 흔적들이 참 정겹다.


보소재, 보담재, 보정산방 등의 용례를 보며 나도 내 방(혹은 서재) 이름을 지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내 영혼의 스승이신 고종석 선생님을 존경하며, 그를 보배롭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보고재(寶高齋)라고 지었다. 평소 흠모하고 사숙하던 선생님과 같은 기품 있는 자유주의자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인터넷 헌책방, 출판사 문의를 통해 어렵사리 구한 고종석 선생님의 절판된 저서인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의 유럽통신』, 『언문세설』, 『책읽기 책일기』, 『기자들』등을 구한 것을 기념하는 의의도 있다. 여하간 보고재에서 자유주의가 만개하길!

보고재 탄생의 모티브인 고종석 선생님의 저서들

보고재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상존한다. 좋은 책이라도 한두 해만 지나면 서점에서 찾을 길 없는 부박한 출판 풍토상 미리 확보를 해두어야겠다는 강박관념, 물욕이 발동하여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인데 도무지 구할 길이 없어 발을 동동 굴러본 기억,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반납하는 대신 분실했다고 하고 내 책꽂이에 꽂아둘까 하는 아찔한 유혹, 무엇인가 홀린 듯이 별 고민 없이 충동구매하고 나서 드는 후회, 통장잔고가 바닥나는 데 아랑곳 않고 묵직한 책꾸러미를 보며 배불러하던 포만감, 단 한 쪽도 읽지 않고 고이 모셔두면서도 책표지와 책등만 바라봐도 흐뭇해하며 언젠가 꺼내들 그 날을 고대하는 희망...

날림으로 만들어 본 보고재 현판(?)

내 누추한 방구석을 보고재라 이름지으며 20대에 1000권 이상의 책을 읽기로 새삼 결심해본다. 1년에 100권이라는 소리인데 생각만큼 쉽지는 않으리라.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는 책읽기,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일을 하면서도 짬짬이 하는 책읽기, 남 눈치보지 않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해나가는 책읽기를 주창해본다. 허영의 독서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불필요한 금전적 낭비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책장을 넘기며 그 책들만큼 아름다운 마음들과 대화를 한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책과의 인연을 사랑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책 사랑에 대한 고백은 아무리 해도 모자란 그 무엇이다. - [憂弱]


추신 - 보고재 탄생에는 mannerist 선배님이 잠시 거처하신 울산 모처의 원룸이자 "무사안일 쾌락만땅"이라는 모토를 실현시킬 공간이라는 뜻의 "만땅재"라는 이름도 참조했음을 밝힌다.
Posted by 익구
:
글 쓰고 읽기가 참 편해진 인터넷 세상이지만 진솔한 글을 쓰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장황하고 산만하기는 했지만 나란 녀석에게 던져진 질문에 답하면서 내 자신을 궁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질문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 형께서는 대기업(ex.삼성,SK)의 회장이나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거대한 박물관의 관장 자리를 맡아 줄 것을 동시에 부탁받았을 때 어느 것을 고르실 겁니까??ㅋ (나이가 50대 쯤 되었을 때...)

일단 질문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대기업에서 그런 자리를 저 같은 녀석에게 내어줄 리가 없겠죠. 다만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이니까 제가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가정해버리겠습니다.^^; 나이가 50대쯤이라고 했으니까 그동안 무슨 일은 했든 여생을 대충 먹고 살만하다고 마저 가정하겠습니다. 당장 먹고살기 벅차다면 대기업 간부를 해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요.

여하간 이럴 경우 박물관 관장 등의 일을 시켜준다고 하면 내심 좋아서 입 꼬리가 귀까지 찢어질 거 같습니다. 박물관장씩도 필요 없고 문화재 안내사 혹은 큐레이터나마 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면 참 고마울 따름이지요.

얼마 전에 홍유릉(고종, 순종황제릉) 답사를 다녀왔는데 홍유릉 안내를 해주시는 아주머니의 설명을 듣고 실제로 능에 올라 가보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제가 문화유산을 좋아하다고 하니까 필 받으셔서 이런 특혜를 베풀어주시더라고요.^^ 이 아주머니는 은행에서 일을 하시다가 은퇴하시고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라 하셨는데 그게 참 부러워 보이더라고요.

지금이야 경영학도로 사는 것으로 정신이 없지만 제 오랜 취미는 역사공부와 문화유산 감상이었으니까요. 불우했던 과거사로 인해 너무 많이 훼손된 우리 문화유산들을 복원하고 더 알려나가는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은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아마 박물관 일을 하게 된다면 그 때쯤 한창 잘 나가고 있을 선배님, 동기들, 후배님들께 손을 좀 벌려서 문화유산 재정비에 투자하도록 하려고요.

저말고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널려있는 일보다는 제가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일, 할 때마다 제 영혼이 기쁨에 겨워 파르르 떨릴 수 있는 일은 아무래도 문화유산 쪽 일이겠지요. 물론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니 한계가 있겠지만요. 아무쪼록 행정 당국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며, 문화유산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음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덕분에 무척 즐거운 상상이었습니다. 푸하하


○ 익구형을 보면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고 키워나가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후배에게도 예의와 존중을 잊지 않으시는 형의 모습을 보면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이쯤에서 질문을 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질문을 합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시키기 위한 질문에서부터, 나 자신을 알고자 하는 질문까지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겠지요.

제가 궁금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익구형이 살아오시면서, 혹은 앞으로 살아가시면서 그 답을 찾고 있는 질문이 있으십니까?
스스로를 향한 것일 수도, 타인에게, 혹은 대자연 앞에 펼쳐내는 질문일 수도 있는 ...
어떻게 보자면, 형의 인생을 걸고 추구하는 바 일 수도 있겠지요.

두서 없는 잡담에 가치 있는 답변을 기대하는 것이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문현답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형님의 현답(혹은 현문)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아마 사흘밤낮은 머리 싸매고 고민해야할 듯 하네요. 좋은 질문을 한다는 것, 괜찮은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도 너무나 유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에 대한 대답 혹은 대안을 제시하고 그에 걸맞은 실천까지 따르는 것... 참 어려운 일이지요.

제가 요즘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꽤 그럴듯한 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지난 2년 간 이런저런 생각들을 수입하고, 글들을 발췌하며,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대강의 얼개는 잡아봤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고심하기보다는 어떻게 잘 실천할 수 있을까로 머리털 쥐어 뽑고 있답니다.^^

"자유주의자"라고 타이틀을 잡아봤지만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나만큼이나 타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개인주의, 생각의 자유를 주창하는 자유주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다원주의를 총칭하는 의미로 쓴 말입니다.

저는 자유주의자로서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상도덕을 준수하는 것을 신조로 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집단의 선택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이상 국가나 집단이 그 개인의 결정에 감놔라 배놔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유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와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자유선거에 의해 권력자를 선출하는 의회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다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믿고 지지합니다. 제가 바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은 사실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자유권들이 제대로 실현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론상...^^;

또한 제 개인적으로는 집단에 피신하지 않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남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타인과의 차이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차별이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차별이 싫다고 차이마저 없애려는 시도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차이는 자유의 자연스런 산출물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차이가 폭압적 차별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을 막고, 불평등이 고착화되는 것에도 고개를 가로 저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개성의 향연을 누리면서도 그런 개성들 사이에 현저하게 다른 가치가 부여되지 않도록 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대강 저의 자유주의에 대한 소회를 풀어봤습니다. 이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온 결론을 가지고 당당하게 편파적으로 살기, 그러나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알고 늘 열린 자세로 경청하기, 설령 내 결정이 소수파에다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기,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생활화하고 개구리가 되었다고 올챙이 시절을 잊지 말기... 이런 다짐들을 해봅니다.

이와 더불어 철학자 칼 포퍼가 주장한 "점진적 사회공학"도 제 일생을 걸고 추구하는 과제입니다. 이것까지 설명하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생략합니다. 혹 관심이 있으시면 번거로우시더라도 익구닷컴에서 "점진적 사회공학"이라고 검색해보면 관련 글이 몇 개 나오니 그걸 참조해주세요.

어린왕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가진 자유주의로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생각 간절합니다. 저는 제가 좀 더 개성이 넘치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그러한 개성이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또한 저의 생각이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를 위해 창조적 상상력을 연마하는 데 저의 정성을 쏟고 싶습니다. 여하간 여기까지가 저의 답변입니다. 뜨아아 막상 써놓고 보니 제 속내를 마구 꺼낸 것 같아 민망합니다.^^;

인생이란 모이고 흩어짐이 무상하여, 오늘은 모였지만 내일은 각각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고려말 문인 이규보의 글에서 따온 표현입니다). 그럴수록 더욱더 교류의 즐거움, 소통의 기쁨에 대한 열망은 커져 갑니다. 아무쪼록 넓어질수록 깊어지고, 높아질수록 낮아지며, 적극적이면서도 진지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책임감 있는 후배님이 되어주세요. 저도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 책 많이 읽는 형, 군대 가서 훈련 받는 중에는 책 못읽으실텐데~ 형 어찌합니까 ㅋㅋ
공익이셔서 다행이네요


훗 정말 저도 훈련소 기간을 제외하고는 민간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말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 저이지만... 천만다행으로 글 읽고 쓰는 것은 좋아해서 그나마 살아가는 재미에 보태고 있으니까요.

근데 제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는 하지만 속독하거나 발췌독 하는 경우도 많고, 독서 분야도 편벽되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게임 한판, 당구 한판, 미팅/소개팅 한판 대신에 책 몇 장 더 보고 잡글 몇 줄 더 쓰는 정도이니 말입니다.

무언가 읽고 쓸 수 없는 세상은 제게는 암흑이겠죠. 그 암흑기간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것에 감사하며 덤으로 얻은 시간은 남들을 위해 쓰도록 노력하려고요.


○ 1년에 과연 몇 권의 책을 읽으시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1년에 많아봐야 3권? ㅎㅎ 제기랄

제가 원체 무계획으로 사무를 처리하기 때문에 독서도 필(Feel)에 의존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기(乾期)와 우기(雨期)처럼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정말 내키는 대로 잡히는 대로 휘리릭 넘겨 읽지만,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을 때는 책 겉표지도 쳐다보지 않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때였던가 어느 선생님께서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생활이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에 큰 감명을 받고 생활화를 하려고 무던 애를 썼는데 아직 그 단계는 아닌 것 같네요. 너무 편차가 크고, 편식도 심하니 말입니다.

술잔도 세면서 마시면 맛이 떨어지듯이, 책도 세면서 읽으면 괜한 강박관념만 드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가 속독을 하거나 발췌독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때 이 책을 읽었다고 계상을 해야할지도 애매하고요. 목표는 한해에 100권 정도 읽는 것인데 지난 3년 간의 대학생활에서는 잘 지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학생회 잡일이 몸이 바빴다기보다 괜히 그 쪽으로 신경을 쓰다보니 차분히 앉아있을 시간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고요.

이제 제법 여유로워졌고 공익근무 날짜가 지체되면서 휴학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대학 들어서는 가장 많은 독서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2005년 2월 이후 넉 달간 도서관 대출 기록을 추적해봤습니다. 재미없어 대충 보거나 몇 개 부분만 발췌해본 책을 제외하니 60권 정도 빌려봤네요. 거기다가 동생 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본 것이 15권 정도 되네요. 또한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나 도서관 내에서 읽어버린 책들 포함하면 80권쯤 될 것 같네요. 뭐 제가 엄밀한 학술서적을 본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빨리 읽을 수 있는 역사분야나 문화유산 파트 쪽을 읽은 것이기 때문에 다소 양이 뻥튀기된 셈이지요.

여하간 한해 100권 읽는 것으로 치면 대학 4년 동안 400권이 되어야 하는데 벌써 3년이 지나갔고 할당량에 비해 많이 모자라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4학년 때는 아무래도 이래저래 바빠서 책도 많이 못 볼텐데 말이죠. 그래서 보충학습(?)하는 셈치고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짬짬이 못다 읽은 책들 메워보려고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책을 읽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맑은 일이다(讀書是人間第一件淸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비단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인터넷을 이용해서도 얼마든지 많은 글을 읽을 수 있으니 편리한 세상 같아요. 허영의 독서가 적잖았겠지만 많은 책들, 각종 글들에서 아름다운 마음들을 만나는 건 제 낙인 것 같습니다.

자리가 높아지고 몸이 편안해질수록 책을 찾을 수 있는 여유, 문필가씩은 아니더라도 잡글을 쓰면서 삶의 기록을 남겨보는 재미... 이 두 가지와 더불어 모국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사랑까지 안고 사는 제가 되고 싶어요. 재미난 책 많이 보세요.^^


○ 자신의 인생 계획을 20대, 30대, 40대 등등으로 나누어 얘기해주세요.

10년 단위로 딱딱 계획을 세울 만큼 체계적인 것은 없답니다. 차라리 20대와 나중에 노년기 정도를 구분해서 말씀드릴 수 있을 듯 해요.

일단 20대에는 당장에 닥친 공익근무를 무탈하게 하면서 장기적인 미래 설계를 해야겠지요. 취업 외의 방도인 대학원 진학과 행정고시 도전 여부를 정하는 것이 일단 첫 관건이 될 듯 하네요. 대학원을 결정하면 기왕이면 4년 간은 더 배워야겠고, 행시를 결정하면 붙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죠(너무 당연한 이야기^^;). 이 둘 다 아니라면 무난히 취업준비 모드로 접어들겠고 졸업을 위한 영어공부를 포함해 각종 상식을 습득하겠지요. 여기까지 얼추 정해지면 세부적으로는 일로매진(一路邁進)해버리려고요.

전 그다지 변화무쌍한 삶을 원하지 않아서 일단 한번 정해지면 큰 궤도 수정 없이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진로 설정을 남들보다 굼뜨게 신중을 거듭하고 있기도 하고요. "힘들게 결정하고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주의거든요.

여하간 어찌저찌 삶을 꾸려나가다 보면 세월은 부지런히 흘러가겠지요. 저는 특별히 초인적인 체력을 가지고 있거나 출중한 실력을 가진 녀석이 아닌지라 한 60세 정도가 되면 어지간한 일손은 다 놓고 싶습니다. 부득이 그 전에 놓아야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자유를 숭상하는 제게 노년기의 자유도 무지 흥미진진할 듯 합니다.

우선 서예를 좀 배워서 지인들에게 제가 쓴 글씨도 막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 때까지도 미처 못간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회가 되면 중국 등의 외국들도)를 다니며 유유자적하겠고, 그 때까지 쓴 제 잡글 중에 괜찮다 싶은 걸로 문집 비슷한 걸 엮어보고도 싶어요.

이런 것들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이 괜히 모자라고 어리숙하다고 타박하지 않도록 수양을 해야겠죠. 저 또한 그 시절에는 무지하게 어리버리했고 윗사람 눈에 못미더운 녀석이었음을 깨닫고, 후임자들이 잘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축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곱게 늙는 것이 제 마지막 인생계획입니다. 푸하하


○ 강아지 이름을 야니라고 지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자로 옆에 덧붙인걸 보니 무언가 의미심장한 작명 센스가 발휘된 결과물인 것 같은데 ㅋㅋㅋ

그다지 의미심장하지는 않습니다. 야니는 세 살 때인 2003년 6월에 데리고 와서 키우게 된 개인데 前주인이 붙인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평소 흠모하던 철학자인 칸트로 부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주장했으나 가족들의 차가운 반응을 얻고 그냥 야니라 쓰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름은 새로 지어줄 수가 없으니 대신 한자이름을 만들어 주게 됩니다. 야니에 해당하는 한자가 별로 없어 생각한지 1분만에 만들 수 있었지요. 들 野, 진흙 泥... 야니의 개구쟁이스러움과 산책 시의 오두방정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 마치 개구리를 연상시키는 이 포즈 때문에 '야니 개구리'를 줄여서 '야구리'라는 애칭을 쓰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말티즈이니 털이 새하얀터라 백옥(白玉), 하얀 털에 눈 두 개, 코 하나만 새까맣다고 해서 삼점(三點) 등의 아호(雅號)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야니는 고도의 훈련견이 아닌지라 자기에게 붙여진 다양한 별칭들을 거의 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요.^^; 훗 그래도 뭐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내고 있답니다.^^


○ 어떻게 하면 형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요??^^

제가 환하게 웃던가요?^^; 제가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인지라 어지간하면 웃어 넘기려고 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기는 합니다. 난감한 일이 있을 때도 "야야~ 이거 곤란해~" "당최 이게 무슨 일이람?"이라며 씨익 웃어 버리는 경우도 많고요. 나름대로 근엄하고 엄숙하게 무게도 잡고 분위기도 잡고 싶지만 그런 걸 잘 못하거든요. 저는 카리스마 있고, 듬직하고, 패기 있다기보다는 그저 열려 있고 쉽고 만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거기까지가 제 한계이고, 그게 또 제 매력이라면 매력일테니 말입니다.

미국의 행동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우리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저도 이 말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병이 있는 거 같지만 저는 혼자 있을 때도 실실 쪼개거나 히죽거리기를 잘합니다. 그러다 보면 무료한 일상에도 기쁨이 스며들거든요. 여하간 질문에 답하자면... 하루에 쓸데없이(!) 세 번만 더 웃어 보세요. 팍팍한 우리네 삶에 여유와 평화가 깃들 수 있다고 봅니다. 웃음으로 사치하는 것은 경영학적으로도 유의미한 행동일 겁니다.

모든 것이 고통이다(一切皆苦)라는 불가의 가르침씩은 아니더라도 세상살이는 분명 녹록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얼굴 찌푸리고 있기보다는 악착같이 재미나게 지내려고 노력해야겠지요. 무언가 가지고 싶어서 자꾸 부족해지고, 집착하게 되고, 상실감에 허덕이게 되는 것은 경계하면서 말입니다. 여하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뒹굴 거리더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상은 손에서 놓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너무 걱정근심에 휩싸이지 말고 푸하하 웃으며 지내야겠습니다.


○ 익구야 너 인사하는 법 어디에서 배웠니!!?
너무 좋아!!!! 꺄아~


누나는 제 인사법을 참 좋아 해주시는 것 같아요. 사실 별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저는 제 인사법을 "70도 인사"라고 부릅니다. 가볍게 하는 눈인사인 목례(目禮)나 목 부분만을 사용하는 인사보다는 허리까지 숙여야 나오는 각도인 70도까지 육박하는 인사를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실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되어 하지 말라고 해도 자동이지만요.^^;

서울외고 한문시간에 양성준 선생님께서 명심보감 강의를 해주셨을 때 "만약 남이 나를 중히 여겨주기 바란다면 내가 남을 중히 여기는 것을 지남은 없느니라(若要人重我 無過我重人)"라는 구절을 참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비슷한 말로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은 "자기에게 성의가 있으면 상대방에 허위가 있을 리 없고, 자기에게 허위가 있으면 상대방에 성의가 있을 리 없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결국에는 주고받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니 좀 메말라 보이지만 교류는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이 함께 노력해야한다는 의미지요. 정리하자면 제가 정성을 다하는 만큼 상대방도 정성을 다해주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은 정성을 다하지 않고서도 상대방의 호의를 받을 수 있겠지만 머지않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짜가 없는 세상, 거저먹는 인간관계는 없겠지요. 친해질수록 상호 존경심을 잃지 않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참 힘든 일이지만요.

지극한 정성,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성이면 감인(感人)인 것 같아요. 제 인사법은 이 지성을 실천하겠다는 상징적 의미라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고등학교, 대학교 이중 후배인 만큼 앞으로도 많이 아껴주세요. 저도 노력할게요. 고맙습니다.^^
Posted by 익구
:
飛반인 탐방 질문과 답변 대부분을 그대로 정리해봤다. 비슷한 문항을 모아서 정리했다. 한가한 휴학생이었던지라 나름대로 정성껏 답변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나란 녀석을 좀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 가장 좋은 평가를 내리고 싶은 한국 대통령을 알고 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꼽고 싶습니다. 아직 임기가 많이 남아 섣불리 평가하기는 좀 무리가 있지만요. 지난 2002 대선 때 비록 투표권은 없었지만 노무현 지지를 천명했었고 지금도 노무현 지지자임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혹자는 너무 가볍다며 대통령의 처신을 나무라지만 저는 노 대통령의 그 소탈하고 탈권위적인 리더십에 매료되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숨막힘이 느껴지거든요. 가령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도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봅니다.

제 편향된 의견인지 모르겠으나 그간의 대통령 중에서 가장 국민을 무서워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하던 대통령의 모습이 아닌 끊임없이 지지자들과 국민들에게 짐을 나눠달라고, 힘을 보태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는 참신함이라고나 할까요. 다만 노 대통령을 잘 도와야할 열린우리당이 종종 삽질을 하면서 제 가슴을 긁어 놓지만요.^^;

개인적으로 사람을 단숨에 잘 믿지는 않지만, 일단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성격입니다. 그야말로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앞으로 몇 번을 더 '다시 한 번~'을 외칠지 모르겠지만요.^^ 부담 없는 지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담'은 '책임'과 동의어겠지요.

저는 노 대통령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저 자유주의자로서, 개혁적 보수로서의 면모를 다잡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바랍니다. 진보인척 하면서 표를 구걸하고 입을 닦는 파렴치한 수법은 이제 더 이상 쓸 수 없거든요. 다만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나 천민자본주의와 극단적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경계 같은 자유주의 미감을 구현할 짐은 지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한 보수가 되는 것이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소임일 것입니다.

독선과 오만을 버리는 것만큼이나 과욕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 대통령님이 이것을 잘 해내신다면 분명 존경받는 지도자로 박수를 받으며 떠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 좋아하는 스포츠와 스포츠 스타를 알고 싶습니다.

민망하게도 저는 스포츠에는 정말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ㅜ.ㅜ 고연전이 없었다면 정말 스포츠와는 완전 무관하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천성이 게을러서 굼뜨다 보니 무언가 재빠르고 순발력을 요구하는 것에는 정말 젬병이거든요. 그냥 세간의 이목을 끄는 주요 대회 같은 것을 좀 보고 누구누구 잘한다고 해보기도 하지만 사실 이건 좋아하는 축에도 못 들겠죠. 아마도 스포츠 쪽은 제 영원한 미개척 분야가 될 것 같습니다. 스포츠를 보거나 하는 것을 죄다 시큰둥해하니 특히나 남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많은 애로사항이 있긴 합니다. 그래도 저 같은 녀석이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지냅니다.^^;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각종 게임도 나몰라라하고, 연예인 이야기도 관심이 없고, 이런저런 잡기에도 무지한 편입니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고도 하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늘 재미나게 지내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다만 이렇게 재미없는 녀석을 친구나 선배, 후배로 삼아 두고 싶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는 두려움은 늘 맴돌죠.

모든 스포츠에 거의 완전히 관심이 없는 저이지만 E-SPORTS라고 불리는 스타 중계만큼은 무척 즐겨보고 있습니다(물론 제가 직접 하는 스타는 최악입니다^^;). 이것도 스포츠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프로토스 유저인 박지호, 강민 선수 등을 맹렬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스타에 영원히 관심 없을 줄 알았던 제가 스타 중계 방송에 푹 빠져 있듯이 세상만사 함부로 가름하고 제한해서는 안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인생은 무상하고, 무상한 덕분에 사람은 늘 변하니까요. 그 재미에 이 무료한 삶이 그나마 살아 볼만한 것이겠지요. 혹시 이러다가 제가 열혈 스포츠광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가능성이 무척 희박하지만.^^;


○ 내유외강형 인물과 외유내강형 인물 중 어떤 사람이 좋습니까?

보통 외유내강(外柔內剛)을 칭찬의 의미로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다소 낯선 내유외강(內柔外剛)은 말 그대로 겉으로는 강하게 보이지만, 속은 부드러운 것으로...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어렵지만 일단 마음을 열면 따뜻하게 잘 대해주는 사람, 내면은 부드럽지만 겉으로는 강철같은 의지가 느껴지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엄청 다를 것 같은 두 단어이지만 막상 풀어서 보면 매우 비슷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단어는 마냥 부드러운 것, 마냥 딱딱한 것이 아닌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하니까요. 내유외강, 외유내강을 손쉽게 구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요.

차라리 타인과의 관계에서 편견 없이 열린 자세로 경청할 수 있다면, 스스로 생각하면서 아집에 휩싸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면 외유내강이든, 내유외강이든 큰 관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요점은 “열려있음”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 가장 좋아하는 한식과 양식은 무엇인가요?

한식은 제육볶음, 순두부찌개, 냉면을 좋아합니다. 고기류 중 간장 양념보다는 고추장 양념이 들어간 것 중에 비싸지 않은 부위라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제육볶음, 제가 좋아하는 두부와 달걀이 찰떡궁합으로 만난 순두부찌개, 혹시 마약이 아닐까 의심되는 육수의 짜릿함으로 속을 풀어주는 냉면... 이거 없이 어떻게 살까요.^^

양식은 크게 즐기는 편이 아니고 먹어봤자 한국화된 양식을 즐겨서 잘 모르겠네요. 가령 돈까스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걸 양식의 범주에 넣기 민망하듯이 말입니다. 제가 서양쪽에 좀 약해요.^^; 차라리 중식 요리들은 돈이 없어서 못 먹을 뿐 참 좋아합니다. 한국에서 먹는 중국 음식은 비싸고 양 적어서 참 슬퍼요.ㅜ.ㅜ


○ 첫사랑에 대해 말해주세요.

왜 아직도 여자친구 한번 못 사귀었냐는 질문에 혼자서도 잘 논다는 말로 둘러대기 일쑤였죠. 아직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할 마음이 크게 절실하지는 않은 것 같고요. 원래 제가 이렇게 무딘 심성으로 모진 세상 살아가고 있죠. 푸하하

굳이 제 첫사랑을 추적해보자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첫눈에 반했다고 해야할 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을 가지고 생난리를 치다가 "외면에 내면이 드러나는가?"하는 문제로 넘어갔다가 결국 중간에서 타협했습니다.

외면과 내면은 별개의 것이다라고 철썩 같이 믿던 제가 양보해서 외면에 내면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는 "내외개연성론(內外蓋然性論)"을 주창했거든요. 한 사람의 내면을 중시하고자 했던 제 철없는 고집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로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보려고 무던 애를 쓰는 꽤 괜찮은 습관이 생겼습니다.^^

여하간 첫눈에 반하기는 했는데 첫사랑으로 인준은 제대로 못 받고 제 나름의 철학적인 논쟁만 즐겨버린 엽기적인 사태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첫인상보다는 조금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세월로 빚어낸 인연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그저 이래저래 교류하면서 지내다가 적당히 세월의 무게가 쌓였을 때 아 이 사람을 내가 좋아해도 되겠구나 싶은 경우가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완전 횡설수설이지만 제 첫사랑은 이미 있었다고 해야할지, 아직 없었다고 해야할지 딱히 형언하기 힘듭니다.^^;


○ 태어나서 첫눈에 반한 여성이 있는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그 경험을 해본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도 첫눈에 완전 넘어가는 수준은 아니라도 처음 만났는데 호감이 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첫눈에 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은 모든 인간은 그 정신 속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요소, 즉 남성은 아니마(여성적 영혼)를, 그리고 여성은 남성적인 아니무스(남성적 영혼)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조화하고자 하지요. 육체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있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원래 양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이성에게 투사되어 '매력' 또는 '혐오감'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됩니다. 즉 남성의 경우 여성에게 아니마를 투사할 때 자기 아니마의 여성상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매력을 느끼고, 모순된 경우에는 혐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라는 시구는 그런 인간의 표현하기 힘든 무의식의 감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눈에 흠뻑 빠져버린다는 것, 괜시리 좋은 사람이 생기는 것, 그냥 믿고 싶은 사람이 덜컥 나타나는 것은 살다가 몇 번은 겪어보고 싶은 유쾌한 일이겠지만 융의 설명에 따르면 상대방을 보고 느끼는 황홀감이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김이 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낭만이 아주 떨어져버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도 첫눈에 반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네요. 첫인상이 좋은 계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세월이라는 필터로 걸러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겠죠.


○ 지나가다가 정말 자신의 반쪽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을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과연 용기있게 말을 걸 수 있을런지?

위 문항에서 말씀 드렸지만... 길거리에서 정말 이상형이 지나간다고 해도 그냥 보낼 듯 합니다. 이건 굳이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운명처럼 마주치는 사랑 이런 것에 관심이 없어서라고 해야 더 맞을 것 같네요.


나 정말 궁금한게 있는데..........
저기있자나........☞☜
B반하고 특히 친한거야?아니면 B반말고도 다른반에서도 이렇게 활동을 열심히 하는건지^^;


뭐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일단 제 학생회장 임기와 함께 했던 04학번 후배님들과는 반 그런 거 없이 정말 다 친하고 싶고 잘해주고 싶어요. 대학 새내기로서 즐기는 이런저런 행사들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 같아 늘 죄송스런 마음뿐이거든요. 그래서 반 상관없이 친한 04학번 후배들과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관계 맺고 싶고, 저도 그렇게 노력 중입니다.

제가 2004년 37대 경영대 학생회장 일을 하던 때야 당연히 다섯 개 반을 다 다니려고 노력하고, 어느 한 반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인의 호오를 떠나 그건 당연한 책무니까요. 게다가 이미 36대 경영대 학생회 일을 도우면서 2003 새터를 준비할 때(이 때 홍익이, 병일이 등과 함께 일했음)부터 경영대 다섯 개 반을 골고루 만나며 다녔으니 제게는 특정 반이라는 개념을 가질 기회가 없었습니다. 지난 2년 간은 특정 반이 아닌 경영대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으니 제 특수성을 조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작년 11월 제 임기가 다 끝나고 올해 3월 초에 있던 다섯 개 반 개강총회까지 다 참석한 이후 학생회장 A/S도 공식 종료하고 각종 반행사 이런 걸 챙기지 않습니다. 이제 제가 갈 권한도 없고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몇몇 04학번 후배들만 간헐적으로 만나는 것이 전부였지요.

그런데 임기도 끝나고 이제 사라져야할 녀석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보여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으신 飛반 학우 여러분이었지요.ㅜ.ㅜ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飛반 행사에 아주 가끔씩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다른 반 05학번은 거의 모르지만 이상하게 飛반 05학번 후배님들과는 이래저래 많이 보게 되더라고요. 먼저 연락도 해주고 말입니다. 낯가리는 제게 먼저 인사해준 현수, 보경이, 먼저 문자 보내준 태관, 정석이 등등의 후배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드립니다.

여하간 정리하자면 지금 저는 쥐뿔도 아닌 입장이고, 반활동을 할 처지도 아닙니다. 다만 저를 아니 미워하신다면 飛반 행사에 잠시나마 나타나 인사나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 비반과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서 05 애들이 형 원래 비반 02학번 선배였던 걸로 착각할만큼 비반 속에 깊숙히 자리해 계시는 형입니다. 형, 비반에 대한 단상을 듣고 싶어요.

飛반 학우 여러분들에게 헌사하고픈 갖은 미사여구를 빼고 담백하게 정리해보자면... 너른 포용력, 진취적 기상, 끈적한 우애... 이 세 가지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제가 과거에는 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 손님 입장에서 들렀지만 단순한 과객(過客)이 아닌 가족처럼 따스하게 대해준 그 푸근함이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또한 술자리에서나 지나가다 겨우 본 것에 불과한데도 기억해주고 먼저 인사해주고, 연락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적극적인 모습도 참 좋았습니다. 게다가 일단 관계 맺은 사이끼리 서로 챙겨주고 아껴주는 그 마음씨에 어찌 아니 감복하겠습니까.

저를 아니 미워하신다면 飛반 여러분들과 久而敬之(논어 제5편 공야장 中)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래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라고 해석하면 친해지더라도 존경심을 잃지 않고 범속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흘렀다고 무심해지지도 않고, 세월이 지났다고 차갑게 식지 않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오래 사귈수록 공경하게 된다"라고 해석하면 오래 사귀어도 그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기보다는 강점이 더욱 커진다는 뜻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약점과 한계마저 품을 수 있을 만큼 그릇이 커진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네요. 세월로 빚어내는 久而敬之,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까 싶은데 함께 해요~


○ B반 행사에 참여 하시면서 느꼈던 B반인만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용철이가 한 질문(윗 문항)에서 飛반에 대해 정리하면서 너른 포용력, 진취적 기상, 끈적한 우애... 이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이것을 飛반의 장점이라고 해야겠지요.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사람 소중한 줄 알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귀한 줄 안다는 점입니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이 공간, 이 시간을 공유하는 우리들은 꽤 각별한 인연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실상 랜덤하고 우연하게 배정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飛반에게는 이런 우연성을 필연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명심보감 성심편에 "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사향을 지녔으면 저절로 향기로운데 어찌 바람을 맞아 서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란 구절이 있습니다. 飛반에서 풍기는 인정의 내음, 열정의 내음은 억지로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되는 그 무엇입니다. 세월에 바래지 않는 飛반의 멋을 깨닫는다면... "그렇기 때문에" 飛반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飛반을 좋아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아울러 덧붙이자면 온라인 상에서도 돈독한 교류 나눌 수 있는 이 커뮤니티도 빼놓을 수 없지요. 경영대에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지만 이처럼 체계적이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커뮤니티는 없는 듯 합니다. 앞으로도 이 커뮤니티가 번성했으면 좋겠어요.^^


○ 요새는 학생회의 영향력이나 비중이 예전같지 않다.
학생들의 열의도 없는것 같고 학생회 선거나 행사에 대해 모두가 무관심해 보이는데.....
학생회장을 하면서 가장 속상했던적은?


학생회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저는 이제 학생회 조직으로 대동단결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늘 말하고 다니지요. 학생회는 그저 현상유지와 역할배분, 학교측과의 협상 통로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봅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려는 과욕 때문에 학생회 조직이 오히려 쇠퇴하는 역설적인 현상을 맞았다고 봅니다.

제가 어쩌다가 학생회장이 되어 한해 살림을 맡았을 때도 무탈한 현상유지책을 썼습니다. 이미 많은 학우들은 그 정도의 역할만 해주는 것으로 만족하시거든요. 무언가 거창해 보이고 일반 학생은 범접하기 힘든 빡센 학생회가 아니라 쉽고 만만하고 널널하게 보이는 학생회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속상한 적이 있다면 제가 무능하여 재미난 회의 진행을 하지 못한 것을 들고 싶습니다. 반일꾼들 모아놓고 하는 회의가 그리 재미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소중한 시간 내준 분들께 일말의 보람을 심어 드렸어야했는데 그걸 잘 못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飛반 후배들 중에서 학생회 일꾼을 많이 뽑고 싶었는데 아쉽게 그건 잘 안된 거 같아요. 제가 인사권(?)이 있었을 때 학생회 감투(?)라도 많이 나눠드리고 싶었는데 04학번 김효진양을 편집국장으로 선임한 거 이외에는 없었지요.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삼고초려를 했어야 하는데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네요. 쿨럭

아참 그리고 2004 새터 때 네 번째로 간 飛반 사발식 시주하고 나서 다섯 번째 반을 못 가고 쓰러져 잠들었을 때 속상했답니다. 흑흑 왜 그리 많은 양을 주셨단 말입니까? 지금이야 추억이지만 처음에는 사발식 시주를 하라는 건지, 그냥 사발식을 하라는 건지 헷갈렸을 정도였습니다. 훗 여하간 그 때 당시 관계 당사자들과 오해를 풀고 잘 지내고 있답니다. 푸하하

끝으로 저 같은 녀석도 학생회장을 한해 동안 했답니다. 올해 11월에 있을 경영대 학생회장 선거는 04학번 이상이면 도전 가능합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은밀히 연락을... 막 이러고...^^;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이 안찌는지?무얼먹고 사나요♬

특이사항은 전혀 없고요, 이렇게 말하면 민망하지만 체질인 것 같아요. 예전만큼 많이 먹지는 않지만 아직도 식충이나 배 안에 거지 있다는 소리들을 정도로 많이 먹는 편인데... 이러다가 나중에는 뚱뚱보 아저씨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현재는 그다지 살이 잘 안찌는 체질 같아요. 대신 몇 끼를 굶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면 살이 쭉쭉 빠져버려서 오히려 현상유지를 위해 애쓰는 편입니다. 고3 이후로 몸무게 변화가 거의 없었죠. 살이 좀 쪘다 싶어도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입니다. 마구 먹어봤자 뱃살만 느는 터라 억지로 살을 찌울 노력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흑흑 염장질이 아니었기를...


○ 졸업후 하고싶은일이 뭡니까?

그런 장기적 계획은 아직 세워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대학원 진학이냐, 고시 등의 시험 공부냐, 취업 준비냐 같은 기본적인 진로 설정도 못했고요(올해 안에 대강 정해봐야겠지만...). 뭐 지금까지 검토한 바에 따르면 대학원 진학은 호감도가 줄었고, 행정고시 쪽의 공부를 늦게나마 시작해볼까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긴 합니다.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제가 고시생이 될 수 있을지가 꺼림칙하지만요.

예전에는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을 때 국무총리라고 멋대로 둘러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소 후퇴하여 국무위원이나 정부 산하의 숱한 위원회에서 괜찮은 일을 맡아보는 것이라고 농담 삼아 말합니다. 이럴 때는 큰 정부의 강력한 옹호자가 되어버리기도 하죠. 푸하하

실은 중 3때 장래희망이 대학교수라고 했다가 담임선생님께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 결국에는 나 같은 선생질밖에 못한다는 연설을 1시간 동안 듣고 세뇌되어 일단은 뻥을 치며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돈 문제 신경 쓰고 살 수 있다면 학자나 문필가쪽을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해봤겠지만 사실상 포기 상태이고요.

주위에서 제가 그냥 무난하게 회사를 다니면서 살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은 숱하게 들어온지라 저도 제 미래가 걱정태산입니다. 여하간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책이나 글을 읽을 시간, 잡글이나마 쓰면서 소일할 시간이 있는 일을 하고 싶네요.
Posted by 익구
:

익구닷컴 개장 이후 익구닷컴에 제 모든 생각들이 녹아 들어가 있지만... 그 이전의 잡담과 잡글들을 대강 정리해봤습니다. 2004년 이전 익구의 잡담과 잡글 중 일부를 발췌해봅니다. 제가 했던 생각들, 내뱉었던 말들에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지난날을 함께 해준 모든 이들께 새삼 고마운 마음이 솟아납니다. 새롭게 만나는, 만나게 될 지인들과 주고 받을 잡담과 잡글들을 기대해봅니다.


나의 삶의 대원칙인 "한결같은 삶"... 내가 자랑할 수 있게 만들고픈 -아직은 문제가 많은- 나의 이상이다. 원효대사께서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다면 나는 집 앞 개천(?)의 고인 물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담박한 진리를 말이다. 충격(?)을 받은 나는 고인 물처럼 되지 않기 위해 좀 더 너그러워지고자 했다. 하지만 한결같음과 너그러움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아~ 인생은 삐걱대는 양팔저울...
- 차마 할 수 없는 말..., 2000/08/15


라이프니츠는 신이 이 세상을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것으로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넘쳐나는 악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반론한다. 그러한 악이 있기에 세상은 선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악이 없다면 선한 것은 결코 선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을 위해 있는 것이며,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비록 부분적인 악이 있다 할지라도 전체 속에서는 선한 것이며 무한한 신의 눈에는 결코 악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이런 그의 견해를 '철학적 낙천주의'라고 한다. 그런데 어이할까. 그런 그도 말년에 실각하여 분루를 삼키며 고독한 나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화려한 지위에 있었던 라이프니츠도 정치적 몰락과 함께 그의 장례는 아무런 격식도 없이 초라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감히 이런 그에게 조소나 던질 수 있겠는가? 그의 오른쪽 다리의 혈액순환에 이상이 생긴 이유가 아마도 며칠이고 의자에서 떠나지 않을 때도 있을 만큼 공부를 계속한데 있지 않을까라고 전기 작가가 말한 그의 삶을 보며 나는 그의 사상에 감히 피식 웃어나 보일 수 있겠는가?
- 서글픈 잡담들, 2000/11/10


공짜가 없는 세상. 변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만큼은 버리고 가는 길이며, 결국은 얻은 만큼 잃는 길이다.
- “그래 맞아!”와 “이게 뭐야?”, 2001/02/11


그래도 제가 아직은 각종 격한 언어를 쉽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어릴 적의 충격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인가 집으로 가는 길에 같은 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때는 개구쟁이였던 아무도 믿지는 않지만...) 저는 혀를 얄밉게 내밀어 '메롱!'이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엘롱!' 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로 맞은 편에 있던 그 친구가 반가이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제 혀는 3분의 1쯤 나와 있는 상태인데... 저는 놀라서 한동안 그 혀를 집어넣지 못했습니다. 메롱도 욕이라고 생각할 적에 충격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남에게 감히 심한 말이나 그 비슷한 종류의 말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것에의 죄책감이란 것이 본디 더 무서운 법인가 봅니다. 마구 가는 세상을 친구들과 같이 욕하면서 느끼는 다정함 내지 친근감을 저는 얻지 못했습니다. "야, 임마!"도 못하는 저를 매정한 놈으로 여겨 주시지 말았으면 합니다. 제 말이 조금은 딱딱하고 정 없어 보이더라도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때 그렇게 반가이 손 흔들어 주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ᅮ.ᅮ
- 익구어린이의 언어생활!, 2001/02/13


나는 줄곧 비주류였음을 인정한다.
이제 비주류가 선이고 주류가 악인 시대는 지났다.
내 바람이 있다면 주류로 편입해서 비주류를 옹호하는 것이다.
아무리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이 있다고 해도
소수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나는 여전히 무뚝뚝한 옹고집으로 남아버릴지 모른다.
교과서 같다느니 고리타분하다느니 하는 말도 꽤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다소 기인(奇人) 취급도 받았던 것 같다.
'바른 생활 사나이'라는 조롱 반의 소리도 들었고...
(중3때 한 친구는 '도덕고등학교'에 가라고 신랄한 풍자를 하기도 했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스스로 위선이 아니냐고 시비를 걸어본다,
난 정녕 내가 착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착함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다만 착하려고 노력해볼 뿐이다.
실제로 나는 자신은 그렇지 못하면서 남에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아이들에게는 정말이지 피아노를 던져버리고 싶다. (과격한가...^^)
- 정녕 실패한 것일까?, 2001/04/15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입니다.
분명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미워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아니,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증오의 감정은 조금은 안으로 삭혔으면 합니다.
아직도, 앞으로도 착한 사람과 좋은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요...
- 그럴듯한 넋두리는 어디에, 2001/04/19


내 마음의 독(毒)은 날로 묽어 지는 것 같은데...
나의 매운 눈빛은 자꾸만 흐릿해져만 가는데...
물들고 싶지 않고, 굽히고 싶지 않은데...
내 머리 속의 오늘은 무엇이 이리도 복잡한가?
이게 아닌 듯, 이게 아닌데...
여기까지 어떻게 밀려 온 건가?
가끔은 나를 위해 내가 눈물을 흘려야 한다.
뭐가 옳은 건지 혼미할 때
나의 가치가 흔들릴 때
마음의 소리조차 멎을 때
통절한 깨달음은 회한 뒤에서 수줍어한다.
내면의 공허함을 밖에서 메우려 하지 말자.
한(恨)마저 부둥켜안는 매섭고도 맑은 마음을 가져야지.
내 우매함에 조금 슬퍼하고
좀 더 생각해야겠다.
- 맑고 맵게 살자꾸나, 2001/05/05


언제나 멀리 있는 것은
가까이 둘 수 없기에 더 그립고,
손 닿을 수 없는 것은
두고 바라만 봐야 하기에 더 애타게 한다.
하고자 하는 것은 늘 멀리에만 있지만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 스스로의 비수를 품고, 2001/06/23


나는 왜 학벌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가?
그것은 학벌에서 소외된 이들의 아픔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아픔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꾸 그 아픔에 빠진 이들을 구하고자 하는
제 정신 이탈한 의분(?)이 나를 감싸며 나를 괴롭힌다.
- 학벌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 나, 2001/09/02


인간의 의식이 바뀌는데 3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양성평등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30년의 시간을 잡았습니다.
지금은 초라해도 그 때쯤이면...
상황이 많이 달라지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왜 지독한 양성평등주의자가 되었을까요?
글쎄요... 저는 단지 싫을 뿐입니다.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아름다움'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자신도 고통을 받기도 했고...)

양성이 "정말로" 평등하게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좀더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무엇보다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이 땅에 여자라는, 남자라는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 사소한 제안!, 2001/09/23


아무리 우리의 이상이 소중하다고 해서
내 눈의 눈물을 막기 위해
남의 눈에서 피눈물이 떨어지게 하지 맙시다.
우리 이상에는 철저하게 '사람'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렇게 비판하는 이들의 추악한 '욕망'과
무엇이 차이가 있겠습니까?

조롱 받는, 동정 받는 이상주의자가 되지 맙시다.
치열히 정진해서 실력 있는 이상주의자가 되어 버립시다.
시대적 진실을 고민하는 벗들이 있어서
이 땅은 앞으로도 아름다울 겁니다.
모멸의 시간은 짧고 환희의 시간을 길지언저...
- 이상주의자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 2001/10/21


나는 맛난 음식이 좋고 고급스런 옷이 좋다.
착할 뿐만이 아니라 지혜롭기까지한 여자가 좋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고 치켜세워 주는 것이 좋다.
권력이 있어서 나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좋다.
왜 나는 그런 욕망을 떳떳이 밝히지 못했을까?
오히려 그것은 나쁜 것이라고 부정하려고 했을까?
아아! 나는 반쪽 짜리 순수만을 열망한 것인가...
- 비판의 칼끝을 들이대다, 2001/11/16


난 꽤 매사에 분명한 선을 긋기 좋아하는
그런 칼 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곧잘 오해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흐리멍텅과 안절부절 사이에서 헤매이고 있을 뿐이다.
내게 과격하다는 평을 내려주시는 분이 간혹 있지만
나만큼 온순하고 유약하기까지 한 놈도 찾기 힘들다. ᅮ.ᅮ
이건 순전히 [도덕경]에서 비롯된 내 삶의 도가적 경향 덕분이다. ᅮ.ᅮ
좋은 건 못 배우고 나쁘게 배워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 폐인 생활도 이젠 지겹다, 2002/01/23  


열정이 식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열정이 존중받을 수 있는 풍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 열정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하여, 2002/04/06


“久而敬之”

...“오래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 정말 가슴 벅찬 말이야. 나는 우리들 사이가 이랬으면 한단다. 시간이 흘렀다고 무심해지지도 않고... 세월이 지났다고 차갑게 식지 않는... 그때 그 시절 같을 수는 없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늘 반가운 그런 존재가 말이야...우리 사이에는 권태기가 없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 오래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 2002/07/13


얼마 전 여자 택시운전기사 분을 보았다...
여자 버스운전기사 분을 본 적은 많았지만...
택시운전기사가 여자인 것은 처음 본 그 날...
하루종일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했었다.

이렇듯이 양성평등은 거창한 구호가 전부가 아니다...
가장 낮고 쉬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관심과 의지일 따름이다.
- 장상 총리인준부결 -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2002/07/31


세상 어느 구석에나 행복과 진리가 있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진리를 캐고자 하는 신념만 있다면...
행복은 어느 순간 내 옆에 앉아서 미소지어 주고 있을 것이고...
진리는 어느 순간 내 가슴속에 알알이 박혀와 있을 것이다.
- 가만히 들여다보면..., 2002/12/17  


못난 사람이 남 핑계를 즐기는 법이다. “내가 딛고 있는 곳은 왜 이 모양인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왜 저런가?” “내가 하는 일은 왜 죄다 이런 식인가?”...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나에게는 조금 면죄부가 생기며 꽤나 잘난 인간이 되는 듯한 착각을 잠시나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무책임한 도피를 반성한다. 지금 이 순간, 지금 만나는 사람들, 지금 하는 일을 소중히 해야 하도록 다짐해본다. 설령 아쉬운 점이 있더라도, 모자른 점이 있더라도... 지금 딛고 있는 곳을 옹호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치졸한 자기 방어 이전에 인지상정인지도 모르겠다.

현 상황을 더욱 긍정하려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보수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취적인 모습이 거세되었다고 슬퍼하기 전에,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거둔 것들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모습을 아껴야겠다.
- 비 나리는 날에 일상성을 생각함, 2003/06/27


비록 앞으로 나아가며 좀 더 배우고 느껴가면서...
지난날의 다짐들과 사색들, 기억들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 때는 그랬다고 적당히 방어하며 보듬어줄 수 있기를
어제를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그 위에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리라 믿는다...^^
- 믿는다, 2003/08/29


다음으로 준식이는 대학의 자유도 좋지만, 약간의 울타리가 있는 것이 좋고... 고등학교 시절이 그립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하기사 무지막지한 자유는 필연적으로 나를 고독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할 수 없는 것은 약간의 울타리로 인해 주어지는 속박에 걸릴 때의 기분 나쁨이 더 싫기 때문이다. 가령 수강신청 같은 것 할 때도 정말 머리털 뽑히듯이 고민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며 알아보느라 부산하기 일쑤인데, 이거 솔직히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그러나 내 스스로가 똘아이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내가 앓으며 고민해서 선택한 자유를 누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는 고독한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 물론 나도 고등학교 시절이 그립지만 사람이 그립고 그 때의 꿈들이 소중한 것이지, 그 때의 울타리는 싫었다.^^;
- 존호 송별회에서의 말말말, 2003/09/27


하긴 그간 조금은 바쁜 척을 해가면서 제대로 못만나고 이야기 나누지 못했던 우리들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바빠서 함께 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힘들어질 것이다. 다양한 곳에서 열심히 살다보면 고등학교 친구들의 가치는 자꾸 희석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 한잔에 떨어진 빠알간 잉크 한 방울이 컵 하나를 붉게 물들이듯이 상당히 많은 물을 부어야 그 붉은 기운을 없앨 수 있으리라. ‘중어과 친구’ 라는 잉크 한 방울의 저력을 나는 믿는다. - 송년 모임에서의 믿음 한 조각, 2003.12.24


<그 밖의 출처와 시기가 불분명한 잡담들...>

(어떤 사물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양팔저울 할래... 맨날 양쪽에서 시달리지만 끝내는 균형을 잡고 마는 양팔저울의 뚝심을 본받을래. - 메신저 채팅 中

세상을 썩었다고 욕하기는 쉬우나 티끌만큼이라도 바꾸기는 어렵다. - 익구의 지론임^^;


우리 실컷 고민해보자. 비록 얻는 것이 쥐꼬리 만해도, 남는 것이 코딱지 만해도... 인생을 그냥 날로 먹으려 드는 것은 너무 치졸한 것이잖아...^^ - 쪽지 대화 中


자기 의견을 감춰가며 친구들을 위한다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배신”쯤에 지나지 않을까요? 제 의견은 ‘옳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 2002 수능에 대한 논란 中


뭐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라고 새삼 믿고 싶다우... 때로는 뒤로 가기도 하고 멀리 돌아서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앞쪽을 향하고 있다고 말이오... 그래서 늘 희망이라는 녀석을 놓지 않고 있다네... - 익구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내준 말^^;


현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자비할 뿐이다. 낭만과 서정 뒤에 숨기보다는 현실의 평범함과 냉혹함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눈을 갖기 위해 노력하지만... 나의 이상은 언제나 현실과 협상 중에 있나 보다...^^; 다만 나의 청년시절이 아쉬움이 많이 녹아있는 과거처럼... 지나지 않게 하고 싶을 따름이다. - 어딘가 썼던 잡글 中


내 개인적인 견해는 선한 행위라는 개념이 차차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해... 이건 개인주의적 도덕과도 연관된 것인데... 자기 맡은 분야의 일을 책임지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충분히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나는 믿거든... 불굴의 투사정신이나 숭고한 희생정신만을 선한 행위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니까 적극적 선, 높은 기준의 선에서... 소극적 선, 낮은 기준의 선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생각해... 뭐 실제로 세상이 그 쪽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현상에서... 조직과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전통적인 선 개념에서... 자기 일 책임지고 남에게 피해만 안 끼치면 된다는 소극적인 선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 현상이 점차 심화되고 있고... 아마 그렇게 역사는 진보할 것이라고 예상된다우...
- 메신저 채팅 中, 소극적 선 혹은 보통선의 개념은 익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임^^


합당한 비판과 부당한 비판의 경계는 언제나 논란이 있기 마련이지만... 두 가지 기준 정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과거에 어떻게 했는가와, 지금 현재 다른 존재에게는 어떻게 하는 가를요. 가령 언론의 비판에 대해서 따져보면 과연 김영삼에게 던졌던 비판의 수준과 동일한가, 또 현재 한나라당과 극우세력에게 던지는 화살과 비슷한가... 이런 것들을 따져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너무 넉넉하고 노무현에게는 너무 매섭다고 충분히 느껴져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것도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 대통령 탄핵 때 메신저 대화 中


뭐 어쨌든 님의 견해를 존중합니다. 제 편이 오버할 수도 있겠죠. 결국 우리는 모두 편협한 의견을 펼치고 있습니다. 남의 편파성을 꼬집는다고 자신의 혜안과 지적 우월함이 드러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우리의 입장 차이를 확인했으면 부지런히 서로의 입장이 더 적실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면 될 일입니다. 너무 욕하느라 힘 빼지 마세요.^^
- 열나게 노무현 비난하는 글에 화딱지 나서 쓴 리플 내용 中

Posted by 익구
:
다음은 37대 경영대 학생회장으로서의 한해를 마무리 지은 익구의 퇴임인사 "37대 경짱 이제 물러갑니다^^" 전문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경영대 학우 여러분!

37대 경영대 학생회장 경영학과 02학번 최익구입니다. 제가 학생회장으로서 학우 여러분들을 대하는 것이 이제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한 해 동안 제게 맡겨진 책임의 무거움을 이제 덜어놓게 되었습니다.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아 죄송스러운 마음이 가득하고, 아직도 아쉬움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제 미천한 역량을 다해서 경영대의 살림을 챙겼습니다. 이제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것으로 실현되는 의회 민주주의 이어달리기 선수로서의 제 역할이 다했습니다.


그간 못난 학생회장의 잔소리 들으며 이런저런 잡무에 시달리신 학생회 일꾼과 각 반 일꾼을 비롯한 많은 후배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어찌 보면 엄청 귀찮고 짜증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늘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각종 행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학생회 일꾼에서 물러납니다. 혹여 제 불찰로 걱정을 끼쳐 드리거나 제 게으름으로 불편하게 해드린 점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


저는 대학 새내기 입학 전에 학생회 일꾼 생활을 시작했으니 학생회 일꾼 생활만 3년째입니다. 그동안 제가 가졌던 의문들과 불만들을 해결해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제 역량의 부족으로 많은 것을 실현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학생활의 재미와 보람을 학우 여러분을 위해 작은 보탬이 되는 것에서 찾았다는 점은 늘 감사히 간직할 것입니다. 늘 일하기 바쁘다는 핑계로 고마운 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넉넉한 여유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살갑게 인사하며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경영대 학우 여러분!

떠나는 자리에서 특히 제가 책임지고 준비했던 2004 새터의 주인공이었던 04학번 여러분들이 특히 생각납니다. 대학 새내기로서 즐기는 이런저런 행사들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 같아 늘 죄송스런 마음뿐입니다. 04학번 여러분들의 입학을 축원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이제 선배가 될 준비를 하는 여러분들을 보며 반갑고 고맙습니다. 04학번 여러분들 모두가 늘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03학번 여러분 이런저런 악조건 속에서도 못난 사람 도와주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경영대는 대학 새내기 위주로 모든 반활동이 진행되고, 바로 윗학번만 되도 일선에서 물러나 행사의 준비나 조직에는 참여를 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많은 학우들이 반활동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04학번 후배들을 챙기고 선배님들과의 가교 역할을 든든히 해준 여러분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제 임기가 끝날 때까지 제 곁에서 도와준 열려있고 쉽고 낮은 37대 경영대 학생회 일꾼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 모자란 저를 도와주느라 본의 아니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빼앗아 정말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 빚은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제가 맡은 첫 행사였고 가장 걱정도 많이 했던 2004 새터의 주역이신 2004 새터준비위원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또한 04년도에 반일을 맡으셨거나 맡고 계신 여러 대표님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 인사드립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경영대 학우 여러분!

다소 감상적이 될 수밖에 없는 고별의 인사에서 지난 3년 간의 학생회 일꾼생활을 걸고 간곡한 청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국가보안법 폐지를 지지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저는 자유주의자입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만이 북한의 폭압정권을 궁극적으로 이기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들께서 국가보안법 폐지에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지난 암울했던 시기에 억지 혐의를 뒤집어 씌워 끌고 간 뒤 칠성판에 눕혀 고춧가루 물을 먹이고, 성기 끝에 전기줄을 연결해 온몸을 지져대고,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를 강제했던 인권유린의 기억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때 많은 이들을 범죄자로 만들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렸던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서 진정한 민주국가, 인권국가로서의 우리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들먹거리면서 인권을 유린하고 호의호식했던 자들이 국가정체성을 들먹이고, 색깔론적인 공세를 할 때에도 국가보안법 폐지가 옳은 일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해주시기 바랍니다. 군부독재에 기생하고 민주주의 열망을 탄압했던 자들이 다시는 역사의 주무대에 서지 못하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지난 3년 동안 비운동권 학생회 일꾼을 자처했고,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불개입을 원칙으로 했던 37대 경영대 학생회이지만 마지막으로 이 말씀만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너그러이 양해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경영대 학우 여러분!

저는 35대 총학생회, 36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36대 경영대 학생회, 37대 경영대 학생회, 38대 경영대 선거관리위원회로 이어진 지난 3년 간의 학생회 일꾼 생활을 이제 접고 또 다른 인생의 보람거리를 찾는 중입니다. 우선 하고 싶은 것으로 연애(소개팅 환영!)와 역사기행, 독서 등이 떠오릅니다. 비록 저는 물러가지만 제가 맺은 소중한 인연들은 절대 잊지 않겠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기를 바랍니다. 혹시 온라인 상이나마 저와 교류하시려면 www.ikgu.com이나 www.cyworld.com/liberal 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 간의 일들을 마무리하는 내내 도덕경 2장의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란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서 살지 않는다”, 즉, “공을 쌓아도 그 공을 주장해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 임기 중에 쥐꼬리만큼 이룬 것들이 있더라도 그것이 마치 저만의 공인 것처럼 자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떠나는 마당에 자꾸 제가 한 일을 들먹이며 뿌듯해 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해주신 분들에게 참 고마웠다며 충심 어린 감사 인사를 나누고, 정을 담은 술 한잔을 건네야겠습니다.


이제 저는 물러갑니다. 저란 녀석이야 금세 잊혀지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지만 제 작은 노력이 여러분들의 대학생활에 자그마한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대성공입니다. 선배님, 동기들, 후배님들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괜히 침 흘리지 말고, 하나둘 저란 녀석을 잊어가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서서히 지워지는 저를 발견하며 고독 속에서 저를 되돌아볼 여유를 가져봐야겠습니다. 버려서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서 자유로운 모습으로 학우 여러분들을 만나겠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무능한 녀석이 경영대 한 해 살림을 맡았습니다. 늘 부족했지만 열려있고 쉽고 낮은 37대 경영대 학생회에 대한 학우 여러분들의 격려와 성원에 힘입어 조금씩 채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가슴 깊이 고마웠습니다. 함께 해서 정말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딛고 있는 자리에서 치열하시고, 자유로우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 [憂弱]


열려있고 쉽고 낮은 37대 경영대 학생회 물러갑니다.^^

딛고 있는 곳에서 치열하시고 자유로우시길!

Posted by 익구
:

선거시행세칙 55조 1항(전체 투표율이 50% 미만일 경우 재투표를 실시한다)을 삭제하자는 최익구 경영대 학생회장의 수정안에 대해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최 회장은 “현실상 50% 이상 투표는 무리가 있다”며 “무리하게 선거 마지막 날 학생을 동원하기보다 50% 미만일 경우에도 개표를 가능하게 하자”라고 말했다. 이에 조영관 정외과 학생회장은 “50% 이상 투표라는 것은 형식적 요건이 아니라 최소한의 대중의 지지”라고 말했다. 위 수정안은 찬성 3명, 반대 37명, 기권 6명으로 부결됐다.
- 고대신문, 2004. 11/01 1491호 2면 기사 中


생각지도 않게 고대신문에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압도적 부결로 끝난 사안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사를 실어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다소 전달이 제대로 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기자 분께서 수정안의 내용을 정확히 보시지 않아서 다소 오해를 하신 모양이다. 나는 현실상 50% 이상 투표가 무리가 있다는 쪽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았다. 50% 투표율 규정이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회원의 선거권 행사를 강요하는 의미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50%가 안돼서 지루한 연장투표를 하는 것은 현상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원칙의 문제였다.


[총학생회 선거시행세칙 개정 발의]
발신: 37대 경영대 학생회, 경영 A반 학생회
수신: 37대 중앙운영위원회, 전체학생대표자회의

<개정 대상 총학생회 선거시행세칙>
제55조 (재투표)
제1항 전체투표율이 50% 이상이 안될 경우 재투표를 실시한다.
제2항 재투표는 일주일 안에 실시하며 선거운동은 하지 않는다.

<현행 선거시행세칙의 문제점>
유권자의 반 이상이 참가한 선거에서 뽑힌 당선자에게 대표성을 확보해주려는 취지는 충분히 동감한다. 그러나 과반수 투표율로 형식적 대표성을 갖추려고 하는 것은 투표소로의 동원, 좀 더 넓게는 정치적 동원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선거권, 피선거권은 총학생회 회원의 권리이지 강제된 의무는 아니다. 50% 투표율 규정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회원의 선거권 행사를 강요하는 의미로 작용할 수 있다. 즉 투표하지 않을 권리를 제약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미 제54조 재선거 조항에서 투표참여자의 의사가 오차 없이 반영되도록 한 것이 규정되어 있고, 개정 원안의 제38조 제1항에서 투표일을 2일에서 3일 이내로 변경한 만큼 제55조의 재투표 조항은 개정을 검토할만하다.

학생회 선거에서 기권하는 행위는 개인이 선택하는 영역이다. 학생회 선거에 무관심한 사람이 연장투표를 하는 선거관리위원들이 안쓰러워서나 집요한 투표 권유에 마지못해 투표를 할 때, 이는 회원들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수렴하려는 선거제도 본연의 취지에 맞지 않게 운영되는 것이다. 학생회가 이렇게 꾸려졌으면 좋겠다는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투표한 유권자의 한 표가 계속되는 투표 권유로 말미암아 투표한 유권자의 한 표에 희석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투표율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유권자들의 선거 참여는 존중되어야 한다. 50%라는 산술적 규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유권자의 자유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선출투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율 걱정보다는 공정하고 성실한 선거관리에 힘을 쏟는 것만으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수정안>
선거시행세칙 제55조를 삭제한다. 이상 끝.


회칙개정을 위해 열린 임시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이하 전학대회)에 제출한 수정안이다. 총학생회 선거 투표율이 50%가 되지 않으면 개표를 할 수 없고, 연장투표를 통해 50%를 달성한 후에만 비로소 개표가 가능하게 된 근거인 선거시행세칙 55조(개정원안에서는 56조)를 삭제하자는 내용이다. 실제로 2003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투표율이 50%에 미달해 2004년 3월에 재선거를 치르는 난리를 겪기도 했었다.


나는 2003년 11월에 있었던 37대 총학생회 선거를 관리하며 이미 회칙개정을 생각했다. 3일째 저녁까지 이어진 연장투표에 경영대 선거관리위원들 중에 상당수가 50% 규정에 회의를 나타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며 선관위원들을 다독였지만 결국 경영대 투표함은 다른 단과대보다 몇 시간 일찍 접고 철수해야했다. 더 이상 선관위원들의 항의를 묵과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 선거에서 경영대 투표소가 일찍 철수한 것보다 더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의대, 간호대 지역에서는 투표소가 설치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공대 지역 투표소에서는 오차가 너무 커서 수백표가 무효처리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분명 투표관리가 길어짐에 따라 벌어진 문제였을 것이다. 이런 일을 겪으며 투표율 50% 규정에 대한 나의 불만은 쌓여져갔다.


전체 투표율 50%를 깎아먹지 않기 위해서 경영대 다섯 개 반을 총동원해 투표 독려를 해서 41% 정도의 투표율 정도를 보였다. 어느 친구는 왜 기권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냐며 역성을 내기도 했고, 마지못해 투표를 하려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기표대에 들어가기 전에 몇 번을 찍으면 될지를 선관위원에게 묻는 진풍경도 이어졌다. 선관위원 상당수는 다섯 개 반에서 차출되어 어쩔 수 없이 투표소를 지키고 있었지만 왜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어야하는 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번 회칙 개정 발의는 사실 내 개인의 의사와 더불어 당시 선관위원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내 개인의 의사라면 아마 실제 회칙 개정 발의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시 전학대회가 있는 날 이런저런 일로 바빴고, 결정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친구인 정규가 휴가를 나와 만나서 달콤한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국 안될 것이 뻔한 수정안을 제출한 것은 지난날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이것으로 당시 선관위원님들의 노고에 대해 보답이 되었다면 좋겠다.


당시 선관위원이었고 현재 A반 학생회장인 은애와 이야기를 해서 함께 발의한 이 수정안은 찬성 3, 반대 37, 기권 6으로 부결되었다. 은애양이 개인 사정으로 참석을 못했으므로 나 혼자 찬성을 던지고 반대가 45표 나오는 상황도 예상했는데,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가결에 대한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너무 기정사실화 한 나머지 건성건성으로 발제를 하고 질의응답과 찬반발언을 한 것이 아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준비해봤을 것을 그랬다.^^;


사범대 학생회장님은 연장 투표를 통해 바쁘게 살다보니 투표 기간을 놓친 학우들이 보다 더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과연 그렇게 바쁘게 사는 학우들께서 사물함 신청 기간을 깜박 잊어버리거나, 쪽지시험이나 자잘한 과제물에 대비하지 않거나, 각종 밥 약속들을 수시로 까먹을 것 같지 않다. 또한 기득권 세력인 학교와의 대치 국면에서 억압에 맞서 싸우는 존재로서의 학생회에게 그만큼의 대중적 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일단 학교측과 학생회측이 사생결단의 적수 혹은 기득권과 약자의 대립 구도라는 데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이 구도를 인정하지 않으니 대중적 지지 어쩌고 하는 것도 다 설득력 없는 이야기다.


압도적 부결로 끝이 난 뒤 미술학부 부학생회장님께서는 내 문제제기에 깊은 동감을 표해주셨다. 간호대 학생회장님께서는 내 의견에 제법 공감을 가지는 대의원들이 많았다며 격려해줬다. 평소에 교류하는 대의원들과 물밑 접촉을 했다면 찬성표를 좀 더 얻어낼 수 있었겠지만 2/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되는 회칙 개정안을 통과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관계로 일체의 로비(?)는 하지 않았다.^^;


내 학생회 일꾼 3년을 정리하는 마지막 정치적 로망(?)이었던 50% 규정과의 싸움은 내 자신의 귀차니즘으로 싱겁게 막을 내렸다. 50% 투표율 규정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회원의 선거권 행사를 강요하는 의미로 작용할 수 있으며, 투표율 50%와의 투쟁이 되어버린 현재의 총학 선거판에서 실제로 무언의 압박이 되고 있다. 선거에 참여한 유권자들의 자유의사가 최대한 반영되는 것이 맞다면, 참여한 사람들 간의 치열한 논쟁과 토론을 통해 다수표를 획득한 사람이 일정 기간 권한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하는 의회 민주주의의 원칙을 신뢰한다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투표소로의 동원, 가치 희석화 등의 표현은 고종석 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정치적 무관심이나 투표의 기권 그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느 정도 개인적 선택의 영역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이 마지못해 투표를 할 때, 그 행위는 공동체의 의사를 수렴한다는 선거제도의 존립 근거를 해칠 수 있다. 예컨대 이 사회가 이런 식이었으면 좋겠다는 10의 욕망을 가진 개인의 한 표가, 사회가 저런 식이었으면 좋겠다는 1의 욕망의 한 표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생각을 지닌 개인의 한 표에 의해 상쇄되는 것은 매우 불공정하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사회의 운행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굳이 투표소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고종석, [자유의 무늬](2002), 개마고원 刊, 20쪽


선출 투표는 참여한 사람들의 의사의 총합이 반영되면 그만이다.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선출된 대표자에게 승복해야 하는 것이 의회 민주주의의 룰이다. 기권의 자유 혹은 선거 무관심의 권리는 이미 승복하겠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파시스트라면 민주주의 자체를 거부할 테니 논의에서 제외한다. 또한 기존 후보들이 자신의 의사를 대변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대리인 비용 자체를 치르기 거부하는 사람이니 논의에서 제외해야 할 것이다. 여하간 이런 판단 하에 “최소한의 대중의 지지” 등의 주장에 동감하지 않는다. 50% 투표율로 형식적 대표성을 갖추려는 것도 억지스럽다. 문제는 억지스런 동원이 참여의 확장으로 착각되지는 않나 하는 우려다.


투표율 50% 규정이 정치적 동원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처럼 임시 전학대회 자리 자체가 정치적 동원의 성격이 짙었다. 회칙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의사정족수 46명(전체 대의원 69명의 2/3 이상)을 채우기 위해 다음날 시험을 위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겨우 불러내고, 아픈 사람도 붙들어 놓아서 겨우 46명을 딱 채워 회의를 속개할 수 있었다. 물론 전학대회는 중요한 자리고, 회칙 개정도 책임감이 막중한 업무다. 그러나 이렇게 거의 인신구속 수준의 회의를 통해 해치운 회칙 개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50% 투표율을 쥐어짜 얻어진 형식적 대표성이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14년만의 회칙 개정이었고 진일보한 내용도 많이 담겨져 있었지만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나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찬성 36/ 반대 1/기권 9).


하이에크는 케인즈 경제학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에 케인즈의 오류를 지적했고, 사회주의가 득세할 때 사회주의가 반드시 붕괴한다고 외쳤다. 오랜 기간 그는 갖은 비판을 겪었지만 1970년대 케인즈의 이론이 허점을 보이며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죽기 몇 년 전에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것도 지켜보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아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버지,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구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이에크는 『거 봐, 내가 뭐랬어!』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나는 내 제안이 시기상조였을지는 몰라도 머지 않아 내가 뭐랬어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누차 강조하지만 개인 선택의 영역을 강제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올해 총학생회 선거가 50% 규정에 숨이 차서 연장투표와 함께 투표 강권이 학내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광경은 끔찍하다. 정치적 동원이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자유의사에 반하는 것을 두 번 세 번 권할 때 그것이 동원이 된다. 의도했던 행위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해도, 그 행위로 유도하려는 시도가 적정 수준을 넘어가면 동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선의가 충만해서 권유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불편하다면 그것이 동원이다. 가령 열혈 개신교도들이 성경 공부를 권하는 것은 그 지극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지겨운 일이다. 그들은 내가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있는 것에 안타까워하겠지만 말이다.


학생회 조직이 앞으로 계속 쇠락한다면 학부 총학생회 선거의 위상이 대학원 총학생회 선거 수준으로 전락할지 모르겠다. 설마 그렇게 까지는 안된다고 해도 꽤 비슷해질 개연성이 있다. 50% 규정으로 그것을 막는 시늉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미 시대가 학생회 같은 조직으로 단결하기보다는 제 입맛에 맞는 곳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 전현직 학생회 일꾼들이야 못내 섭섭하겠지만 이것은 개인적 감상과는 별개의 문제다. 물론 이런 아쉬움은 남는다. 마음놓고 개인주의 문화를 만끽해도 될 만큼 사정이 나아졌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세상사의 모든 일들이 따져보면 전환기이고, 과도기이기 마련이지만 분명 오늘날의 학생사회는 크나큰 변혁에 직면하고 있다. 도가적 감수성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변혁을 인위적으로 교정하려는 것은 덧없는 일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
흔히 나를 보고 정치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내 누리집(홈페이지)을 다녀간 상당수의 손님들도 내게 그런 평을 내리기 일쑤다. 이러한 평이 얼마나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내가 가진 한 표의 권리를 소중히 행사하고 의사결정과정을 바라보며 혹시 삽질을 하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 굳이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색이 짙은 것이라면 기꺼이 그런 평가를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정치적 언동이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책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마 나의 죄목은 적당히 모두다 욕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만 너무 욕한 것에 있지 않을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지난 몇 년간 한나라당을 구박한 무수한 말글들을 보면 내 고약한 심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또한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이 생산적인 논쟁보다는 나란 인간에 대한 막연한 편견의 벽을 쌓게 하는데 일조하지 않았냐는 생각이다.


최근에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한다고 외치면서 나란 녀석의 표지 중에 우리당 지지자라는 강력한 낙인을 찍기도 했다. (한 친구는 내 홈페이지에 잠깐 들어섰던 열리우리당 로고를 본 후에 익구닷컴에 발길이 끊어졌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나이지만 내가 믿고 지지하는 바를 밝히는 것에서 오는 불이익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기실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애초부터 불이익을 감수해야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표현의 자유에도 비용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도한 비용 지출을 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는 어느 정당의 지지자이거나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내는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편파적일 권리를 가진다. 다만 그 편파성이란 타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이름지어지는 것일 뿐, 그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상식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옳고 내 가치가 보다 적실성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타인의 눈에는 내가 편파적일지 모르지만, 내 자신이 보기에는 나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논거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다고 믿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만큼이나 타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이며, 생각의 자유를 주창하는 자유주의이며, 다양성을 긍정하는 다원주의이다. 내 방식이 옳고 재미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자유지만, 마주보고 있는 저 친구의 세계관과 행동양식 또한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다만 자신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나머지 객관적 사실도 왜곡하고, 명백한 오류를 시인하지 않는 오만을 부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몇 가지를 경계하면 우리는 “인간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관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 내부에 있는 개성적인 것을 모조리 마멸시켜 하나같이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고려해서 부과된 범위 안에서 그 개성적인 것을 육성하고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익구라는 녀석의 당파성 혹은 정치적 견해란 무엇이길래 이렇게 정치에 관심이 많다느니, 정치색이 짙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하는 것일까? 대개는 노무현 지지자, 노사모, 우리당 지지자로서의 딱지만을 붙일 뿐이다. 익구를 아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란 인간의 다른 가치를 보여주지 못한 나의 나태함의 탓이 크겠지만 그런 딱지 하나로 나를 평가하는 분들께도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익구가 그런 대외적 지지를 표명하기까지 어떤 논거를 제시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과는 관련 없이 일상생활 속에서 익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는 크게 전달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스스로의 필요성에 의해서라도 다음과 같이 익구 생각의 고갱이를 정리해보겠다.


첫째, 익구는 자유주의자로서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상도덕을 준수하는 것을 신조로 한다. 여기서 상도덕이란 모든 종류의 시장에서 룰을 준수하며 공정히 경쟁하기, 자기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 평가와 그에 따른 적절한 책임지기, 비용의 균등한 분담과 채무관계의 정확한 기록과 확실한 변제 등을 삶의 원리로 하는 것이다. 물론 유능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합당한 보상받는 것은 중요하다. 능력과 노력의 차이를 보상의 차이로 대응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영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역사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시장의 승리자에게 응분의 보상이 주어지는 정당한 불평등이 때로는 우리의 미감을 거스르더라도 게임의 룰을 지켰다면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고종석 선생의 지적대로 덤의 보상에는 절제가 수반되어야 하고 그것이 평등감각과 정의감각에 합치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집단의 선택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이상 국가나 집단이 그 개인의 결정에 감놔라 배놔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자유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와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자유선거에 의해 권력자를 선출하는 의회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다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믿고 지지한다. 익구가 바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은 사실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자유권들이 제대로 실현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법적 가치만 제대로 발현된다면 딱히 욕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상과 양심을 구속하는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본적으로 추구한다고 했을 때 경제적 자유주의는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광풍이 자본의 횡포를 조장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고, 정부가 적절한 개입으로 이를 방어하고 부당한 차별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정치 영역과 마찬가지로 경제활동의 자유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정부의 쓸데없는 규제는 철폐되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 오늘날 험난한 세계화의 파고에 대응하는 생존수단이 될 것이다. 광신적 시장론자들은 질색이지만 WTO, FTA 같은 자유무역질서를 부인하는 것도 어리석은 처사다. 다만 개방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도록 부지런히 방벽을 쌓아야 한다.


둘째, 익구는 개인주의자로서 집단에 피신하지 않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남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나는 타인과의 차이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차별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개성의 향연을 누리면서도 그런 개성들 사이에 현저하게 다른 가치가 부여되지 않도록 하는 세상이다.


또한 내 자신이 이기적 효용함수를 가졌으며, 이타주의적 희생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을 천명한다. 미국의 철학가,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말처럼 “난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 살거나 다른 사람더러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라는 전체주의적 억압에 콧방귀를 뀔 것이다. 또 집단의 이름으로 내 개인이나 다른 개인의 이익이 심하게 훼손될 때 언짢은 소리하는 것을 크게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소수파가 되었을 때의 불편함과 두려움을 다수파가 되어서도 잃지 않는 양심적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모든 면에서 다수파일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소수파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개인주의가 내세우는 똘레랑스는 일종의 보험이다. 물론 남과 다른 것에 마음을 열어야하는 보험료는 그리 싼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보험료의 부담쯤이야 마음 편히 소수파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보험금의 혜택에 비추어볼 때 확실히 남는 장사로 보인다.^^: 이처럼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며, 궁극적 소수로서의 다른 개인과의 연대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양성평등의 실현을 위해 힘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 것은 자유주의 미감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사실 내가 양성평등을 입에 달고 있는 것은 여성의 권익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내 멋대로 살고픈 참을 수 없는 자유주의적 열망 때문이다. 결국 남을 도우려는 것이 아닌, 내가 편하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의 발로이다.^^


부당한 불평등의 대표주자인 여남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의 권리신장과 기회균등을 위해 남성으로서의 쥐꼬리만한 기득권도 내어줄 용의가 충만하다. 나는 양성평등한 사회가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이로움을 가져다주며 사회전체적인 후생도 증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라는 거짓된 이데아가 지배하는 세상의 숨막힘이 정말 싫다. 이러한 폭압적 구조 하에서 나는 남는 장사를 벌이지 못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남자다운 ‘척’ 하는 비용을 다른 곳에 투자하고 싶은데, 투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의 불편함이 양성평등을 외치는 이유다. 페미니스트라는 수사학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오해받기 십상인 세태이지만, 혹시라도 내게 그런 혐의가 씌워진다면 기꺼이 자수하겠다.^^;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즘보다는 양성평등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쓰고 있지만 말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양성평등은 남자인 나를 위해서이니까 말이다)


넷째, 익구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방법론으로 삼는다.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할 생각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실현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악,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애쓰라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뜻이다. 즉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식의 목적의 왕국인 셈이다.


추상적인 이상에 대한 합의는 참 어렵다. 특히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나로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쪽으로 끌어온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서로간에 차이점을 확인하고 시사점을 발견해서 자기교정의 계기로 삼는 것으로 그치기 일쑤이다. 내가 혁명의 열정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이 무지막지한 차이의 세계를 하나의 구호로 묶는 것에 자신이 없다는 소심함의 발로이다. 또한 설혹 어찌어찌 해서 꾸려진 유토피아가 개개인의 효용을 극대화시켜 줄지도 매우 의심스럽다. 그래서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만 악에 대한 인식이 같다면 이를 오늘의 시점에서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는 너무 매끄럽지 못하고 두루뭉술한 수단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매끈함을 핑계로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내 성격이 특별히 모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계적 중립성에 나를 묶어두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나와 교류하는 모든 이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교적 분명히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려고 노력했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생채기 받는 것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럼에도 나를 아프게 하는 비판이 있다면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데, 너의 생각이 모든 사람의 생각인양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이다. 한 번은 나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침묵은 동의에 불과하니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여전히 침묵은 유효한 보신책이며 최상의 방책이다.


나는 내 의견이 여러 가지 정황을 분석해볼 때 비교적 타당하다고 주장을 하겠지만, 내가 전적으로 옳다고 오기를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지만, 이를 틀린 의견이라며 구박하는 이들을 적당히 방어할 것이다. 파시스트가 아니라면 나와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해 조금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사안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이걸 못 참는 자들이 사상의 자유시장에 득시글댄다면 시장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 우리의 부싯돌은 부딪힐수록 빛이 난다는 볼테르의 말을 상기하자. 생각끼리 부딪히지 않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암흑에 불과하다.^^;


“네 말마따나, 지금 네 정도의 성향도 극렬 좌파라 오해받는, 명문대 경영학도들의 무관심과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너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너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게 아니길, 이 정도도 오해받는데 더 반대편으로 기울면 어떻게 하지 소심해하는 게 아니길 바란다.”


날라리 우파 정도의 위치잡기(포지셔닝)를 한 내게 한 선배께서 위와 같은 충고를 해주셨다. 하기야 내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옹호 정도를 역설해도 불온하거나 극단적이라고 보는 눈초리들이 차고 넘쳤다. 나는 오른쪽으로 많이도 아니고 욕먹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어왔고 내 자신이 온갖 눈치를 동원하는 소심한 녀석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특이한 녀석으로 취급되고 백안시되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다. 바쁜 세상에 내 의견을 꼼꼼히 들어줄 필요도 없고, 내 논리를 면밀히 검토해서 반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느긋함을 보여줬으면 한다.


익구는 앞으로도 사회 의사결정과정으로서의 정치의 다양한 모습들에 관심을 가지는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이다. 앞으로도 바지런히 눈치를 보고 살겠지만, 때로는 내 사상과 양심에 비추어 ‘편들기’를 마다하지 않겠다. 내가 늘 감수하겠다고 하지만 오해받는 두려움이 달콤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늘 무척 쓴맛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려야 했지만 앞으로도 그 씁쓸함이 내 곁을 떠나지는 않을 것 같다. - [憂弱]
Posted by 익구
:
익구에 대한 말말말은 앞으로도 계속 됩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과 따스한 질책 부탁드립니다.^^


95년도에는 더욱 남자다워지기 바라며
새해에는 좀 더 남자다워지겠니?
5학년 때 공부 열심히 하고 좀 남자처럼 행동을 했으면 좋겠어
- 초등학교 성탄절 카드에 적혀있는 남성성 강요의 압박^^;

I like you. - 초등학교 시절 받은 연애편지(?) 中

너는 너무 착해. 여자애 같아. 하지만 아주 조금은 남자답게 굴어. - 다른 연애편지 中

밤에 잠잘 때 눕기만 하면 천장에 너의 모습이 어른거릴 꺼야. - 또 다른 연애편지 中

익구야 너만큼은 외제품을 쓰지 말아라. - 중2 크리스마스 카드 중에 뜬금없이...^^;

너는 왜 웃기만 하니? - 중2 때 한 친구

제발 나중에 커서 크게 사기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게. 그게 제일 걱정이다.
- 중2 때 절친하던 친구의 간곡한 인생 충고^^;

내가 익구처럼 공부했으면 세계 초천재가 되었을 텐데...
-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던 우등생 친구가 공부량에 비해 성과가 떨어지는 익구를 아쉬워하며

너는 외고를 가기보다는 도덕고등학교를 가야한다. 다만 아직까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외고 진학을 결정하고 나서 고지식하고 원칙에 얽매인 나를 핀잔주며 중3 친구가 한 말

자라, 거북이, 코알라, 간디, 원숭이... 합해서 자거라디이 같으니라구...
- 익구를 닮은 것 5개를 엮어 별칭을 지워준 한 친구

He is a cute boy.
- 고등학교 1학년 영어회화 선생님께서 나를 지칭하시며...^^; 대략 점수 잘 받았다. 푸하하

똘레랑스하고, 당당하고, 배워서 남주는 날애의 희망 전사가 되자꾸나.
- 서울외고 교지 편집부 날애 담당 선생님의 편지 中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구로도 당신의 그 찬란한 소중함을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 연애편지 아님, 어디까지나 고2 때 크리스마스 카드에 기재된 내용

너를 보면 청학동 댕기동자가 연상되지 뭐야... - 세이클럽 채팅 中

‘고답적(高踏的)’이라는 말은 너를 위한 단어다. -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고답적이라는 단어를 보며 감격해서 외친 한 친구

언젠가 익구와 친구였다는 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다닐 날이 올 것 같군.
- 서울외고 6기 중국어과 동창회 아시수(我是誰) 댓글 中

항상 익구가 쓴글을 보면 괜히 심오해져~~ 생각도 많아지구~~ ^^ - 역시 아시수 댓글 中

익구야... 너 사람 진지하게..웃기게 하는구나... - 아시수 댓글 中

익구 글을 보면 언제나 느끼는 건데... 한 50~60대 노작가가 쓴 수필 같아...--;; - 아시수 댓글 中

익구야 니 글을 보면 왜이리, 꼬리 달리가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ᄏᄏ - 아시수 댓글 中

익구는 확실히 프론티어 정신이 있는 것 같다. 다만 남을 돌아보면서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 아시수의 익명 게시판

참 올리기 힘든 글이었지만 소신이 있는 익구이기에... 다수의 횡포가 그에겐 두렵지 않을듯... 저는 익구를 정말 존경합니다... 앞으로도 사회를 위해 할말은 할 줄 아는 그런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시길...
- 수능 혼란 때문에 모두들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글을 올려 구박받고 있을 때 한 친구가 격려해주면서

익구는 이런 거 쓰는 게 인생의 낙이니까 우리가 이해하자...
- 한 친구가 잡글 즐겨 쓰는 나를 두고 한 말

이제 노무현 타령 좀 고만하자 익구야 진심이란다
- 2002 대선이 끝나고 나서 한 친구가 그 간의 노무현 타령에 질렸다며

한마디를 안질라고 그러는구나 익구 - 온라인 상에서 논쟁을 벌이던 한 친구가

너는 아무리 봐도 경영대생보다는 정경대생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경영대 왜 왔니?
- 입학 이래 참 많이 듣는 질문... 늘 어쩌다 굴러 들어왔다고 둘러댄다.^^;

20년 뒤에 정치인 최익구 경력에 k대 x과 학생회장이 추가되겠군
- 경영대 학생회장 당선 후 한 친구가 밝힌 냉소적인 축하 발언

익구랑 오랜만에 말하니깐 다른 사람들과 수다 떠는 것과는 다르구나, 고등학교 때 이후로 느껴보지 못했던 것인데.
- 오랜만에 메신저 상으로 대화 나눈 친구가

익구 웬만하면 안 취하잖아. 얼마나 마셨길래, 고대가 사람 버려놨군.
- 언제 한 번 술 마시고 크게 취한 다음날 한 친구가 경악하며

익구는 술꾼에 안주킬러다. - 요즘 들어 고등학교 모임 술자리만 나가면 듣는 말

넌 대체 뭔 재미로 산단 말인가? - 잘 놀 줄 모르는 익구를 보며 한 선배가 한탄하며

배용준보다 더 깊고 그윽해 보이는 경영학도 후배
- 시민사랑 정모에서 만나게 된 어느 선배님의 과찬의 말씀

대학교 2학년이면 아주(?)젊은 나이인데 그런 정직한 생각을 가진 님께 진심으로 축복을^^
- 내가 인터넷 상에서 올린 글에 달린 댓글 中

처음에도 느꼈지만 어떤 ‘선’을 추구하려는 정직함이 보여요. 님을 글을 읽고 있으면... 생각하고는 있지만 선뜻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생각들을 최대한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들이(제눈에 보이기에) 부럽기도 하고 저도 많이 공부해야겠어요...
- 또 다른 댓글 中

생각만큼 다가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편안하고 이야기도 재미나게 하셔서 그간의 생각을 바꿨습니다. - 서울외고 교지편집부 후배

말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청산유수더군요. - 교지편집부 다른 후배

지금도 꽃미남이시죠. - 유치원 사진에 비해 폭삭 늙어버렸다고 한탄하자 한 후배님께서 격려해주며

익구에게 미적 감각을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 고등학교 선배님 mannerist

엄지손가락이 특이하네... 어쩜 이렇게 짜리몽땅할 수가...
- 익구의 엄지손가락에 대한 숱한 태클... 익구는 이런 엄지손가락이 손재주가 좋다며 응수하고 있다.^^;

김종필 외손자 같으니라구... - 한 친구가 인상착의, 목소리, 하는 짓(?)이 김종필과 닮았다며

익구는 미스터 빈을 닮았다.
익구는 우비소년을 닮았다.
익구는 김PD를 닮았다.
- 익구를 닮았다는 각종 캐릭터들...^^;

고등학생 같아 보이는데 참 동안이네요. 너무 어려 보이는 것도 좋지 않으니 염색해서 좀 나이 들어 보일 필요가 있겠어요. - 미용실 누님의 조언

회의 좀 짧게 해주세요. 어쩜 그렇게 쉬지 않고 계속 말할 수가 있죠?
- 각 반 일꾼들 모아놓고 학생회 회의만 하면 듣는 말

익구는 남자 수다쟁이다. - 회의 중 계속되는 나의 잡담을 듣던 미술학부 학생회장님이

원래 학생회장이 덩치도 크고 되게 무서우신 분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뵈니 귀여우시네요. - 어느 04학번 후배님이

익구형이랑 진짜 어울리는 단어 - ‘투덜거리다’ - A반실 익명대자보 글 中

홈피에 가서 선배님의 글을 읽다 보면... 공부할 거리가 많다는 것과 나도 많이 배우고, 공부하고, 생각해야겠다는 것을 느낀다. 알고 보면 위트 넘치는 재미난 분 ^-^ - 익구닷컴 칭찬해준 고마운 후배

글 전개하는 게 은근히 재밌게 흐름 안 끊기고 잘 쓰는 거 같아서 지루하기보다는 재밌어. 너가 글을 명작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도 없는 거고~ 읽기에 부담 없으면서 뼈가 있음 된 거지 뭐... - 익구닷컴 칭찬해준 고마운 친구
Posted by 익구
:

익구는 그간 사용하던 ‘익구청년’ 별칭을 대체할 새로운 별칭으로 ‘새우범생’을 공표했다. 이로써 지루하게 계속되던 별칭대체 논쟁은 일단락 될 것으로 보인다. 초반에 경합을 벌였던 후보들로는 ‘궤변논객’, ‘궁극범생’, ‘시비쟁이’, ‘풋선비’ 등이 있었으나 중반 이후 ‘새우’字가 들어가는 쪽으로 일단 결정되면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익구는 별칭을 만들기 위해 옛 글들을 뒤적이던 중 최근에 썼던 [다양성, 당파성, 그리고 새우등](아래 참조)이라는 잡글에서 ‘새우등’이라는 표현에 호감을 느끼고, 그것을 변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새우등’을 그냥 쓰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그보다는 조금 변형시키자는 의견이 대세였고, 이런저런 조합 끝에 ‘약동새우’와 ‘새우범생’이 최종 후보가 된다.


세상에 미국의 네오콘같은 사명감에 불타는 무식쟁이들만 있다면야 옥석을 가리기 쉽겠지만, 대개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맞서니까 무식한 학생 입장에서는 새우등만 터지는 꼴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새우등이 터지다보면 가끔 콩고물도 떨어지고 그러겠지라는 희망을 안고 오늘도 싸움 구경에 눈이 둥그래지는 수밖에.^^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의 시대에 사는 것은 확실히 정신 없고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 곱절로 흥겹고 신나는 일이다. 다양성과 당파성의 긴장 속에 내 새우등은 늘 조마조마하다.

- 익구, [다양성, 당파성, 그리고 새우등] 中, 2003/11/22


한 때 약동새우가 힘찬 느낌을 준다며 분위기를 몰아갔으나 새우범생파도 완강히 저항했고, 결정에 난항을 겪게 된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약동새우의 ‘동’字는 [똥]으로 발음해야하니 어감이 좋지 않다, ‘낭만고양이’의 조어와 유사해서 표절의 혐의가 짙다, ‘약동’이란 단어의 대중성이 의심스럽다 등의 약동새우에게 불리한 논거들이 쏟아지고, 초기 후보 중에 가장 지지가 높았던 궁극범생파가 새우범생파와 연대를 선언함으로써 결국 진통 끝에 새우범생으로 최종 결정 나게 된다.


익구는 고등학교 졸업하기까지 ‘익구어린이’라는 호칭을 즐겨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현저하게 무딘 현실감각과 유치하고 조악한 생각의 우물을 자각하고, 어릴 적의 순수한 꿈과 순박한 됨됨이를 지켜나가자는 나름대로 계산된 호칭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익구가 대학생이 되어서도 익구어린이가 퍼지는 현상이 벌어지자 익구는 ‘익구청년’으로 업그레이드를 선언한다. 이 지속적인 별칭교체 노력 덕분에 이제는 슬슬 익구청년으로 불러주는 이들도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제 자리 잡아가는 익구청년을 버리고 굳이 새 별칭을 마련해서 쓸데없이 비용 낭비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익구는 익구청년이라는 별칭은 익구어린이의 대항적 성격으로 급조한 것일 뿐 조만간 바뀌야겠다고 늘 마음먹고 있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한편 익구의 아호(雅號)인 ‘憂弱(우약)’을 더 적극적으로 쓰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그보다는 좀 더 편안하고 재미난 별칭을 하나 만들어 쓰자는 의견이 우세했고, 숱한 고심 끝에 그 성과를 보게 되었다.


익구는 새로운 별칭 선포와 함께, 딸림 구호도 함께 선보였다.


늘 조마조마한 새우등, 고래사냥을 꿈꾸다
부지런히 새우등 터지면서 열심히 배우다

 

여기저기 고래싸움을 구경하느라 새우등 터져 가면서 열심히 배우면서도 고래사냥의 꿈을 품겠다는 새우범생의 거창한 뜻이 얼마나 실현될지 주목된다. - [憂弱]

Posted by 익구
:
아직도 고등학교 졸업한 그 시원섭섭한 기분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데 세월은 부지런히 달려서 저학번 저학년으로서의 시절마저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이제 제법 대학물을 먹어서 한층 의젓해져 보이고 지금까지 부대끼며 용케도 잘 버텨준 나에 대해 스스로 대견스러움을 표해 본다. 그러고 보면 한편으로는 참 대학이라는 곳을 참 어이없이 굴러들어 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 수험생들의 대다수가 그렇듯이 나 또한 대학이나 학과를 선생님 조언에 따라 후닥닥 정해버린 학생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인지 이제 고대생으로서, 경영학도로서의 내가 쏟는 애정은 날이 갈수록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나는 수시모집 예비대학 전형으로 고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예비대학은 고대 주최 경시대회 입상자와 각 학교에서 내신성적 우수자를 추천 받아 모집한 학생들에게 고대를 홍보하고 교양강좌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이를 마친 학생들에게 수시모집에서 특전을 부여하는 것인데 운 좋게도 내가 거기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나는 한문 경시대회 장려상 입상으로 예비대학에 참가하게 된다. 경시대회 중에서 가장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취급되던 한문 경시대회에서, 그것도 가장 낮은 상위인 장려상을 발판 삼아 고대 경영학도가 된 것이다.^^; 경시대회 시상식에서 한문 경시대회는 맨 끝 순서였고, 당연히 장려상은 맨 나중에 호명되므로 나는 끝에서 몇 번째로 상을 타야했던 지루한 기다림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래도 감지덕지인 것은 민족 고대라고 해서 전통을 중시하는 학풍이 아직 남아 있다보니 한문 등에 대한 관심을 가져주고 있는 고대 덕분에 이렇게 대학생으로 안온하게 지내고 있다. (아직도 고대는 다른 대학에 비해 한문관련 강좌가 많이 개설되어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문 경시대회에 참가해서 가까스로 입상을 하게 된 과정도 참 웃기다. 고등학교 2학년 11월에 한자능력검정시험으로 3급 자격증을 딴 나는 고3 5월에 2급 자격증에 도전하게 된다. 고3 수험생의 일탈에 손가락질도 좀 받았지만, 그 때는 무식하게 한자 써대며 외우는 것 만한 낙이 없던 터라 짬을 내어 공부해서 다행히 2급 자격증을 따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고대에서 주최한 경시대회 한문분야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한자’와 ‘한문’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지만 대충 머릿속에 많이 싸돌아다니는 한자들을 조합해서 때려 맞힌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장려상 턱걸이를 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어쨌든 이로써 예비대학 참가자격을 얻게 된 나는 예비대학을 재미나게 마치고, 2학기 수시모집을 대비한 입시 전략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대학으로 고대를 꼽게 된다. 여기서 그간 은밀히 감춰왔던 비밀을 공개하겠다. 이로써 내가 어쩌다가 경영학도가 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비대학 참가자에게 학교에서 내려온 공문에는 지원가능한 학과가 배정되어 있었다. 내게는 경영대, 법과대, 문과대가 배정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워낙 법대, 법대 하는 분위기에 넘어가서 법학과를 지망해 볼까라는 마음이 조금 있었지만, 막상 기회가 주어지니 어느 정도 불리한 내신성적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곧 단념해버렸다.


법대를 제외하니 경영대와 문과대가 남았다. 평소 사회학과, 국문학과 등의 문과대 관련 학과들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처음에는 문과대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내심 정치외교학과나 행정학과가 있는 정경대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문과대를 택하려는 분위기가 마구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예비대학 전형이라는 좋은 조건까지 있는데 기왕이면 경영대에 지원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반응들이 쏟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까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던 경영학과에 대한 고민을 그제서야 시작했고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던 중에 경영학도이시던 당시 수학 과외형이 해주신 “경영학이 그리 어렵지 않고 재미난 점이 많은 학문이다” 비슷한 말 한마디에 넘어가 버렸다. 고심 끝에 빵을 위한 학문에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는 솔직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결국 예비대학은 1지망 경영대, 2지망 문과대, 3지망 법과대로 결정했고, 다행히도 1지망 경영대학으로 예비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8월 말부터는 본격적인 2학기 수시모집 시기가 도래했고, 나는 고대 경영학과를 비롯해서 연대 사회학과, 서강대 경영학부, 외대 정치행정계열 네 군데에 원서를 집어넣었다. 연대 사회학과는 어릴적 꿈이던 사회학자를 좇아서 지원해 본 것이고, 서강대 경영학부는 고대 경영대를 준비하면서 공부 범위를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특히 외대에서 어문계열도 아닌 정치행정계열을 넣은 것은 고대 예비대학 배정 대학에 정경대가 배정되지 않은 아쉬움의 발로였다. 고대 예비대학 전형은 경쟁률인 2 대 1로 고정되어 있었고, 나머지 대학들의 경쟁률은 연대가 13.86 대 1, 서강대 10.48 대 1, 외대 28.5 대 1로 확률상 고대 입성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임이었다.


나는 1차에서 연대와 외대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스레 서강대는 1차를 붙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고대의 경우는 예비대학 전형은 곧바로 2차 전형으로 직행하는 것이었고, 결국 4개 중에 2개의 대학이 1차를 붙고 2차 전형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가 일정이 빠른 터라 먼저 논술, 면접 시험이 있었고 그 때가 2001년 9월 14일이었다. 지금은 LG-POSCO 경영관까지 완공되어 여기저기 질투의 눈초리를 받고 있지만, 그 때 당시의 경영대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게다가 중앙광장 공사가 한창이어서 무척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학교 배치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2년여만에 경영관 주변 풍경들은 많이 바뀌어 버렸다.


논술 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영관 어느 강의실에 앉은 나는 통일에 대한 내용을 벼락치기로 준비하며 논술 시험을 기다렸다. 영어 제시문 등장하는 통합 논제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지만 애써 담담하려고 노력했다. 주제는 ‘언어’였고, 다행히 습작을 한 번 해둔 적이 있어서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글을 느리게 쓰는 나는 논술 시험 같이 제한된 시간에 글을 쓰는 것에 영 소질이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터라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달래며 부지런히 써내려갔다. 제한 시간에서 2분 정도 넘기기는 했지만 분량을 다 채우고, 뺏기다시피 논술 답안지를 내고 1차전을 마무리했다.


논술 시험을 마친 후 지금은 공사로 사라진 경영관 앞 매점에서 빵 한 조각과 바나나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 무거운 마음으로 면접 시험 전까지 학교를 배회했다. 그러던 중에 이비에스 방송국 인터뷰에 응하게 되어 몇 초간이나마 방송에 나오는 최초의 경험까지 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영관 본관 1층의 화장실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화장실을 들른 나는 다시 이 화장실을 들를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나만 이 유치한 짓거리를 한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발견한 ‘아무개 04학번 되어 다시 온다’라는 문구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다. 하기사 대한민국 고3 수험생만큼이나 마음 여려지고 빌기 잘하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오후 1시 학우강당에 모여 면접 순서를 기다렸다. 수시 모집 확대 원년에서 불었던 심층면접 열풍에 휩싸여 이런저런 잡식들을 꾸역꾸역 채워넣은 나는 한 보따리나 되는 자료더미들을 불안하게 넘겨보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내가 속한 조 24명중에 12번째로 면접을 보게 되었다. 별 것도 아니지만 평소 좋아하는 숫자인 12가 걸린 것에 쾌재를 부르면서도 이런 것을 짜맞추는 마음에 이내 처량해졌다. 4시가 넘어서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뒤적거리던 책과 서류뭉치를 주섬주섬 챙겨서 면접장소로 향했다. 크게 한숨을 쉬었던 기억은 분명한데 그 때의 광경을 재연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나 가공할 만한 영어 제시문 앞에 쩔쩔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실로 무거운 걸음을 옮겨야 했다. 이 문장을 해석하라는 질문에 몇 번 버벅거리다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 어쨌든 의사결정에 대한 두 상반된 견해의 영어 제시문에 대한 물음을 이것저것 답하면서 실패한 문장 해석의 상흔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영어 면접이 끝나고 이어진 기본소양 면접은 인터넷과 정치참여 등에 관한 문제였는데 당시 있었던 필리핀의 피플파워 등을 예시하며 익구 특유의 낙관적인 해법을 그럭저럭 늘어놓았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면접이었지만 놓친 영어 해석에 대한 아쉬움은 내내 나를 짓눌렀다. 그 문장에 포함된 단어 중에서 secure와 severe를 헷갈려서 해석한 것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면접은 두 분의 교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두 분은 지청, 장하성 교수님이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고대역에서 집으로 오면서 면접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갖 슬픈 척은 다하는 호들갑을 떨었다. 그 때 내게 위안이 되었던 것이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능력에 버거운 일을 맡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자신의 능력 전부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이었다. 소심한 나로서는 앞으로 이런 가슴 뛰는 두려운 일 앞에 서야될 일이 많으니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어쨌든 합격자 발표날까지 무척이나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아마도 그 날이 개천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오차는 ±1일) 휴일이라 학교 자습도 5시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자다가 대략 8시쯤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놓고 여기저기 들어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대 누리집에 들어갔는데, 이게 웬일 합격자 발표가 떡하니 뜬 것이 아닌가... 당초 공고보다 하루이틀 정도 빨리 발표가 난 것이었다. 그런데 초긴장의 상태로 보내야 할 그 순간을 너무나 허망하게도 잠결에 합격 여부를 확인하고 말았다. 아 다행스레 합격 되었구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엄마에게 한 마디... “합격자 발표 나왔는데 붙었네.” 엄마의 한 마디... “아 그래? 잘 됐구나...” 정말 너무 쿨하다 못해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그 날의 풍경이었다.^^;


어쨌든 수시 모집의 수혜자가 되어 수능시험도 별로 떨지도 않고 평안하게 해치우고, 잠시 숨 돌리다보니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내일모레면 나름대로 고학년이 되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고대라는 공간에서 얼치기 경영학도로 지내온 세월도 이제 제법 무게를 더해가려는 찰나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수험시절에 지원했던 학교 중에서 연대가 있었다. 어릴적 멋도 모르고 그려보던 사회학자의 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점수 맞춰 대충 지원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역사에서 가정을 들이미는 것은 언제나 촌스런 짓이지만 만약 덜컥 붙어버렸다면 어찌했을까. 연대 사회학도로서의 익구와 고대 경영학도로서의 익구 중에서 무엇을 선택했을지는 아직도 결론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본인은 사회학도가 되겠다는 제스추어를 보내면서도,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얼치기 경영학도의 빵을 선택했으리라는 것이 다수설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가끔씩은 지금 가진 큰 빵보다 못 먹어본 작은 빵이 더 그립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누구나 잘 빠지기 쉬운 인식 오류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소속된 고대 경영대는 ‘고대 속의 연대’라 불리우는 개인주의 문화를 자랑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여담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연대를 참 좋아한다.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연대하면 떠오른다는 개인주의 문화와 세련된 감수성이 내 코드와 맞다고 자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연대는 고대를, 고대는 연대를 닮아가고 있어서 두 학교가 비슷해지고 있다고 하니 이런 분석들도 다 옛말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 혹자들은 불평하고 괄시하지만 나는 이런 경영대의 학풍이 끔찍이도 좋다. 다만 조금 지나친 점이 있다면 다듬으면 될 일이다. 개인주의 물결이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그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 내가 부대끼는 경영대는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런 보금자리다.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겠지만, 그렇지는 않아도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딛고 있는 곳을 좋아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의 불만과 내 배움과 익힘의 조악함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그냥 너그럽게 씨익 웃어버리고 마는 것 같다. 가끔씩 녹차 한 잔 마시며 고3 수험시절의 그 뜨겁고 우습던 나를 추억하는 재미는 참 쏠쏠하다. - [憂弱]
Posted by 익구
:
1.
오며가며 여자친구 있냐는 말을 참 많이 듣는 것 같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연애를 한 두 번쯤을 겪어봄 직한 시기이다보니 그런 질문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 같다. 심지어는 눈이 너무 높은 게 아니냐는 핀잔까지 들을 정도로 같은 질문에 한결같이 냉랭한 답변밖에 못하고 있다. 늘 혼자서도 잘 논다는 말로 둘러대기는 하지만 아직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할 마음이 없는 것이 솔직한 사실이다. 여자친구 없다며 늘 넋두리하고 안달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나같이 무딘 심성으로 느긋하게 있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시콜콜한 연애상식에도 눈길 한 번 안 주다보니 무슨 냉혈한쯤으로 무시당해도 쌀만큼 그 방면에 대한 탐구가 전무했다는 반성을 해본다. 고등학교 3년 간 사랑을 주제로 고민한 것이라는 것이 고작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하는 것 정도다. 정말 진도 느리다.^^; 나는 첫눈에 반하는 것이 그 사람의 외면을 바라보고 하는 일이라는 두려움 때문인지, 첫눈에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외면에 내면이 드러나는가?”하는 문제까지 걸려들었고, 고민 끝에 내가 잘하는 수법인 중간잡기를 해버렸다.^^; 결론으로 “내외개연성론(內外蓋然性論)”을 제시했는데 말 그대로 외면에 내면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면과 내면은 별개의 것이다라고 철썩 같이 믿던 나로서는 많은 양보를 한 셈이다.^^


맹자께서도 “사람을 볼 때에는 눈동자보다 좋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눈동자는 惡을 감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올바르면 눈동자가 밝고, 마음이 옳지 못하면 눈동자가 어둡다.”(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眊焉)라고 말씀하셨다. 외면에도 그 사람의 내면이 일정정도 투영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영 마뜩지 않았던 것은 내면을 중시하고자 했던 나의 철없는 고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로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보려고 무던 애를 쓰는 꽤 괜찮은 습관이 생겼다.^^


2.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은 모든 인간은 그 정신 속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요소, 즉 남성은 아니마(여성적 영혼)를, 그리고 여성은 남성적인 아니무스(남성적 영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조화하고자 한다. 육체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있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원래 양성적이라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이성에게 투사되어 ‘매력’ 또는 ‘혐오감’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된다. 즉 남성의 경우 여성에게 아니마를 투사할 때 자기 아니마의 여성상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매력을 느끼고, 모순된 경우에는 혐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라는 시구는 그런 인간의 표현하기 힘든 무의식의 감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첫눈에 흠뻑 빠져버린다는 것, 괜시리 좋은 사람이 생기는 것, 그냥 믿고 싶은 사람이 덜컥 나타나는 것은 살다가 몇 번은 겪어보고 싶은 유쾌한 일이겠지만 융의 설명에 따르면 상대방을 보고 느끼는 황홀감이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상이라는 것이다. 조금 김이 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낭만이 아주 떨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별 이유도 없이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이제 설사 운명적으로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순순히 받아들일 정도의 마음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슬슬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안 될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도 있고 말이다.^^; 전에는 진실한 사랑은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추구하면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함께 이끌어 가는 사랑만큼이나 이끌리는 사랑, 어떤 힘에 질질 끌려가는 것도 무척 재미날 것 같다.


3.
초등학교 때 한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제법 진지하게 상담을 해왔다. (머리에 피가 넘치는 것들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나는 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설교를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관심이 있다’ ‘호감이 있다’부터 시작을 하지. 그 다음에는 ‘좋아한다’는 단어가 사용되겠고 그 다음 단계가 ‘사랑한다’가 아니겠니?”라면서 ‘사랑단계론’을 주절되면서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니. 그 단어를 함부로 쓰는 거 아니야?” (뜻빛깔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대충 이와 비슷한 말이었다) 보통 그런 상담이 들어올 때 “걱정마~ 잘 될거야! 힘내라 짜식~”이라며 격려를 해주는 게 대부분일텐데 찬물을 왕창 끼얹었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남 기쁘게 하는 것은 참 서툴다)


어릴 적의 장광설 이래로 사랑 혹은 연애에 대해 조금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견해를 가졌던 것 같다. 때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사랑의 본질은 슬픔, 아픔, 고달픔, 그리움, 두려움, 안타까움이라며 폄하하기 일쑤였다. (누가 보면 이별, 실연, 갖은 애증을 겪은 이의 말 같지만 연애경험 전무한 이의 제 멋대로의 상상이다) 이 생각을 바꾸게 해준 책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었다. 이는 무지막지한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침울한 결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째서 당신은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는 여자의 질문에 남자가 늘어놓는 근사한 답변이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고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물씬 들게 하는 공적을 남긴다.^^ “어째서냐구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어째서 태어났는지 물어보십시오. 꽃에게 어째서 피어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어째서 빛나는가를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비슷한 성격의 책으로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좁은문]을 들 수 있다. 두 책 모두 내가 싫어하는 종교색이 짙음에도 불구하고 따스하며 애절한 이야기가 나의 까다로운 성깔을 달랬던 것이다. 물론 좁은문은 기독교적 윤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강요하는 자기희생 정신에 대한 반성이 많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책 덕분에 신을 위한답시고 인간의 행복을 막고 고행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내가 종교 없이 살도록 해준 직접적인 계기를 이 책이 제공해주기도 했다.^^ 알리사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정말로 사랑을 희생할 만한 일이 있었을까?”라며 자신의 종교적 헌신에 의심을 풀지 않았다면 정말 입맛이 텁텁했을 소설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면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알리사와 제롬이 끝내 알콩달콩 사랑에 빠지지 못한 아쉬움은 알리사의 일기장 한 구절에서 폭발해 버린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4.
사랑과 가난은 감추지 못한다는 덴마크 속담이 있다고 한다. 연애질에 비교적 엄격했던 나이지만 아래 시를 선물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뒤늦게 고백해본다.^^; 이 대목에서는 칸트의 말씀을 핑계되며 물러선다.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사나이는 그 애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제대로 사랑을 고백하지도 못한다(호의도 제대로 보이지 못한다)” 이 시를 꺼내드는 이유는 내가 생각보다 그렇게 심한 목석이 아니라는 반증을 들어보이고 싶어서이다.^^


[아름다운 사람] - 헤르만 헤세

장난감을 얻은 어린 아이가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서, 기어이 부셔버리고
다음날엔 벌써 그것을 준 사람조차 잊는 것처럼
당신은 내가 드린 내 마음을
귀여운 장난감처럼 조그만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파하고 애태우는지를 돌보지 않는다.


(같은 제목의 시를 번역한 것에 제각각이다보니
내 취향에 맞게 적당한 단어를 골라서 짜 맞췄다^^)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고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 너무 흔해서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효용은 한없이 크게 보이고 비용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반성해 봐야겠다. 하지만 그간 사랑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며 일상사에서 흔히 쓰이는 ‘사랑한다’는 말조차 규제했던 지난날의 억지가 거의 잦아든 지금 세상은 넓고 사랑할 것은 구석구석에 널려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주지 않는 무심한 녀석일지도 모르겠지만 황량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인 차가운 신념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몸과 마음이 받아들이고 있다.


귀가 솔깃한 연애에 대한 소회를 늘어놓고자 했는데 딴 이야기들만 주절거렸다. 연애 경험도 없는 나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여자 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냐는 숱한 질문이 많았다. 일단은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 받을 만한 존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에 영 자신이 없다. 내 자신조차도 ‘연민으로서의 매력’을 가득하지만 ‘투자감 혹은 거래감으로서의 매력’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길게 생각하는 사람이 언제나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라고 괴테가 말했다. 남들 다 해본다는 연애나 이상형에 대한 실천적 모색보다는 소모적인 사념에 빠져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괴테는 이런 말도 했음을 알아주시길... “인간은 중요한 일을 결코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간 여남관계의 주된 관심사로서 양성 평등 문제에 천착했다면 이제는 내 청춘사업에도 그리 인색하지 않도록 해봐야겠다는 것을 밝힌다.^^


어느 순정만화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남자친구를 “정말 솔직하고 귀여운 사람”이라고 평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오홋 이런 숨겨둔 감수성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된다는 상상을 잠깐 해보니 가슴이 여간 뛰는 것이 아니다. 세르반테스는 사랑은 눈에 난 다래끼조차 진주알 같이 보이게 하는 안경을 쓰고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시력이 나빠서 난리인데 그 안경까지 끼고 어떻게 모진 세상 살아갈까 걱정도 되지만... 그 안경을 언젠가 집어 들어야 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 [憂弱]
Posted by 익구
:

경영학도로서의 익구

익구 2003. 10. 3. 06:45 |
어느덧 대학인으로서 찌들만큼 찌들었다고 할만한 4학기 째에 접어들었는데도 경영학도로서의 익구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친구들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낀다. “경영학이 잘 맞냐?”라고 의례적으로 묻는 질문에서부터 “경영학도로 그럭저럭 살만하냐?”고 조금 날카롭게 찌르는 질문에서 “경영학 별로 적성에 안 맞아 보이는데?”라며 결정적 비수를 날리는 물음까지 내 귀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고3 때 과연 어떤 학과를 지망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의 도가니에 빠졌다. 경영학도였던 과외형께서 경영학이 그리 어렵지만도 않고 재미난 학문이라고 말해 주셨고 그 말에 자신감을 얻고 고민의 도가니를 냉큼 탈출해버렸다. 만약 그 때 형이 “뭐 별로인 것 같아, 그저 그래”라는 요지의 말씀을 해주셨다면 아마도 고민의 도가니에 푸욱 적셔져 있다가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모를 일이다. 이래서 역시 역사에다 가정을 하면 골치가 아파지나 보다.^^;


아무래도 사람을 많이 뽑는 경영학과다 보니 주위에 경영학도인 친구들이 제법 있지만 어쩌다가 전공 관련 이야기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제 살 깎아먹기를 하기 일쑤다. “경영학은 아무래도 학문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아.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잖아”, “4년 간 배우기보다 한 2년 정도만 배우면 되지 않을까?”라는 말들도 들었던 것 같다. 하여간 한때나마 경영학 깎아 내리기의 선봉에서 횃불을 들고 설치던 때가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그것이 한참이나 모자란 잘못이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이렇게 자괴감에 빠져있던 나를 구원해준 것은 놀랍게도 정몽준씨(!)였다. 대선 전날의 그의 패악질을 두고 장사치, 장사꾼이라는 비난을 한참이나 듣고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고나 할까. 결국 장사 잘 하는 학문을 배우는 나로서는 모종의 방어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영학을 부당하게 비하하는 눈초리에도 이리저리 방어를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런 것을 심리학 용어로 ‘합리화’ ‘반동형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음을 부인할 생각도 없다.


시장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뼈와 살을 깎아 가는 노력으로 혁신하는 기업만이 살아남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서비스 정신으로 살아가는 기업인들이 별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경제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경영에 대한 이해와 기업인에 대한 합리적 비판이 많이 부족한 현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저런 고민의 끝은 ‘상도덕 바로 세우기’로 귀착된다.


상도덕 바로 세우기는 실상 별 것 아닌 생각이다. 모든 종류의 시장에서 룰을 준수하며 공정히 경쟁하기, 자기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 평가와 그에 따른 적절한 책임지기, 비용의 균등한 분담과 채무관계의 정확한 기록과 확실한 변제 등이 그 내용이다. 이것을 비단 경제의 영역에 국한시키지 말고 삶의 원리로 확대시켜보자는 것이다. 가령 잘못한 만큼만 욕먹고, 술자리에서 술값 떼먹지 않는 것이 상도덕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상도덕’에서 ‘商’字가 떨어져가야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레토릭(rhetoric) 차원에서 어여삐 넘어가 주고 말일이다.^^


여하간 왜 경영학도가 되었냐는 질문처럼 난감한 것도 없다. 이래저래 생각해본 결과 나를 경영학도로 이끈 두 가지는 ‘빵’에 마냥 초연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과 미지의 분야에 대한 정복욕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고3 때 사회학과도 지원했었는데, 경영학도로 제법 시달린 지금에서는 사회학도로서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을 비교적 다행이라고 여기는 비겁한 망각을 꾀하고 있기는 하지만... 얼떨결에 경영학도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솔직히 아주 좋아서 경영학도가 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굴러온 것이지만 기왕의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이제 짝사랑(?)을 하는 중이다. 본디 늦게 부는 바람이 무서운 법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오죽하면 경영학 빼고는 다 잘한다는 농담까지 듣는 나이지만... (이건 잘 뒤집어보면 은근한 칭찬이라며 아전인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일단 전공을 중간치는 한 다음에 외도(?)를 한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 주위 경영학도 중에는 경영 이외의 일체의 다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외곬들이 꽤 많아서 이런저런 한 눈 팔기가 두렵기도 하지만... 어느 교수님께서 경영학만 파고들어서는 편협한 테크니션밖에 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새기며 교양도 열심히 쌓고 전공에도 충실한 학업생활을 하려고 한다.


경영학 과목 중에서 숫자 들어가는 거 말고 말발로 승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그럼 그렇지...^^;) 그렇다보니 본의 아니게 회계학 과목들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비슷한 성격의 재무관리 분야도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있음^^:) 회계원리C+, 중급회계C+을 맞고 말았다. 2학년 2학기에 듣는 관리회계마저 이 대열에 동참하면 회계학 트리플 재수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안을지도 모른다. 회계는 경영의 언어라고도 하는데, 이 심각한 언어장애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이번에도 불살라본다.


2학년 들어오면서 전공 수업은 어떻게 듣나 고민도 했지만 막상 2학년 1학기를 그럭저럭 지내보면서 얼치기 경영학도로 무사히 대학 졸업을 할 수 있다는 모종의 자신감이 들면서 고민 한 점 없는 즐거운 상태에 빠져들었다.^^ 여하간 이것저것 열심히 배우고, 나아가 배운 것 좋은 일에 써먹을 줄도 아는 경영학도가 되고 싶다는 마음만은 건실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결심과는 관계없이 주위 사람들이 다들 암묵적으로 공감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앞으로 도저히 경영과 관계된 일을 할 것 같지 않다는 굳건한 의심의 눈초리다.^^;


고등학교 때 썼던 자기소개서에서 “사회의 공동선을 이루려는 의식을 가진 경영학도로서의 포부”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포복절도해버렸다. 세상에나, 이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내 머릿속은 비용최소화와 효용극대화가 가득 차 있는데 말이다.^^; 여전히 딴 짓을 더 즐기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나이지만, 자꾸만 무르익어 가는 전공에 대한 애정이 영 싫지만은 않다. - [憂弱]
Posted by 익구
:

새즈믄해 큰다짐

익구 2003. 8. 6. 07:47 |
2001년 1월 14일, 고 3 겨울방학 때 익구는 계속 미루던 [새즈믄해 큰다짐]을 선포했다. A4 용지 한 장에 사색의 짬을 엮어냈을 때는 꽤나 희열에 휩싸였지만 지금 보면 애들 장난도 이런 것이 없다.^^; 그 다짐의 내용을 소개한다.


하나, 나는 올바른 이상을 세우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하나, 나는 한결같음과 너그러움을 지닌다.
하나, 나는 건설적인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하나, 나는 진리탐구에 헌신하며 깨달은 것은 실천한다.
하나, 나는 끊임없이 사유하며 비판해서 그릇된 것을 고쳐 나간다.



1.
나의 이상주의는 1996년 1월 14일, 즉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뜬금없이 떠올랐던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는 꽤나 적극적인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익구의 사회철학’이라고 거창한 포장을 하며 기리고 있고 1월 14일을 ‘사색의 날’로 지정해 개인적인 명절로 지정하고 있다) 올바른 이상이란 ‘인간의 행복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는 단 하나의 전제조건을 두었다. 나는 이상을 세우는 것보다는 그것의 실현에 더 무게를 두었다. 그래서 현실과의 타협이 내게는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상의 실현을 위해 이상을 계속 깎아 내려가고, 현실과 타협하기 때문에 이상을 실현해도 늘 아쉬움이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이상주의라기보다 ‘이상실현주의(理想實現主義)’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가끔은 현실주의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는 나의 이상실현주의이지만, 理想이라는 근사한 단어에 너무 일찍 중독이 되어 버려서 아마 쉽사리 던져버리지 못할 것 같다.


2.
한결같음, 너그러움의 두 가치는 내게는 이분법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는 녀석들이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결같음’의 그 은은한 느낌에 넘어가서 평생의 삶의 좌표로 삼자고 호들갑을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전을 위한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 가의 문제에 봉착했고, 원칙주의와 실용주의의 대립으로 보이거나, 나중에는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의 논쟁으로 혼자서 끙끙 앓아댔다. 결국 실용주의, 합리주의의 이름을 걸친 ‘발전의 위한 변화’가 판정승을 거두면서 중학교 3학년 말 무렵에는 배보다 배꼽이 커져 한결같음보다 변화추구가 더 큰 가치가 되어버린 형국아 되었다. 이런 모종의 패배감(?)을 만회하기 위해 수입한 개념이 ‘너그러움’이다. 한결같음을 너그러움으로 보완하면 될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조금 삐딱하게 보면 그냥 내버려두고 좋게 좋게 보자는 것인지도...^^;) 결국 어설픈 봉합으로 말미암아 이런저런 실랑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결같음과 너그러움, 변화에 대한 나의 정의는 대충 이랬다.


‘한결같음’이란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지켜나가는 굳건한 신념을 말한다.
‘너그러움’이란 이해하지 못해도 인정은 해주는 다양성을 용인하는 관대한 정신을 말한다.
‘발전을 위한 변화’는 한결같음의 필수사항이므로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2001년 1월 14일판과 2001년 7월 17일 개정판이 동일)


여기서 발전을 위한 변화라고 굳이 길게 늘어 쓴 것은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변화를 용인하는 것일 뿐, 굳이 불필요한 변화는 최소화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변화에 두려움이 앞서며, 변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하려는 노력을 뒷구멍으로 끊임없이 하는 것은 아마 이 때의 습속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한결같음에의 천착은 내게 있어 영광과 모멸의 양날의 칼이다.


3.
건설적인 휴머니즘에 대한 정의는 대략 이러했다.


건설적인 휴머니즘이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며,
상호간의 행복 추구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 반폭력의 의지를 수호한다.
이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와도 상통한다.
(2001년 1월 14일판)

건설적인 휴머니즘이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과 무연(無緣)하지 않은 것들에게 인간적일 의무를 지닌다.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상호간의 행복 추구에도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폭력을 단호히 거부하는 반폭력의 의지를 수호한다.
이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와도 상통한다.
(2001년 7월 17일 개정판)


개정판에서 “인간과 무연(無緣)하지 않은 것들에게 인간적일 의무”는 루소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반폭력의 의지’ 부분에서 처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개정판에서는 폭력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것으로 조금 후퇴했다. ‘비폭력(非暴力)’보다 적극적인 개념인 ‘반폭력(反暴力)’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극단적인 반폭력주의를 실현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완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다시 고쳐보라고 한다면 반폭력字도 던지고 ‘가능한 비폭력을 사용한다’ 정도로 대대적인 후퇴를 할지도 모르겠다. 건설적인 휴머니즘은 결국 개인주의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개인주의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이렇게 치졸하게 돌려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개인주의라고 하지 않고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라는 수식어를 치렁치렁 달은 것도 개인주의를 떳떳이 등장시키기 힘든 척박한 집단주의 풍토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외쳤다지만, 나는 “개인주의가 휴머니즘”이라고 외쳤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의 “주체성이 진리”라는 외침처럼 실존주의는 결국 개인주의와 맞닿는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하간 요즘은 “자유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주의보다는 눈총을 덜 받아서 좋은 것 같다.^^;


약간 샛길로 빠지면... 익구의 개인주의적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일부 선행 개방’이라고 하는 것인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는 남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참 고약한 심보다^^;) 선행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해 쓰기에도 바쁜 것이라고 생각했다.(당시에 나 좋은 일 하는 것이 善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책도 좀 읽고, 학교 선생님들의 끊임없는 훈육을 접하면서 생각이 좀 바뀌게 된다. 타인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일부 선행 개방’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즉 나에게만 쓰던 선행을 남들에게도 좀 나누어주자는 정책이었다. 유치찬란한 어린 시절의 흔적들이지만 나는 여기서 개인주의의 떡잎을 발견했다. 또 다른 하나는 ‘개인 소국가론’이었다. 이건 말 그대도 개개인은 하나의 국가라는 인식론이다. 한참 뒤에 스토아 학파의 개인은 소우주라는 말을 듣고 “이건 내 것인데...”라며 2000여 년 전에 선수 당한 것에 대해 배 아파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쩌면 어쩌다가 스토아 학파 내지 그 비슷한 이야기 주워듣고 그 변주곡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때의 인식 틀이 남아서 친구관계를 비롯한 대외적 관계를 아직도 ‘외교’라고 칭하는 것이 그 당시의 언어들 중에 아직도 남겨진 거의 유일한 것이다.


4.
진리탐구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진리탐구에의 헌신이란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지적 성실성을 그 방법으로 한다.
또한 호학(好學)이념을 발전시킨 낙학(樂學)이념을 이른다.
지혜는 배운 것을 실제 행동에 옮기는 고귀한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성립한다.
(2001년 1월 14일판)

나는 지적으로 순수하고 성실하며, 학문적으로 진실 되고 당당하도록 한다.
지혜는 배운 것을 실제 행동에 옮기는 고귀한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성립한다.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참다운 지성이 아니다.
(2001년 7월 17일 개정판)


‘낙학 이념’이란 논어의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에서 연유한 개념으로 큰 의미는 없다. 개정판에서 보이는 ‘실천지성(實踐知性)’은 칸트의 ‘실천이성’에서 따온 것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으리라. 진리탐구에 헌신한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은 학생이라는 신분이 크게 좌우한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다고 학교공부에 충실하자를 내걸기는 너무 볼품 없지 않는가.^^;


5.
지금 생각해보니 네 번째 다짐과 유사한 점이 많다.


나의 사유는 인문학적 소양을 토대로 하며, 정의와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비판하고 고쳐나가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행한다.
(2001년 1월 14일판)

나의 사유는 진보적이며, 정의와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비판하고 고쳐나가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행한다.
나의 사상과 양심에 따라 시대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2001년 7월 17일 개정판)


처음에는 ‘인문학적 소양’을 토대로 한다고 했다. 아마도 당시 나를 지배하던 철학적 감수성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한 것 같다. 개정판에서는 ‘진보적 사유’를 한다고 했는데, 이것 또한 진보의 세례를 받은 여진(餘震)에 휘감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내가 골수 진보주의자인 줄 알았으니 이념의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했다^^;) 본의 아니게 인문학적 소양은 ‘순수’라는 가치를 대표했고, 진보적 사유는 ‘참여’라는 가치를 대표했다. 같잖게도 순수와 참여의 대립각을 나도 흉내내보고 싶었던 것이다.^^; 책상머리에서 잡생각을 하는 것이 유일한 유희였던 고3 수험시절에 나는 가장 급진적이었고, 소위 진보로 굴레 지워지는 생각들에 많이 젖어 있었다. 이 놈의 지긋지긋한 수험생 신분을 벗어 던지면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참여하며 살겠다며 이런저런 공약들을 쏟아 부었지만, 나답지 않게 너무 뜨겁게 타올랐든지 얼마가지 않아 식어버렸다. 열정이 한바탕 휩쓸고 간 후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몸서리만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새즈믄해 큰다짐]은 자구 하나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할 정도로 정성을 쏟아 부은 것이지만, 정작 그 실천이 제대로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악한 한 장의 다짐은 나의 성장이 함축되어 있고, 나의 목표가 반영되어 있는 소중한 녀석이다. 6(^.^)9
Posted by 익구
:
나는 수시모집제도가 확대된 원년에 수시모집으로 대학을 가게 된 그 수혜자다.
서류전형에서 자기소개서가 있는데 수시의 확산과 더불어 한바탕 열풍이 불었다.
4가지 문항에 대해 얼마 되지도 않는 인생을 다 헤집으며 글을 쥐어 짜냈다.
조금 과장과 미화가 심하기도 해서 친구들에게 공개했을 때
어찌나 웃음거리가 되었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즐거운 풍경이다.
경영학과와 사회학과용으로 두 가지가 만들어졌는데...
갑작스레 정해진 경영학과 선택이 난감했는지...
4번 문항의 그 궁색함에서 경영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는
‘빵’에 눈이 멀어 선택하게 되었음을 역설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아무튼 경영학과용으로 썼던 것을 주로 소개하고 사회학과용을 조금 붙인다.
수시모집이 도입되었을 때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혼란스러웠던 수시모집을 일관되게 옹호했던 그 때가 생각난다. 6(^.^)9


1.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장점(특성 혹은 능력)과 보완, 발전시켜야 할 단점(특성 혹은 능력)에 대하여 기술하십시오(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던 사례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설명하십시오).



~ 저는 제 자신을 ‘햄릿’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햄릿과 저의 장단점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햄릿은 소심해서 행동하기 전에 몇 번이고 생각해 보는 타입이지만 조심스럽게 상황을 파악해 가며 끝내 자신의 결심을 이루고 마는 신중함과 진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햄릿을 단순히 내성적이고 감상적인 인물로 간주하지 않고, 자기가 할 바를 알고 그에 따라 능동적 의지로 산 인물로 평가합니다. 저도 햄릿처럼 항상 고개가 갸우뚱한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단순판단보다는 종합판단, 현상보다는 본질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변혁과 진보는 너와 같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담임 선생님 말씀 한마디에 큰 용기를 얻고 있는 저의 장점입니다. 하지만 고교시절 문학, 철학, 심리학,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보였던 관계로 주관이 너무 강해졌다는 점이 저의 단점이 아닐까 합니다. 박학다식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몇 푼의 지식을 마치 전부인양 내세우다 보니 친구 관계가 원만치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많은 대화시간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동호회 활동이나 토론 소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저의 이런 단점을 고쳐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결성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의 ‘PSC'(philo sophos club)라는 토론 소모임에 활동한 것이 다양한 의견을 귀기울이고,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2. 고등학교 재학기간 중 학업 이외의 활동영역(사회봉사활동, 교내, 외 클럽활동, 단체활동, 취미활동, 문화활동)에서 가장 소중했던 경험을 소개하고, 이러한 경험이 자신의 성장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기술하십시오.



~ 고등학교 때 교지편집부원으로 참여했던 활동은 사회에 대한 안목을 넓혀주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새천년 편집부’ 첫 야심작 “인간존엄성에 대한 논의”를 기획하고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존엄성에 위배되는 여러 분야의 문제들-즉 남녀 차별, 빈부 격차, 인간 소외, 복제 인간 등등의 사회적 문제들을 진단하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원고 마감을 몇 번이고 미뤄가면서 인간의 실질적 존엄성은 어떻게 지켜지는가 하는 의문에 해답을 찾을 때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 구조 속에 방치된 인간의 존엄성 문제는 저의 정의감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료 조사를 하며 사회의 부조리한 면면을 알게 되었을 때 분개하기도 하였고, 해결 방안에 대해 고민하면서 너무나 많은 정신적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인간의 삶에 가장 기본이 되어야할 가치에서부터 사회적으로 반드시 지켜져야할 인간의 가치까지 폭넓게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른봄에 시작하여 첫눈이 내리던 겨울에 탈고할 수 있었던 ‘인간의 존엄성’ 문제는 인간과 사회를 향한 저의 뜨거운 애정과 정열이 담긴 처녀작이 되었습니다. 정직함이 손해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 성실함이 그 자체로 존중되는 사회, 정의로운 인간이 소외당하지 않는 사회, 휴머니즘이 옹호되는 사회에 대한 염원이 알알이 담긴 작품이었다고 자부합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비전은 환각이다”라고 독일의 어느 경영자가 말했습니다. 이 말처럼 이상은 머리로만 생각하고, 입으로만 부르짖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배우려는 경영은 결국 사람을 통한 일입니다. 고생 고생해서 일구어낸 편집부 기획은 사회의 공동선을 이루려는 의식을 가진 경영학도로서의 포부를 다지는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 사회학과용에서는 후반부를 이렇게 채웠다.

앎의 추구도 중요하지만, “정의는 행위 속의 진실이다”라고 디즈레일리가 말했듯이, 사회적 실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준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배우려는 사회학은 결국 사람을 통한 일입니다. 고생 고생해서 일구어낸 편집부 기획은 사회의 공동선을 이루려는 의식을 가진 사회학도로서의 포부를 다지는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 당시... 아니 지금도 자기소개서 쓰는 친구들은 알리라. 지망 학과가 여러 개일 때는 약간의 문맥 다듬기로 여러장 지어내야했던 고육지책을 말이다...^^;)



3.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건이나 경험을 설명하고,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 혹은 인생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기술하십시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도덕경’과의 만남입니다. 도덕경을 처음 접한 것은 중1 때였습니다. 그저 잔잔한 시를 읽듯이 몇몇 핵심어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습니다. 문득 생각나거나, 힘겨운 일이 있을 때 종종 꺼내 들어 번잡한 세상일을 놓아두는 일종의 도피처로 애용한 것 같아 노자님께는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오죽했으면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하여 마땅한 선거문구를 고민하다가 정한 것이 바로 “上善若水”였습니다. 비록 고배를 마셨지만 “물 같은 학생회”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그 때의 경험은 정말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無爲”의 개념도 채 익히지 못한 저이지만 무위란 인간들의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도덕경의 그늘로 들어간 이후로 저는 “爲無而無不爲”의 경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즉, 아무 것도 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것이 없는 경지, 너무나 자연스러워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하는 경지 말입니다. 저는 이 무위를 체득하여 경영학도에게 요구되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균형감각을 키워나갈 것입니다. 특히 “내 몸 바쳐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가히 세상을 떠맡을 수 있다.”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라는 구절은 지식정보사회의 최고 경영자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더더욱 올곧게 형성하여 항상 인간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천력을 겸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4. 전공선택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경험(인물, 사건, 서적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십시오.



~ 제가 경영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에 영향을 준 것은 우습게도 신문입니다. 중3때부터 신문을 꾸준히 읽어 왔습니다. 정치, 사회, 문화면까지 자세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훑어보고 의문도 갖고 교훈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주일치를 모아서 보기를 좋아하는 제가 신문을 보려고 정리하면서 하는 일이 언제나 경제 섹션을 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아는 것이 없어 읽어도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IMF 시대가 열리고 경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놓아졌지만 최근까지도 경제 섹션을 빼는 일을 해왔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경제신문’을 하나 더 보게 되었는데 읽자니 모르겠고, 그냥 두자니 아까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내심 화가 났습니다. 그래도 친구들에게 ‘박학다식의 표본’으로 추앙 받고(?) 선생님마저 ‘최박사’라고 불러주시는 저의 자존심에 여간 큰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언제나 미지의 분야로 남아있던 분야에 한번 도전해보자는 오기가 진로마저 경영학과를 선택하게 해주었습니다. “인생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는 초등학교 때부터의 이상을 고교시절 내내 고민해보았습니다. 과연 어렸을 적 꿈꾸었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경영학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경영학의 매력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신문 덕분에 이제 막 경영이란 어떤 것이며, 경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는 얼뜨기 경영학도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저의 전공에 애정을 가지고 헌신할 것입니다.




---> 정말 경영학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를 묻는 이 질문은 쓸 말이 없었다. 고작 이런 말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이건 사실이다. 나를 경영학도로 이끈 두 가지는 ‘빵’에 마냥 초연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과 미지의 분야에 대한 정복욕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좋아하는 것은 본업보다는 부업으로만 추구되었던 나의 지난 경험들도 바탕이 되었겠지만... (가령 수학을 가장 싫어했지만, 가장 못하는 과목이라 수능 전략상 3년 간 수학에만 매달려야했던 고행 같은 것들...)


이에 반해 사회학과용은 꽤 진솔함이 묻어 나있다. 어릴 적 꿈이 그 뜻도 모르는 ‘사회학자’였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지원을 해봤던 사회학과이지만 그 마음만은 진정성이 가득했다. 경영학도로 제법 시달린 지금에서는 사회학도로서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을 비교적 다행이라고 여기는 비겁한 망각을 꾀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 제가 사회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에 영향을 준 것은 우습게도 어렸을 적의 일기장입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방안을 정리하다가 큰 상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 몇 권이 저의 진로를 정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의 유치한 사색의 흔적들을 곱씹으며 회상하다가 제 눈을 고정시킨 다짐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제 어릴 적 꿈이 ‘사회학자’였음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철없던 시절, 사회학자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문구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제 머릿속의 사회학자는 너무나 작은 존재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 후 고교시절 내내 초등학교 때의 다짐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생활하며 ‘모범생’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그저 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저에게는 너무나 따분한 일이었습니다.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고픈 욕구’는 언제나 제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사회학과로 제 길을 정했을 때 부모님의 만류와 ‘굶어 죽기 십상’ 이라는 친구들의 핀잔보다도 옛 꿈을 찾았다는 만족감이 너무나 컸습니다. 사회를 이해하는 다양한 틀을 제공하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제반현상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사회학의 매력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사회학을 배워서 보다 많은 민주주의의 원리가 실현되고 확장되는 사회 환경을 조성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어릴 적 동경해 마지않았던 그 ‘거인’이 되고자 합니다.



내가 썼던 이 자기소개서 대학으로 가는 길에 그다지 많은 도움은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배점도 크지 않았고 거의 요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나를 돌아보며 대학인으로서의 꿈을 키우던 유쾌한 경험이었다.
이런저런 자기소개에서 별로 기억나는 역사도 없고, 자랑할만한 것도 없는 인생은 허전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수입하고 치열하게 싸워야겠지.
자기소개거리가 메마르지 않는 인생은 가슴 뛰는 인생일 것이다. 6(^.^)9
Posted by 익구
:
1. 독선쟁이

어느 친구가 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넌 어느 하나를 정하면 모든 것을 그것에 맞춰 몰아가는 것 같아.”


뭐 솔직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어느 인식적 틀을 정하면 그걸 기준으로 밀고 나가는 성격인 것 같기는 하다. 좋게 말해 가치관 확립이고 비꼬면 고집불통 막무가내인 셈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정하는 것은 정말 고통이다. 한 번 정하면 계속 밀고 나가는 우직함(?)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결정과정에서 엄청나게 고민을 하기 때문이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뛰어들어가기 전에 엄청난 검토를 해대는 것이다.


이건 이제는 다 버렸다고 생각하는 ‘한결같음’에 대한 집착의 그늘이 아직도 내 삶의 양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실상 ‘한결주의자’는 위험하다. 그네들의 원칙과 소신은 때로는 과도한 순결주의와 결합하면서 무시무시한 배타성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소심쟁이 익구가 독선적인 마음을 먹게 되기까지는
정말 여러 번 생각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생긴 독선도 언제나 다시 점검하고
언제든지 기꺼이 고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다는 것을...
독선과 독선이 만나서 경쟁하고 절충하는 과정이
독선은커녕 아무 알맹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믿거든.
독선 과잉도 문제지만... 독선 부재도 문제니까...

- 익구, [독선쟁이가 되자] 中


한결같음에의 천착이 나의 아이덴티티라면 무작정 내치기보다는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답답하기 일쑤이고 임기응변은 전무하며, 때를 놓치기 다반사다. 이런 내가 싫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성격심리학이라는 수박을 핥아보고 나서야 겨우 나의 이 못난 성격을 인정하고 공존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인정은 긴장감을 유지한 인정이다. 지난날의 생각과 경험들이 쌓여 이루어진 지금의 나를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부정하는 모순의 칼날을 기꺼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늘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낯설음이나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언제나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처음과 끝이 같을 수는 없다. 그건 지나친 욕심에 불과해”라고 말씀하셨고, 딴에는 무릎은 쳤지만... 아직도 그 말을 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나는 참으로 더딘 놈이다.


나도 그 놈의 냄비근성을 가져보고 싶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정신 없는 세상에서는 활활 타오르다가 이내 식어버리고 또 다른 장작더미를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식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일관성에의 집착은 식을 줄을 모른다. 초라한 결말이 싫어, 애초부터 초라함으로 무장(?)하는 ‘새가슴의 고리’를 끊기가 참 힘들다. 이럴 때는 뻥튀기의 선수들인 정치인들의 기질을 좀 수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 기회주의자

나는 어쩌면 기회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교묘한 저울질의 끝은 대개가 중간 어디쯤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양시론, 양비론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래 생각하다보면 상반된 대안의 장단점이 보이면서 그 때부터는 적절한 타협에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많이도 아니고 욕먹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둔다. 이념문제에 민감한 이 땅에서는 좌나 우나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간 낭패보기 십상이라는 것을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날라리 우파’를 선언했다. 아직 해먹을 거리가 많은 ‘범생 우파’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은 ‘최소한의 계급의식’ 이전에 심약함의 발로다.


나는 이따금 내가 세속도시에서 유토피아로 밀파된 스파이이거나 유토피아에서 세속도시로 파견된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스파이에게 영예가 주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불안하고 누추한 회색지대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 고종석, [자유의 무늬], ‘책 앞에’ 中


날라리 우파로서의 나는 회색지대가 두렵고 스파이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도 고종석의 저 말에 한없는 공감이 느껴지는 것은 내가 은연중에 스파이의 과업을 수행하고, 부지불식간에 회색지대로 성큼 나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참 그러고 보면 나름대로 많은 변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시절 한 친구는 나를 ‘극단적 진보’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정치 교과서에 있는 정치 문화에 대한 그래프를 소개해줬다. 그 그래프는 정치적 의견의 동질성 여부를 합의적 정치 문화와 다극적 정치 문화로 나눴다. 극좌부터 극우까지 X축에 두고, Y축은 퍼센티지(%)로 된 구성된 그 그래프에서 합의적 정치 문화는 ∧모양으로, 다극적 정치 문화는 ∨ 모양으로 대략 그려져 있었다.


그 친구는 합의적 정치 문화가 안정적 사회발전을 가져온다면서 나를 비판했다. 무슨 오기였는지 나는 극단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 양극단이 부딪히면서 사회가 발전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 내게 있던 극치의 아름다움과 타협을 거부한 극단에 대한 동경의 표현이었다. (물론 각종 문제집의 모범답안들은 당연히(!) 합의적 정치 문화를 지지했다)


하여간 그 때 나나 그 친구나 너무 멀리 나갔다. 그 친구는 기껏해야 ‘눈치 많은 보수’ 정도에 불과한 나에게 극단적 진보라고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씌웠고, 나는 그걸 반박하기는 오히려 ‘극단예찬’을 해대는 잘못을 저질렀다. 적당한 타협과 강요된 굴종에 허우적대는 나를 보면 그 친구도 그 때의 구박을 취소하겠지. 물론 나도 두 발 물러서야겠지만.


기회주의자로서의 익구는 실상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다. 한결같음의 리스크를 감소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들여온 것이 이 녀석이다. 그런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이 기회주의는 어느덧 내 삶의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 대응하며 발전을 위한 변화의 길이라는 그럴듯한 수사로 치장하고서 말이다. 식용을 위해 들여왔다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 되었다는 황소 개구리, 기회주의는 내게 있어 꽤나 먹성 좋은 황소개구리다.


3. 똘레랑스(tolerance, 관용)

“소수가 혁명적인 것보다 다수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혁명적이다”라고 그람시가 말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거나 돌린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성실한 자세로 몸과 마음으로 설득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아무리 진정성을 보여도 또 어쩌다가 상대방의 진정성이 드러날 경우에도 서로간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진정성을 보이거나 상대방에 진정성을 보이는 단계까지만 가더라도 성공이지만. 결국 운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무책임하게 둘러댄다. 나는 내게 운이 더 생기기를 바란다.


살아가며 뜻 맞는 사람 만나고 서로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눈 씻고 찾아보면 마음 맞는 사람은 몇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도 나와 공유할 사람을 찾는 즐거움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 내가 겪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이것이 안정추구의 보수적 성향이라면 딱 그만큼은 보수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게으름의 탓일 것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꼭 만난다고들 하지만, 그보다는 어쩌다가 만난 사람들에 감사하고 그 안에서 가능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우연으로 엮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자신과 내 주위 사람들의 변화를 일으키는 ‘미시 혁명’과 만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단 주어진 것에 한 번 긍정하고 들어가니까 딱 그만큼은 보수주의자가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의 폐해일 뿐이다.


다양성, 이질성, 복잡성을 존중하기 위해 무던 애를 쓰는 나는 결국 똘레랑스를 찾았다. 동질성과 단일성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히는 나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본디 똘레랑스는 프랑스 수입품이라고 볼 수 있는데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라는 기둥과 함께 또 하나의 기둥이 있다. 쏠리다리떼(solidarité), 즉 ‘연대’가 그것이다. 똘레랑스가 개성과 자유의 미덕이라면 쏠리다리떼는 공동체와 연대의 미덕이다.


뭐 구구절절 따질 것도 없이 똘레랑스보다는 쏠리다리떼가 훨씬 진보적이다. 똘레랑스가 내 자유를 옹호하고, 남의 자유를 인정하는 데서 그친다면, 쏠리다리떼는 더 나아가 평등과 박애에 닿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그렇지만 나는 똘레랑스에 그쳤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똘레랑스 하나 온전히 수행하기도 너무 벅차다. 무엇보다 앵똘레랑스(불관용)에 단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에선 강요나 강제하는 대신 토론합니다. 아주 열심히 토론합니다.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다 벽에 부딪히면 “그에겐 안된 일이지만 할 수 없군!(tant pis pour lui!)”하며 아주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섭니다. 강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치고 받고 싸우지도 않습니다. 또 미워하지도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290쪽


그러나 이런 나의 모자름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한 똘레랑스라는 무기는 여전히, 앞으로도 유효하다. 똘레랑스는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뿌리내린 땅에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아웃사이더, 소수파, 비주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다수파일수는 없다. 그렇기에 똘레랑스는 일종의 보험이다. 물론 남과 다른 것에 마음을 열어야하는 보험료는 그리 싼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보험료의 부담쯤이야 보험금의 혜택에 비추어볼 때 확실히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뭐 나란 녀석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잘 되지 않는다. 독선쟁이로서 한결같음을 외치다가 기회주의자가 되어 눈치를 보기 시작하다가도 똘레랑스를 들이대며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들먹인다. 한마디로 모순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잡한 양상들이 모여 나란 인간을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나에 대해 째려보기를 그치지 말자. 그러나 가끔은 따스한 눈길을 보내자. 어느 친구의 옛 편지에서 살짝 웃고 만다.


“너야 맨날 긍정적이게 사는 사람이니까 또 웃으면서 세상을 초월해서 살아가구 있겠지...^^;”


나는 절대 세상을 초월해서 살지 못할 것 같다. 오히려 악착같이 붙어서 재미난 인생을 꾸리기 위해 머리를 굴려댈 것이다. 나의 길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아직은 영 흐릿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 약속하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뒹굴 거리더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상은 손에서 놓지 않겠다고. 6(^.^)9
Posted by 익구
:
지금은 이름을 하나씩 갖는 것이 관례지만,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여러 개의 이름을 지녔었다. 막 태어나면 막되게 부르는 아명(兒名)을 붙이고, 성인이 되면 문서 같은 데에 정중히 사용할 관명(冠名)을 지었다. 죽은 이에 대해서 말할 땐 관명을 휘(諱)라고 한다. 또 윗사람이 부르는 자(字)와 친구들끼리 쉽게 부른 호(號)가 있었다. 호를 아호(雅號)라고도 한다.
- 고종석 [국어의 풍경들] 230~ 231쪽


그간 익구의 雅號(아호)를 뭘로 할까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호’라고 하니까 엄청 거창해 보이지만 위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옛날에는 친구들끼리 쉽게 부르는 이름이었다고 하니까...
뭐 거창한 것이 아니라 거의 인터넷 게시판 상의 필명정도의 수준으로
그냥 재미로 쓰는 것이니 너그러이 양해를...^^


그간 몇 개의 후보를 염두에 두었지만...
“우약(憂弱)”이라는 녀석으로 확정하겠습니다.
이건 여조겸의 [동래박의]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君子憂我之弱 而不憂敵之强
(군자는 제가 약한 것을 걱정하지 적이 강한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의 약함을 걱정한다" 정도의 뜻입니다.


언제나 저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을 인식하자는 뜻이면서도
약한 것, 어려운 것, 힘겨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갖다 붙인 유려한 의미만큼이나 제 호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참 그럼 그전에 익구가 제 멋대로 쓰던 호가 무엇이었는지
혹시라도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과거 호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익구가 최초로 호 비슷한 개념으로 쓴 것은 “낙도(樂道)”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한문시간에 한자성어들을 배우는 와중에
아무 생각 없이 정하게 된 것인데...


아마 安貧樂道(안빈낙도)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뭐 이건 잠깐 쓰다가 폐기했기 때문에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고3 5월까지 썼던
익구의 최초의 호라고 할 수 있는 “담혜(澹兮)”가 있습니다.
이건 도덕경 20장에서 따온 것으로서...


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
(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


“잠잠히 흐르는 모양”“담담하구나!”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후 1년 간은 “소권(疏權)”이라는 녀석을 썼습니다.
'소외 받는 이들의 권리를 위해' 혹은
'소외 받는 권리를 위해' 라는 거창한 뜻을 품었답니다.


그러나 첫인상에서 느낄 수 있듯이...
너무 권력지향적, 이념지향적이라는 자체 반성도 있고 해서 그만 쓰게 되었지만
제 생애 가장 급진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이 꽃 피웠던 시절이라고 평가합니다.


소권 이후 한참이나 후발 주자를 비워두었지만...
이제 새로운 익구의 호를 선포하고 아껴 쓰려고 합니다.
앞으로 익구의 애칭인 우약도 많이들 아껴주시고...
늘 부끄럽지 않은 벗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6(^.^)9
Posted by 익구
:
2탄에서는 살아오며 여기저기서 들었던 말들 중에 기억 나는 것들 모아봤습니다.^^


익구는 참 호기심이 많은 아이랍니다. 너무 많아서 탈이죠... - 유치원 선생님

익구의 반짝이는 두 눈 만큼이나 반짝이는 지혜로 선생님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하는 최익구 도련님! 생일을 축하해요. 초롱초롱하는 그 지혜를 잘 키워 이 나라를 빛내는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
- 유치원 선생님, 생일 축하 편지에서

너는 너무 착해. 여자애 같아. 하지만 아주 조금은 남자답게 굴어. - 초등학교 친구

익구는 정말 완벽한 아이죠. 성격이 계집애 같은 것만 빼고는... - 중3 담임 선생님, 농담조로...^^

너는 사실적이지 못하고 어딘가 추상적이다. - 고1 단체 시간에 한 친구

넌 정말 최악의 기계치다... - 8년 지기 친구가 기계 앞에서 쩔쩔매는 나를 보며

익구는 자기의 50%정도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잘 드러내지 않는다.
- 술자리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어쩌다가 나왔을 때

넌 성이 '최'가 아니라, '책'이다... 이 '책읽구' 녀석...
- 새터 때부터 알고 지낸 친한 대학 친구 두 녀석의 협공...^^;

넌 정말 인생이 왜 그 모양이니... 좀 알아서 좀 해봐... - 맨날 이것저것 빌려서 미안한 친구가

넌 경영학 빼고 다 잘하는 것 같아. - 너무 충격 받아서 누가 한 말인지 기억이... ㅡ.ㅡ

네가 경영학으로 끝까지 간다면 컨설팅 쪽은 잘 할 거 같다. - 고등학교 때 수학 과외형

글에는 그 사람이 투영되어 있는데, 익구의 글을 읽으면 익구 마음에는 불이 있는 것 같다.
- 고등학교 교지편집부의 한 친구

넌 정치인의 기질을 타고났어... 말바꾸기나 배째라 스킬만 배우면... 완벽하군
- 맨날 나를 구박하는 한 친구

뭐... 중국어과 시절을 떠올려라...지난 번 엠티에 같이 술 마실 사람없다던... 그 시절을... 넌 그런 류의 인간인거야 으하하하
- 익구의 대중성 확보 정책을 비웃은 위의 그 친구

어디가 절주.. 술. 술 외길 인생으로 보이...
- 지속적인 절주정책을 펼친다는 나의 말을 듣고 놀란 한 친구

너가 잘못하지 않은거면  너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으면하구 음... 너에게는 충분한 겸손이 있으니까... 지나친 겸손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작용이 있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황에 맞게... 자신이 능동적이고 유연성있게 대처하는 익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고...
- 전자우편 상에서 한 친구

학교생활은 재미있구...? 너야 맨날 긍정적이게 사는 사람이니까 또 웃으면서 세상을 초월해서 살아가구 있겠지...^^;
- 오랜만에 안부를 물어준 반가운 편지에서

넌 정말 개성이 넘쳐서...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좋아..ᄏᄃᄏᄃ
부디 나이가 들어도 그 너의 맘 변함 없길 바란다 정말.
- 엠에스엔 대화 중

난 익구의 그런 면이 좋아 쿠하하 겸손 같지 않은 겸손... - 엠에스엔 대화 중

오빠는 조선시대 태어나서 선비나 했어야 돼... - 동생이... ㅡ.ㅡ;

익구가 가장 보고 싶겠군 2년 2개월 후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큭; 항상 스스로 성장해 가는 어린이(?)이니까
- 지금 군인으로 살고 있는 나를 칭찬하기 즐기는 고마운 친구

아휴~ 걱정거리를 사서하는구나. 너 같은 애들이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지성인이라는 거 충분히 알았다네.
- 내 잔소리에 질린 한 친구 은근한 핀잔을 때리며

...완전 미쳤구나 으아아아아~ 순진모드 익구를 돌려줘.
- 부시의 ‘악의 축’ 패러디한 ‘권력의 축’ 발언에 놀란 한 친구, 권력의 축이란 그저 이 땅의 권력의 일각이나마 차지해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자는 정도의 뜻... 그렇게 놀랄 필요까지야.^^;

집에서 뒹굴뒹굴거리다가 부르주아스럽게 쇼핑이나 하는 화려한 외출... 더군다나 애완동물까지 기르고있고... 백수스럽게 술꾼. 백수에 표본이로세.
- 나를 부르주아라고 구박하는 친구가


익구에 대한 평들은 앞으로도 계속 되겠지요.
주위의 좋은 충고를 늘 귀담아 듣는 익구가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6(^.^)9
Posted by 익구
:
익구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도 많지만
그 중에서 좀 괜찮은 걸로만 모아서 소개합니다.
1탄은 현재 문헌자료가 남아 있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의 흔적들을 정리해봤습니다....



<수첩 돌리기가 유행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내 수첩에 남겨진 말들...>

- "넌 모범생의 전형인 것 같아."

- "나의 취미는 익구 잔소리 듣기다."

- "항상 생각하는 것도 좋은 자세이지만 가끔은 복잡하지 않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가끔은 소리 내어 크게도 웃어 보고, 음~ 친구들이랑 장난도 쳐 보고, 이런 모습도 볼 수 있었음 좋겠다."

- “언제나 책도 열심히 읽고 바른 생활을 하는 니가 부럽기도 하구. 날 타락한 人처럼 느끼게도 하지만, 너나나나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자.”

- “넌 아무리 봐도 너무 여성스러운 거 같다. 그 성격 고칠 생각 없냐? 나한테 부탁해라. (중략) 니가 놀려도 자꾸 웃으니까 계속 놀리고 싶잖아... 그러니까 내가 또 놀리면 Tough하게 싸대기 몇 대만 갈겨 줘... 알았지?”

- "네가 굉장히 착하고, 성실하고, 박학다식하고, 正道를 위해 정진하려 하고... 그런 여러 가지보다, 너의 '용기'에 항상 놀라곤 한다. 너는 어떤 일에도 굴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을 지키는 사람인 것 같다. 그걸 ‘용기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지만, 너는 더더욱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런 모습이 참 보기 좋고, 부러워."

- “난 태어나서 너 같은 아이는 처음 봐...(마치 김동률의 어린 모습 - 그는 대학 갈 때까지 단 한 편의 TV프로를 못봤다는 - 같아...) 그 철학인지 철분인지 하는 게 그리 좋단 말이냐?!”

- "너의 철학이 철철 넘치는 철들은 모습을 보자면 나도 몰래 눈물이 나오려 해"

- "너의 첫인상은 철학적인 느낌보다는 초등학생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이였어."

- "나는 네가 꼭 '개미'같아.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무언가 부지런히 그것도 열심히 하잖아."

- "항상 바른 생활하는 어린이가 되도록 노력하구, 그 어리숙한 미소 잃지 않도록 해."

- "넌 정말 순하디 순하고 바른 생활을 추구하는 것 같아... 항상 철학적이고 조심성 많은 네가 참 신기해. 그런 사람은 첨 보거덩... 항상 착한 마음 잃지 않고 바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인재가 되길..."

- "비록 가끔은 너무 고지식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너의 원리원칙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난 내 식대로 살아가련다."

-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남자, 또 하나는 여자, 마지막이 바로 익구다. 익구야... 좀 놀아라."

- "독야청청한 네 모습도 보기 좋지만 너무 어려운 이야기말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익구가 되어줘."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에서 롤링페이퍼를 하고...>

- "자신을 너무 구속하지 않기를 바란다. 시대는 변한다."

- "지금처럼 순수하게... 사회 적응도 좀 해라."

- "익구야. 바르고 곧은 면도 훌륭하다. 하지만 살면서의 융통성과 터프함도 필요하다. 꼭 니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널 보면 항상 내가 갑갑하다. 뭔가의 틀을 잔뜩 만들어 놓고 생활하는 걸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좀 그런 거 같다."

- "현실세계와 동 떨어진 우리의 약간 늙은 '어린왕자'여. 넌 너무 착하다. 정말 착하다. 그래서 어떨 땐 융통성이 떨어질 때도 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그게 너의 강점일지도 모르지..."

- "남자는 때론 냉정한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 "부인을 고를 때는 눈의 높이를 한 단계 낮추고, 친구를 고를 때에는 한 단계 높여야 한다고 누군가 그러더라. 익구야, 너는 한 단계를 올라서서 바라보아도 훌륭한 우리의 벗이란다."

- "아... 우리나라에 너 같은 人이 열 명만 있더라도... 세계 최강의 도덕국이 될 터인데... 넌 반드시 커서 뭔가 남다른 사람 될거야. 나중에 티비에서 보면 반가워 하마!"

- “익구야! 넌 넘×2 착해서 탈이다. 남자는 때론 냉정한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 “아직 순수(?)한 네게 부럽다. (으웩) 항상 우리에게 구박만 받지? sorry. 앞으로도 책 많이 읽고... 나도 빌려줘. 글구 제발 길 가다 쓰레기는 줍지 말아줘...”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