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구가 보는 사랑(연애담 아님)
익구 2003. 10. 12. 22:03 |1.
오며가며 여자친구 있냐는 말을 참 많이 듣는 것 같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연애를 한 두 번쯤을 겪어봄 직한 시기이다보니 그런 질문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 같다. 심지어는 눈이 너무 높은 게 아니냐는 핀잔까지 들을 정도로 같은 질문에 한결같이 냉랭한 답변밖에 못하고 있다. 늘 혼자서도 잘 논다는 말로 둘러대기는 하지만 아직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할 마음이 없는 것이 솔직한 사실이다. 여자친구 없다며 늘 넋두리하고 안달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나같이 무딘 심성으로 느긋하게 있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시콜콜한 연애상식에도 눈길 한 번 안 주다보니 무슨 냉혈한쯤으로 무시당해도 쌀만큼 그 방면에 대한 탐구가 전무했다는 반성을 해본다. 고등학교 3년 간 사랑을 주제로 고민한 것이라는 것이 고작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하는 것 정도다. 정말 진도 느리다.^^; 나는 첫눈에 반하는 것이 그 사람의 외면을 바라보고 하는 일이라는 두려움 때문인지, 첫눈에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외면에 내면이 드러나는가?”하는 문제까지 걸려들었고, 고민 끝에 내가 잘하는 수법인 중간잡기를 해버렸다.^^; 결론으로 “내외개연성론(內外蓋然性論)”을 제시했는데 말 그대로 외면에 내면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면과 내면은 별개의 것이다라고 철썩 같이 믿던 나로서는 많은 양보를 한 셈이다.^^
맹자께서도 “사람을 볼 때에는 눈동자보다 좋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눈동자는 惡을 감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올바르면 눈동자가 밝고, 마음이 옳지 못하면 눈동자가 어둡다.”(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眊焉)라고 말씀하셨다. 외면에도 그 사람의 내면이 일정정도 투영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영 마뜩지 않았던 것은 내면을 중시하고자 했던 나의 철없는 고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로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보려고 무던 애를 쓰는 꽤 괜찮은 습관이 생겼다.^^
2.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은 모든 인간은 그 정신 속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요소, 즉 남성은 아니마(여성적 영혼)를, 그리고 여성은 남성적인 아니무스(남성적 영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조화하고자 한다. 육체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있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원래 양성적이라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이성에게 투사되어 ‘매력’ 또는 ‘혐오감’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된다. 즉 남성의 경우 여성에게 아니마를 투사할 때 자기 아니마의 여성상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매력을 느끼고, 모순된 경우에는 혐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라는 시구는 그런 인간의 표현하기 힘든 무의식의 감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첫눈에 흠뻑 빠져버린다는 것, 괜시리 좋은 사람이 생기는 것, 그냥 믿고 싶은 사람이 덜컥 나타나는 것은 살다가 몇 번은 겪어보고 싶은 유쾌한 일이겠지만 융의 설명에 따르면 상대방을 보고 느끼는 황홀감이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상이라는 것이다. 조금 김이 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낭만이 아주 떨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별 이유도 없이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이제 설사 운명적으로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순순히 받아들일 정도의 마음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슬슬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안 될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도 있고 말이다.^^; 전에는 진실한 사랑은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추구하면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함께 이끌어 가는 사랑만큼이나 이끌리는 사랑, 어떤 힘에 질질 끌려가는 것도 무척 재미날 것 같다.
3.
초등학교 때 한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제법 진지하게 상담을 해왔다. (머리에 피가 넘치는 것들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나는 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설교를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관심이 있다’ ‘호감이 있다’부터 시작을 하지. 그 다음에는 ‘좋아한다’는 단어가 사용되겠고 그 다음 단계가 ‘사랑한다’가 아니겠니?”라면서 ‘사랑단계론’을 주절되면서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니. 그 단어를 함부로 쓰는 거 아니야?” (뜻빛깔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대충 이와 비슷한 말이었다) 보통 그런 상담이 들어올 때 “걱정마~ 잘 될거야! 힘내라 짜식~”이라며 격려를 해주는 게 대부분일텐데 찬물을 왕창 끼얹었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남 기쁘게 하는 것은 참 서툴다)
어릴 적의 장광설 이래로 사랑 혹은 연애에 대해 조금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견해를 가졌던 것 같다. 때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사랑의 본질은 슬픔, 아픔, 고달픔, 그리움, 두려움, 안타까움이라며 폄하하기 일쑤였다. (누가 보면 이별, 실연, 갖은 애증을 겪은 이의 말 같지만 연애경험 전무한 이의 제 멋대로의 상상이다) 이 생각을 바꾸게 해준 책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었다. 이는 무지막지한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침울한 결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째서 당신은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는 여자의 질문에 남자가 늘어놓는 근사한 답변이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고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물씬 들게 하는 공적을 남긴다.^^ “어째서냐구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어째서 태어났는지 물어보십시오. 꽃에게 어째서 피어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어째서 빛나는가를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비슷한 성격의 책으로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좁은문]을 들 수 있다. 두 책 모두 내가 싫어하는 종교색이 짙음에도 불구하고 따스하며 애절한 이야기가 나의 까다로운 성깔을 달랬던 것이다. 물론 좁은문은 기독교적 윤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강요하는 자기희생 정신에 대한 반성이 많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책 덕분에 신을 위한답시고 인간의 행복을 막고 고행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내가 종교 없이 살도록 해준 직접적인 계기를 이 책이 제공해주기도 했다.^^ 알리사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정말로 사랑을 희생할 만한 일이 있었을까?”라며 자신의 종교적 헌신에 의심을 풀지 않았다면 정말 입맛이 텁텁했을 소설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면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알리사와 제롬이 끝내 알콩달콩 사랑에 빠지지 못한 아쉬움은 알리사의 일기장 한 구절에서 폭발해 버린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4.
사랑과 가난은 감추지 못한다는 덴마크 속담이 있다고 한다. 연애질에 비교적 엄격했던 나이지만 아래 시를 선물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뒤늦게 고백해본다.^^; 이 대목에서는 칸트의 말씀을 핑계되며 물러선다.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사나이는 그 애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제대로 사랑을 고백하지도 못한다(호의도 제대로 보이지 못한다)” 이 시를 꺼내드는 이유는 내가 생각보다 그렇게 심한 목석이 아니라는 반증을 들어보이고 싶어서이다.^^
[아름다운 사람] - 헤르만 헤세
장난감을 얻은 어린 아이가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서, 기어이 부셔버리고
다음날엔 벌써 그것을 준 사람조차 잊는 것처럼
당신은 내가 드린 내 마음을
귀여운 장난감처럼 조그만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파하고 애태우는지를 돌보지 않는다.
(같은 제목의 시를 번역한 것에 제각각이다보니
내 취향에 맞게 적당한 단어를 골라서 짜 맞췄다^^)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고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 너무 흔해서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효용은 한없이 크게 보이고 비용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반성해 봐야겠다. 하지만 그간 사랑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며 일상사에서 흔히 쓰이는 ‘사랑한다’는 말조차 규제했던 지난날의 억지가 거의 잦아든 지금 세상은 넓고 사랑할 것은 구석구석에 널려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주지 않는 무심한 녀석일지도 모르겠지만 황량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인 차가운 신념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몸과 마음이 받아들이고 있다.
귀가 솔깃한 연애에 대한 소회를 늘어놓고자 했는데 딴 이야기들만 주절거렸다. 연애 경험도 없는 나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여자 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냐는 숱한 질문이 많았다. 일단은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 받을 만한 존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에 영 자신이 없다. 내 자신조차도 ‘연민으로서의 매력’을 가득하지만 ‘투자감 혹은 거래감으로서의 매력’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길게 생각하는 사람이 언제나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라고 괴테가 말했다. 남들 다 해본다는 연애나 이상형에 대한 실천적 모색보다는 소모적인 사념에 빠져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괴테는 이런 말도 했음을 알아주시길... “인간은 중요한 일을 결코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간 여남관계의 주된 관심사로서 양성 평등 문제에 천착했다면 이제는 내 청춘사업에도 그리 인색하지 않도록 해봐야겠다는 것을 밝힌다.^^
어느 순정만화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남자친구를 “정말 솔직하고 귀여운 사람”이라고 평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오홋 이런 숨겨둔 감수성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된다는 상상을 잠깐 해보니 가슴이 여간 뛰는 것이 아니다. 세르반테스는 사랑은 눈에 난 다래끼조차 진주알 같이 보이게 하는 안경을 쓰고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시력이 나빠서 난리인데 그 안경까지 끼고 어떻게 모진 세상 살아갈까 걱정도 되지만... 그 안경을 언젠가 집어 들어야 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 [憂弱]
오며가며 여자친구 있냐는 말을 참 많이 듣는 것 같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연애를 한 두 번쯤을 겪어봄 직한 시기이다보니 그런 질문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 같다. 심지어는 눈이 너무 높은 게 아니냐는 핀잔까지 들을 정도로 같은 질문에 한결같이 냉랭한 답변밖에 못하고 있다. 늘 혼자서도 잘 논다는 말로 둘러대기는 하지만 아직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할 마음이 없는 것이 솔직한 사실이다. 여자친구 없다며 늘 넋두리하고 안달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나같이 무딘 심성으로 느긋하게 있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시콜콜한 연애상식에도 눈길 한 번 안 주다보니 무슨 냉혈한쯤으로 무시당해도 쌀만큼 그 방면에 대한 탐구가 전무했다는 반성을 해본다. 고등학교 3년 간 사랑을 주제로 고민한 것이라는 것이 고작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하는 것 정도다. 정말 진도 느리다.^^; 나는 첫눈에 반하는 것이 그 사람의 외면을 바라보고 하는 일이라는 두려움 때문인지, 첫눈에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외면에 내면이 드러나는가?”하는 문제까지 걸려들었고, 고민 끝에 내가 잘하는 수법인 중간잡기를 해버렸다.^^; 결론으로 “내외개연성론(內外蓋然性論)”을 제시했는데 말 그대로 외면에 내면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면과 내면은 별개의 것이다라고 철썩 같이 믿던 나로서는 많은 양보를 한 셈이다.^^
맹자께서도 “사람을 볼 때에는 눈동자보다 좋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눈동자는 惡을 감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올바르면 눈동자가 밝고, 마음이 옳지 못하면 눈동자가 어둡다.”(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眊焉)라고 말씀하셨다. 외면에도 그 사람의 내면이 일정정도 투영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영 마뜩지 않았던 것은 내면을 중시하고자 했던 나의 철없는 고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로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보려고 무던 애를 쓰는 꽤 괜찮은 습관이 생겼다.^^
2.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은 모든 인간은 그 정신 속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요소, 즉 남성은 아니마(여성적 영혼)를, 그리고 여성은 남성적인 아니무스(남성적 영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조화하고자 한다. 육체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있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원래 양성적이라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이성에게 투사되어 ‘매력’ 또는 ‘혐오감’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된다. 즉 남성의 경우 여성에게 아니마를 투사할 때 자기 아니마의 여성상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매력을 느끼고, 모순된 경우에는 혐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라는 시구는 그런 인간의 표현하기 힘든 무의식의 감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첫눈에 흠뻑 빠져버린다는 것, 괜시리 좋은 사람이 생기는 것, 그냥 믿고 싶은 사람이 덜컥 나타나는 것은 살다가 몇 번은 겪어보고 싶은 유쾌한 일이겠지만 융의 설명에 따르면 상대방을 보고 느끼는 황홀감이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상이라는 것이다. 조금 김이 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낭만이 아주 떨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별 이유도 없이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이제 설사 운명적으로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순순히 받아들일 정도의 마음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슬슬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안 될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도 있고 말이다.^^; 전에는 진실한 사랑은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추구하면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함께 이끌어 가는 사랑만큼이나 이끌리는 사랑, 어떤 힘에 질질 끌려가는 것도 무척 재미날 것 같다.
3.
초등학교 때 한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제법 진지하게 상담을 해왔다. (머리에 피가 넘치는 것들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나는 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설교를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관심이 있다’ ‘호감이 있다’부터 시작을 하지. 그 다음에는 ‘좋아한다’는 단어가 사용되겠고 그 다음 단계가 ‘사랑한다’가 아니겠니?”라면서 ‘사랑단계론’을 주절되면서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니. 그 단어를 함부로 쓰는 거 아니야?” (뜻빛깔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대충 이와 비슷한 말이었다) 보통 그런 상담이 들어올 때 “걱정마~ 잘 될거야! 힘내라 짜식~”이라며 격려를 해주는 게 대부분일텐데 찬물을 왕창 끼얹었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남 기쁘게 하는 것은 참 서툴다)
어릴 적의 장광설 이래로 사랑 혹은 연애에 대해 조금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견해를 가졌던 것 같다. 때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사랑의 본질은 슬픔, 아픔, 고달픔, 그리움, 두려움, 안타까움이라며 폄하하기 일쑤였다. (누가 보면 이별, 실연, 갖은 애증을 겪은 이의 말 같지만 연애경험 전무한 이의 제 멋대로의 상상이다) 이 생각을 바꾸게 해준 책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었다. 이는 무지막지한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침울한 결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째서 당신은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는 여자의 질문에 남자가 늘어놓는 근사한 답변이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고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물씬 들게 하는 공적을 남긴다.^^ “어째서냐구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어째서 태어났는지 물어보십시오. 꽃에게 어째서 피어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어째서 빛나는가를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비슷한 성격의 책으로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좁은문]을 들 수 있다. 두 책 모두 내가 싫어하는 종교색이 짙음에도 불구하고 따스하며 애절한 이야기가 나의 까다로운 성깔을 달랬던 것이다. 물론 좁은문은 기독교적 윤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강요하는 자기희생 정신에 대한 반성이 많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책 덕분에 신을 위한답시고 인간의 행복을 막고 고행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내가 종교 없이 살도록 해준 직접적인 계기를 이 책이 제공해주기도 했다.^^ 알리사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정말로 사랑을 희생할 만한 일이 있었을까?”라며 자신의 종교적 헌신에 의심을 풀지 않았다면 정말 입맛이 텁텁했을 소설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면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알리사와 제롬이 끝내 알콩달콩 사랑에 빠지지 못한 아쉬움은 알리사의 일기장 한 구절에서 폭발해 버린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4.
사랑과 가난은 감추지 못한다는 덴마크 속담이 있다고 한다. 연애질에 비교적 엄격했던 나이지만 아래 시를 선물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뒤늦게 고백해본다.^^; 이 대목에서는 칸트의 말씀을 핑계되며 물러선다.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사나이는 그 애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제대로 사랑을 고백하지도 못한다(호의도 제대로 보이지 못한다)” 이 시를 꺼내드는 이유는 내가 생각보다 그렇게 심한 목석이 아니라는 반증을 들어보이고 싶어서이다.^^
[아름다운 사람] - 헤르만 헤세
장난감을 얻은 어린 아이가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서, 기어이 부셔버리고
다음날엔 벌써 그것을 준 사람조차 잊는 것처럼
당신은 내가 드린 내 마음을
귀여운 장난감처럼 조그만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파하고 애태우는지를 돌보지 않는다.
(같은 제목의 시를 번역한 것에 제각각이다보니
내 취향에 맞게 적당한 단어를 골라서 짜 맞췄다^^)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고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 너무 흔해서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효용은 한없이 크게 보이고 비용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반성해 봐야겠다. 하지만 그간 사랑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며 일상사에서 흔히 쓰이는 ‘사랑한다’는 말조차 규제했던 지난날의 억지가 거의 잦아든 지금 세상은 넓고 사랑할 것은 구석구석에 널려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주지 않는 무심한 녀석일지도 모르겠지만 황량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인 차가운 신념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몸과 마음이 받아들이고 있다.
귀가 솔깃한 연애에 대한 소회를 늘어놓고자 했는데 딴 이야기들만 주절거렸다. 연애 경험도 없는 나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여자 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냐는 숱한 질문이 많았다. 일단은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 받을 만한 존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에 영 자신이 없다. 내 자신조차도 ‘연민으로서의 매력’을 가득하지만 ‘투자감 혹은 거래감으로서의 매력’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길게 생각하는 사람이 언제나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라고 괴테가 말했다. 남들 다 해본다는 연애나 이상형에 대한 실천적 모색보다는 소모적인 사념에 빠져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괴테는 이런 말도 했음을 알아주시길... “인간은 중요한 일을 결코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간 여남관계의 주된 관심사로서 양성 평등 문제에 천착했다면 이제는 내 청춘사업에도 그리 인색하지 않도록 해봐야겠다는 것을 밝힌다.^^
어느 순정만화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남자친구를 “정말 솔직하고 귀여운 사람”이라고 평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오홋 이런 숨겨둔 감수성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된다는 상상을 잠깐 해보니 가슴이 여간 뛰는 것이 아니다. 세르반테스는 사랑은 눈에 난 다래끼조차 진주알 같이 보이게 하는 안경을 쓰고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시력이 나빠서 난리인데 그 안경까지 끼고 어떻게 모진 세상 살아갈까 걱정도 되지만... 그 안경을 언젠가 집어 들어야 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 [憂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