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익구
익구 2004. 5. 21. 07:11 |흔히 나를 보고 정치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내 누리집(홈페이지)을 다녀간 상당수의 손님들도 내게 그런 평을 내리기 일쑤다. 이러한 평이 얼마나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내가 가진 한 표의 권리를 소중히 행사하고 의사결정과정을 바라보며 혹시 삽질을 하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 굳이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색이 짙은 것이라면 기꺼이 그런 평가를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정치적 언동이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책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마 나의 죄목은 적당히 모두다 욕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만 너무 욕한 것에 있지 않을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지난 몇 년간 한나라당을 구박한 무수한 말글들을 보면 내 고약한 심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또한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이 생산적인 논쟁보다는 나란 인간에 대한 막연한 편견의 벽을 쌓게 하는데 일조하지 않았냐는 생각이다.
최근에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한다고 외치면서 나란 녀석의 표지 중에 우리당 지지자라는 강력한 낙인을 찍기도 했다. (한 친구는 내 홈페이지에 잠깐 들어섰던 열리우리당 로고를 본 후에 익구닷컴에 발길이 끊어졌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나이지만 내가 믿고 지지하는 바를 밝히는 것에서 오는 불이익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기실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애초부터 불이익을 감수해야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표현의 자유에도 비용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도한 비용 지출을 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는 어느 정당의 지지자이거나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내는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편파적일 권리를 가진다. 다만 그 편파성이란 타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이름지어지는 것일 뿐, 그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상식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옳고 내 가치가 보다 적실성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타인의 눈에는 내가 편파적일지 모르지만, 내 자신이 보기에는 나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논거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다고 믿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만큼이나 타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이며, 생각의 자유를 주창하는 자유주의이며, 다양성을 긍정하는 다원주의이다. 내 방식이 옳고 재미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자유지만, 마주보고 있는 저 친구의 세계관과 행동양식 또한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다만 자신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나머지 객관적 사실도 왜곡하고, 명백한 오류를 시인하지 않는 오만을 부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몇 가지를 경계하면 우리는 “인간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관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 내부에 있는 개성적인 것을 모조리 마멸시켜 하나같이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고려해서 부과된 범위 안에서 그 개성적인 것을 육성하고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익구라는 녀석의 당파성 혹은 정치적 견해란 무엇이길래 이렇게 정치에 관심이 많다느니, 정치색이 짙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하는 것일까? 대개는 노무현 지지자, 노사모, 우리당 지지자로서의 딱지만을 붙일 뿐이다. 익구를 아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란 인간의 다른 가치를 보여주지 못한 나의 나태함의 탓이 크겠지만 그런 딱지 하나로 나를 평가하는 분들께도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익구가 그런 대외적 지지를 표명하기까지 어떤 논거를 제시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과는 관련 없이 일상생활 속에서 익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는 크게 전달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스스로의 필요성에 의해서라도 다음과 같이 익구 생각의 고갱이를 정리해보겠다.
첫째, 익구는 자유주의자로서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상도덕을 준수하는 것을 신조로 한다. 여기서 상도덕이란 모든 종류의 시장에서 룰을 준수하며 공정히 경쟁하기, 자기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 평가와 그에 따른 적절한 책임지기, 비용의 균등한 분담과 채무관계의 정확한 기록과 확실한 변제 등을 삶의 원리로 하는 것이다. 물론 유능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합당한 보상받는 것은 중요하다. 능력과 노력의 차이를 보상의 차이로 대응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영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역사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시장의 승리자에게 응분의 보상이 주어지는 정당한 불평등이 때로는 우리의 미감을 거스르더라도 게임의 룰을 지켰다면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고종석 선생의 지적대로 덤의 보상에는 절제가 수반되어야 하고 그것이 평등감각과 정의감각에 합치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집단의 선택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이상 국가나 집단이 그 개인의 결정에 감놔라 배놔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자유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와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자유선거에 의해 권력자를 선출하는 의회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다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믿고 지지한다. 익구가 바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은 사실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자유권들이 제대로 실현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법적 가치만 제대로 발현된다면 딱히 욕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상과 양심을 구속하는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본적으로 추구한다고 했을 때 경제적 자유주의는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광풍이 자본의 횡포를 조장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고, 정부가 적절한 개입으로 이를 방어하고 부당한 차별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정치 영역과 마찬가지로 경제활동의 자유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정부의 쓸데없는 규제는 철폐되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 오늘날 험난한 세계화의 파고에 대응하는 생존수단이 될 것이다. 광신적 시장론자들은 질색이지만 WTO, FTA 같은 자유무역질서를 부인하는 것도 어리석은 처사다. 다만 개방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도록 부지런히 방벽을 쌓아야 한다.
둘째, 익구는 개인주의자로서 집단에 피신하지 않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남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나는 타인과의 차이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차별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개성의 향연을 누리면서도 그런 개성들 사이에 현저하게 다른 가치가 부여되지 않도록 하는 세상이다.
또한 내 자신이 이기적 효용함수를 가졌으며, 이타주의적 희생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을 천명한다. 미국의 철학가,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말처럼 “난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 살거나 다른 사람더러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라는 전체주의적 억압에 콧방귀를 뀔 것이다. 또 집단의 이름으로 내 개인이나 다른 개인의 이익이 심하게 훼손될 때 언짢은 소리하는 것을 크게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소수파가 되었을 때의 불편함과 두려움을 다수파가 되어서도 잃지 않는 양심적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모든 면에서 다수파일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소수파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개인주의가 내세우는 똘레랑스는 일종의 보험이다. 물론 남과 다른 것에 마음을 열어야하는 보험료는 그리 싼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보험료의 부담쯤이야 마음 편히 소수파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보험금의 혜택에 비추어볼 때 확실히 남는 장사로 보인다.^^: 이처럼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며, 궁극적 소수로서의 다른 개인과의 연대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양성평등의 실현을 위해 힘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 것은 자유주의 미감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사실 내가 양성평등을 입에 달고 있는 것은 여성의 권익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내 멋대로 살고픈 참을 수 없는 자유주의적 열망 때문이다. 결국 남을 도우려는 것이 아닌, 내가 편하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의 발로이다.^^
부당한 불평등의 대표주자인 여남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의 권리신장과 기회균등을 위해 남성으로서의 쥐꼬리만한 기득권도 내어줄 용의가 충만하다. 나는 양성평등한 사회가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이로움을 가져다주며 사회전체적인 후생도 증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라는 거짓된 이데아가 지배하는 세상의 숨막힘이 정말 싫다. 이러한 폭압적 구조 하에서 나는 남는 장사를 벌이지 못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남자다운 ‘척’ 하는 비용을 다른 곳에 투자하고 싶은데, 투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의 불편함이 양성평등을 외치는 이유다. 페미니스트라는 수사학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오해받기 십상인 세태이지만, 혹시라도 내게 그런 혐의가 씌워진다면 기꺼이 자수하겠다.^^;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즘보다는 양성평등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쓰고 있지만 말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양성평등은 남자인 나를 위해서이니까 말이다)
넷째, 익구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방법론으로 삼는다.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할 생각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실현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악,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애쓰라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뜻이다. 즉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식의 목적의 왕국인 셈이다.
추상적인 이상에 대한 합의는 참 어렵다. 특히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나로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쪽으로 끌어온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서로간에 차이점을 확인하고 시사점을 발견해서 자기교정의 계기로 삼는 것으로 그치기 일쑤이다. 내가 혁명의 열정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이 무지막지한 차이의 세계를 하나의 구호로 묶는 것에 자신이 없다는 소심함의 발로이다. 또한 설혹 어찌어찌 해서 꾸려진 유토피아가 개개인의 효용을 극대화시켜 줄지도 매우 의심스럽다. 그래서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만 악에 대한 인식이 같다면 이를 오늘의 시점에서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는 너무 매끄럽지 못하고 두루뭉술한 수단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매끈함을 핑계로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내 성격이 특별히 모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계적 중립성에 나를 묶어두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나와 교류하는 모든 이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교적 분명히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려고 노력했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생채기 받는 것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럼에도 나를 아프게 하는 비판이 있다면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데, 너의 생각이 모든 사람의 생각인양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이다. 한 번은 나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침묵은 동의에 불과하니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여전히 침묵은 유효한 보신책이며 최상의 방책이다.
나는 내 의견이 여러 가지 정황을 분석해볼 때 비교적 타당하다고 주장을 하겠지만, 내가 전적으로 옳다고 오기를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지만, 이를 틀린 의견이라며 구박하는 이들을 적당히 방어할 것이다. 파시스트가 아니라면 나와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해 조금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사안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이걸 못 참는 자들이 사상의 자유시장에 득시글댄다면 시장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 우리의 부싯돌은 부딪힐수록 빛이 난다는 볼테르의 말을 상기하자. 생각끼리 부딪히지 않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암흑에 불과하다.^^;
“네 말마따나, 지금 네 정도의 성향도 극렬 좌파라 오해받는, 명문대 경영학도들의 무관심과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너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너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게 아니길, 이 정도도 오해받는데 더 반대편으로 기울면 어떻게 하지 소심해하는 게 아니길 바란다.”
날라리 우파 정도의 위치잡기(포지셔닝)를 한 내게 한 선배께서 위와 같은 충고를 해주셨다. 하기야 내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옹호 정도를 역설해도 불온하거나 극단적이라고 보는 눈초리들이 차고 넘쳤다. 나는 오른쪽으로 많이도 아니고 욕먹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어왔고 내 자신이 온갖 눈치를 동원하는 소심한 녀석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특이한 녀석으로 취급되고 백안시되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다. 바쁜 세상에 내 의견을 꼼꼼히 들어줄 필요도 없고, 내 논리를 면밀히 검토해서 반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느긋함을 보여줬으면 한다.
익구는 앞으로도 사회 의사결정과정으로서의 정치의 다양한 모습들에 관심을 가지는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이다. 앞으로도 바지런히 눈치를 보고 살겠지만, 때로는 내 사상과 양심에 비추어 ‘편들기’를 마다하지 않겠다. 내가 늘 감수하겠다고 하지만 오해받는 두려움이 달콤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늘 무척 쓴맛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려야 했지만 앞으로도 그 씁쓸함이 내 곁을 떠나지는 않을 것 같다. - [憂弱]
아마 나의 죄목은 적당히 모두다 욕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만 너무 욕한 것에 있지 않을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지난 몇 년간 한나라당을 구박한 무수한 말글들을 보면 내 고약한 심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또한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이 생산적인 논쟁보다는 나란 인간에 대한 막연한 편견의 벽을 쌓게 하는데 일조하지 않았냐는 생각이다.
최근에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한다고 외치면서 나란 녀석의 표지 중에 우리당 지지자라는 강력한 낙인을 찍기도 했다. (한 친구는 내 홈페이지에 잠깐 들어섰던 열리우리당 로고를 본 후에 익구닷컴에 발길이 끊어졌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나이지만 내가 믿고 지지하는 바를 밝히는 것에서 오는 불이익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기실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애초부터 불이익을 감수해야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표현의 자유에도 비용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도한 비용 지출을 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는 어느 정당의 지지자이거나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내는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편파적일 권리를 가진다. 다만 그 편파성이란 타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이름지어지는 것일 뿐, 그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상식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옳고 내 가치가 보다 적실성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타인의 눈에는 내가 편파적일지 모르지만, 내 자신이 보기에는 나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논거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다고 믿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만큼이나 타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이며, 생각의 자유를 주창하는 자유주의이며, 다양성을 긍정하는 다원주의이다. 내 방식이 옳고 재미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자유지만, 마주보고 있는 저 친구의 세계관과 행동양식 또한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다만 자신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나머지 객관적 사실도 왜곡하고, 명백한 오류를 시인하지 않는 오만을 부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몇 가지를 경계하면 우리는 “인간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관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 내부에 있는 개성적인 것을 모조리 마멸시켜 하나같이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고려해서 부과된 범위 안에서 그 개성적인 것을 육성하고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익구라는 녀석의 당파성 혹은 정치적 견해란 무엇이길래 이렇게 정치에 관심이 많다느니, 정치색이 짙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하는 것일까? 대개는 노무현 지지자, 노사모, 우리당 지지자로서의 딱지만을 붙일 뿐이다. 익구를 아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란 인간의 다른 가치를 보여주지 못한 나의 나태함의 탓이 크겠지만 그런 딱지 하나로 나를 평가하는 분들께도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익구가 그런 대외적 지지를 표명하기까지 어떤 논거를 제시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과는 관련 없이 일상생활 속에서 익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는 크게 전달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스스로의 필요성에 의해서라도 다음과 같이 익구 생각의 고갱이를 정리해보겠다.
첫째, 익구는 자유주의자로서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상도덕을 준수하는 것을 신조로 한다. 여기서 상도덕이란 모든 종류의 시장에서 룰을 준수하며 공정히 경쟁하기, 자기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 평가와 그에 따른 적절한 책임지기, 비용의 균등한 분담과 채무관계의 정확한 기록과 확실한 변제 등을 삶의 원리로 하는 것이다. 물론 유능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합당한 보상받는 것은 중요하다. 능력과 노력의 차이를 보상의 차이로 대응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영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역사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시장의 승리자에게 응분의 보상이 주어지는 정당한 불평등이 때로는 우리의 미감을 거스르더라도 게임의 룰을 지켰다면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고종석 선생의 지적대로 덤의 보상에는 절제가 수반되어야 하고 그것이 평등감각과 정의감각에 합치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집단의 선택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이상 국가나 집단이 그 개인의 결정에 감놔라 배놔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자유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와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자유선거에 의해 권력자를 선출하는 의회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다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믿고 지지한다. 익구가 바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은 사실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자유권들이 제대로 실현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법적 가치만 제대로 발현된다면 딱히 욕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상과 양심을 구속하는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본적으로 추구한다고 했을 때 경제적 자유주의는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광풍이 자본의 횡포를 조장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고, 정부가 적절한 개입으로 이를 방어하고 부당한 차별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정치 영역과 마찬가지로 경제활동의 자유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정부의 쓸데없는 규제는 철폐되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 오늘날 험난한 세계화의 파고에 대응하는 생존수단이 될 것이다. 광신적 시장론자들은 질색이지만 WTO, FTA 같은 자유무역질서를 부인하는 것도 어리석은 처사다. 다만 개방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도록 부지런히 방벽을 쌓아야 한다.
둘째, 익구는 개인주의자로서 집단에 피신하지 않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남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나는 타인과의 차이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차별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개성의 향연을 누리면서도 그런 개성들 사이에 현저하게 다른 가치가 부여되지 않도록 하는 세상이다.
또한 내 자신이 이기적 효용함수를 가졌으며, 이타주의적 희생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을 천명한다. 미국의 철학가,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말처럼 “난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 살거나 다른 사람더러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라는 전체주의적 억압에 콧방귀를 뀔 것이다. 또 집단의 이름으로 내 개인이나 다른 개인의 이익이 심하게 훼손될 때 언짢은 소리하는 것을 크게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소수파가 되었을 때의 불편함과 두려움을 다수파가 되어서도 잃지 않는 양심적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모든 면에서 다수파일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소수파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개인주의가 내세우는 똘레랑스는 일종의 보험이다. 물론 남과 다른 것에 마음을 열어야하는 보험료는 그리 싼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보험료의 부담쯤이야 마음 편히 소수파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보험금의 혜택에 비추어볼 때 확실히 남는 장사로 보인다.^^: 이처럼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며, 궁극적 소수로서의 다른 개인과의 연대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양성평등의 실현을 위해 힘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 것은 자유주의 미감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사실 내가 양성평등을 입에 달고 있는 것은 여성의 권익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내 멋대로 살고픈 참을 수 없는 자유주의적 열망 때문이다. 결국 남을 도우려는 것이 아닌, 내가 편하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의 발로이다.^^
부당한 불평등의 대표주자인 여남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의 권리신장과 기회균등을 위해 남성으로서의 쥐꼬리만한 기득권도 내어줄 용의가 충만하다. 나는 양성평등한 사회가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이로움을 가져다주며 사회전체적인 후생도 증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라는 거짓된 이데아가 지배하는 세상의 숨막힘이 정말 싫다. 이러한 폭압적 구조 하에서 나는 남는 장사를 벌이지 못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남자다운 ‘척’ 하는 비용을 다른 곳에 투자하고 싶은데, 투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의 불편함이 양성평등을 외치는 이유다. 페미니스트라는 수사학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오해받기 십상인 세태이지만, 혹시라도 내게 그런 혐의가 씌워진다면 기꺼이 자수하겠다.^^;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즘보다는 양성평등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쓰고 있지만 말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양성평등은 남자인 나를 위해서이니까 말이다)
넷째, 익구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방법론으로 삼는다.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할 생각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실현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악,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애쓰라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뜻이다. 즉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식의 목적의 왕국인 셈이다.
추상적인 이상에 대한 합의는 참 어렵다. 특히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나로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쪽으로 끌어온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서로간에 차이점을 확인하고 시사점을 발견해서 자기교정의 계기로 삼는 것으로 그치기 일쑤이다. 내가 혁명의 열정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이 무지막지한 차이의 세계를 하나의 구호로 묶는 것에 자신이 없다는 소심함의 발로이다. 또한 설혹 어찌어찌 해서 꾸려진 유토피아가 개개인의 효용을 극대화시켜 줄지도 매우 의심스럽다. 그래서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만 악에 대한 인식이 같다면 이를 오늘의 시점에서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는 너무 매끄럽지 못하고 두루뭉술한 수단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매끈함을 핑계로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내 성격이 특별히 모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계적 중립성에 나를 묶어두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나와 교류하는 모든 이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교적 분명히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려고 노력했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생채기 받는 것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럼에도 나를 아프게 하는 비판이 있다면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데, 너의 생각이 모든 사람의 생각인양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이다. 한 번은 나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침묵은 동의에 불과하니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여전히 침묵은 유효한 보신책이며 최상의 방책이다.
나는 내 의견이 여러 가지 정황을 분석해볼 때 비교적 타당하다고 주장을 하겠지만, 내가 전적으로 옳다고 오기를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지만, 이를 틀린 의견이라며 구박하는 이들을 적당히 방어할 것이다. 파시스트가 아니라면 나와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해 조금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사안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이걸 못 참는 자들이 사상의 자유시장에 득시글댄다면 시장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 우리의 부싯돌은 부딪힐수록 빛이 난다는 볼테르의 말을 상기하자. 생각끼리 부딪히지 않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암흑에 불과하다.^^;
“네 말마따나, 지금 네 정도의 성향도 극렬 좌파라 오해받는, 명문대 경영학도들의 무관심과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너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너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게 아니길, 이 정도도 오해받는데 더 반대편으로 기울면 어떻게 하지 소심해하는 게 아니길 바란다.”
날라리 우파 정도의 위치잡기(포지셔닝)를 한 내게 한 선배께서 위와 같은 충고를 해주셨다. 하기야 내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옹호 정도를 역설해도 불온하거나 극단적이라고 보는 눈초리들이 차고 넘쳤다. 나는 오른쪽으로 많이도 아니고 욕먹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어왔고 내 자신이 온갖 눈치를 동원하는 소심한 녀석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특이한 녀석으로 취급되고 백안시되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다. 바쁜 세상에 내 의견을 꼼꼼히 들어줄 필요도 없고, 내 논리를 면밀히 검토해서 반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느긋함을 보여줬으면 한다.
익구는 앞으로도 사회 의사결정과정으로서의 정치의 다양한 모습들에 관심을 가지는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이다. 앞으로도 바지런히 눈치를 보고 살겠지만, 때로는 내 사상과 양심에 비추어 ‘편들기’를 마다하지 않겠다. 내가 늘 감수하겠다고 하지만 오해받는 두려움이 달콤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늘 무척 쓴맛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려야 했지만 앞으로도 그 씁쓸함이 내 곁을 떠나지는 않을 것 같다. - [憂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