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구 대학 졸업하다!
익구 2009. 3. 2. 03:05 |
1.
지난 2월 25일 대학교를 졸업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새내기처럼 지내다가 미적대지 말고 쿨하게 떠나자는 결심을 얼마나 지켰는지 모르겠다. 24일 도서관 마감 시간까지 그간 빌렸던 책을 대강 넘겨보고 모두 반납했다. 졸업일 전까지 대출 도서를 반납하라는 공지를 지키고 싶어서다. 마무리의 첫걸음은 아무래도 비움이나 내려놓음이다. 무사 졸업이라는 대업(?)을 이룬 지금 좀 더 간소해져서 어디든 옮길 준비를 해야겠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을 때 어느 외국 외교관이 “이처럼 즐겁지 않은 황제 즉위식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핀잔했다고 한다. 즉위식 당일 아침 고종은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여파였는지 행렬의 출발을 지연시키는 등 몽니를 부렸다. 아무리 좋은 의식이라도 설렘 만큼이나 두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흰 손(白手)을 뽐내야 하는 내 처지는 두려움이 설렘을 압도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졸업식 즈음해서는 끝맺음에 대한, 혹은 떠남에 대한 영감이 마구 떠오를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머리가 하얘졌다. 학생 신분은 벗어나지만 딱히 어디 거처를 마련한 곳은 없어서 대학 도서관을 이용한다는 핑계로 학교 출입이 잦을지도 모르겠다. 지역 도서관을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학교 도서관에 대한 향수를 금세 지우지 못할 듯싶어서다. 책은 빌려주지 않아도 열람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오래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닌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수로부인에게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라고 노래했던 헌화가의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기에 아름다웠다. 있을 때 잘하고 아쉬울 때 내려오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미련에 허덕이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다. 나는 내가 졸업을 했답시고 미련한 젊음 대신 유능한 점잖음을 택하고, 우직한 고집 대신 표변하는 영특함을 예찬할까 아슬아슬하다. 내 지인들에게 평소처럼 나를 따끔하게 꼬집어주었기를 재차 부탁했다.
내가 존경하는 위인 가운데 한 분이 잠곡 김육 선생님이다. 격렬한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칠순이 넘어서도 대동법(大同法) 확대 실시에 일생을 걸었던 잠곡의 신념을 흠모한다. 잠곡은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줄여나가는 노력의 전범으로서 내게 각인되었다. 당시 대동법 반대론자들도 공납의 폐단이 심각함을 알았지만 그네들은 호패법을 강화해 농민의 유망을 막자는 방책을 내놓았다. 잠곡은 백성을 통제하고 감시해서는 민생 안정을 이룰 수 없으니 호패법을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석탑의 뜰을 떠나며 잠곡의 정신, 대동법 정신을 이어 받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대동법과 호패법의 대립은 결론을 내리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또렷한 해답이 있기보다는 ‘비율과 조합’의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비율과 조합 앞에서는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열린 자세,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개개인의 각성을 존중하는 것이 비율과 조합의 문제를 푸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상론과는 달리 우리 사회는 특정한 각성만을 강요하고 상찬하기 일쑤다. ‘교정’의 대상이 아닌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이 우리 사회를 윤택하게 만든다. 나도 그 풍요로운 마음을 모으는데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보태길 희망한다.
2.
옛사람의 사귐에 대한 글을 묶은 『거문고 줄 꽂아놓고』라는 책에서 읽었던 일화가 자꾸 떠오른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벗 사귐에 차이가 컸던 모양이다. 정약전은 여항의 술꾼들과 가까이 지냈지만 정약용은 주로 깔끔한 엘리트들과 어울렸단다.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형제의 처지가 위태로워졌을 때 형의 벗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약전 형제를 잘 대해주는데 아우의 벗들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다산은 “이 점이 바로 내가 형님께 못 미치는 점!”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이래저래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밀기도 했다. 대학 시절 동안 얼마나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었는지 반성해본다.
2002년 대학 새내기 시절 나는 대학교 사람들에게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고등학교 친구들만 쫓아다녔다. 대학교 반 활동에 너무 소홀하다 보니 나중에 내가 돌아갈 자리가 딱히 없었다. 감사하게도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반을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여러 사람을 알게 되었고 나쁘게 말하면 대학에서의 교우관계가 좀 흩어져버린 셈이다. 내 어수선한 새내기 시절을 함께 보내준 원혁, 세일, 병채, 훈석, 현수(김), 아름이 등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이런 혼란이 있었지만 이게 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하려 했던 내 의지였기 때문에 크게 서운하지는 않다. 앞으로 사회에서 어떤 별 같은 분들을 만나 뵐지 모르겠지만 그 때에도 빈천지교(貧賤之交)를 나눈 대학 사람들, 고등학교 친구들을 찾아다닐 게다.
내가 반 활동이 늦은 편이라 선배님들, 동기들, 후배들을 뒤늦게 만났고 지금도 새로 만나고 있지만 그래서 더 각별했던 것 같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한 때나마 내가 여기 계속 머물러야 하는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고심 끝에 육두품이라도 좋고, 서얼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함께 하자고 결심했다. 육두품이라는 한계를 한탄하면서도 시무10조를 올려 흔들리는 신라를 바로잡으려 했던 최치원 선생님이, 서얼이라는 설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한 나라 조선을 고쳐야 한다며 <북학의>를 지었던 박제가 선생님이 되자는 허풍을 늘어놓았다.
자신들을 박절하게 대한 나라에게 애정을 쏟은 그 분들에 비하면 고대 경영 단결 飛반인들께 두터운 은혜를 입은 나는 그야말로 행운아니 좀 더 수월하게 본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능력이 모자라 그 마음을 다 지키지는 못했다. 지난해 4월 飛반인의 밤 행사 때 방명록에 生我者父母 知我者飛班也라고 썼다.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라는 관중의 유명한 말씀을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서 더 보탤 말이 없다. 내 졸업 인사를 한 해 전에 이미 써둔 셈이다. 너무 빨리 잊지 마시고 조금 천천히 잊어주시면 고맙겠다.
이제 갓 선배가 된 후배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없냐는 질문에 잔소리는 하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했는데 결과적으로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고종석 선생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모든 선배는 후배가 저보다는 나은 선배가 되길 바랄 테니 괜찮겠지?^^;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 후배 앞에서 많이 말하기보다는 많이 들으라고 조언했다.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후배들 말을 잘라먹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는 개인적인 경험담을 덧붙여서 말이다. 나도 후배들에게서 좀 더 많이 배우고 싶었는데 아쉽다. 나는 내 젊음을 알차게 쓰지도 못하면서 후배의 어림을 탐내는 못난 선배였다.
그저 바라만 봐도 아름다운 시기인 09학번 새내기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군소리일 테다. 조심스레 건넨다면 자신의 안목을 갈고 닦는 연습을 위해 의심을 해보길 권하고 싶다. “작은 의심을 품으면 조금 나아가고, 큰 의심은 크게 나아가며, 많이 의심해도 괜찮다. 그러므로 분명한 곳도 의문이 있는 것처럼 봐야한다(小疑則小進 大疑則大進 多著疑不妨, 故無疑處有疑看也)”라는 주희의 말씀이 참 좋다. 대학교 저학년 때는 의심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까. 나도 아직 내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에게 읽히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괴감이 드니 그리 만만한 요구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3.
학교 다니면서 저지른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졸업 무렵에 유독 생각났던 사건이 있다. 2006년의 일로 기억하는데 후배들과 함께 엠티 후발대를 가게 되었다. 기차표가 모자라서 무임승차를 해야 할 처지가 되자 내가 다음 기차를 기다리든가 아예 엠티를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시외버스를 타고 엠티 장소로 향했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을 덜 어기는 게 민주시민의 덕목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내가 좀 넘쳤다. 나는 내 고결함(?)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선배의 권위를 이용해 후배들을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끌고 다녔다. 그때 당시 후배들을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고마운 분들이 참 많지만 여기서 다 나열하다가는 전화번호부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배운 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건승하세요.^-^ - [無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