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구가 대학생이 되기까지
익구 2003. 11. 16. 04:12 |아직도 고등학교 졸업한 그 시원섭섭한 기분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데 세월은 부지런히 달려서 저학번 저학년으로서의 시절마저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이제 제법 대학물을 먹어서 한층 의젓해져 보이고 지금까지 부대끼며 용케도 잘 버텨준 나에 대해 스스로 대견스러움을 표해 본다. 그러고 보면 한편으로는 참 대학이라는 곳을 참 어이없이 굴러들어 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 수험생들의 대다수가 그렇듯이 나 또한 대학이나 학과를 선생님 조언에 따라 후닥닥 정해버린 학생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인지 이제 고대생으로서, 경영학도로서의 내가 쏟는 애정은 날이 갈수록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나는 수시모집 예비대학 전형으로 고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예비대학은 고대 주최 경시대회 입상자와 각 학교에서 내신성적 우수자를 추천 받아 모집한 학생들에게 고대를 홍보하고 교양강좌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이를 마친 학생들에게 수시모집에서 특전을 부여하는 것인데 운 좋게도 내가 거기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나는 한문 경시대회 장려상 입상으로 예비대학에 참가하게 된다. 경시대회 중에서 가장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취급되던 한문 경시대회에서, 그것도 가장 낮은 상위인 장려상을 발판 삼아 고대 경영학도가 된 것이다.^^; 경시대회 시상식에서 한문 경시대회는 맨 끝 순서였고, 당연히 장려상은 맨 나중에 호명되므로 나는 끝에서 몇 번째로 상을 타야했던 지루한 기다림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래도 감지덕지인 것은 민족 고대라고 해서 전통을 중시하는 학풍이 아직 남아 있다보니 한문 등에 대한 관심을 가져주고 있는 고대 덕분에 이렇게 대학생으로 안온하게 지내고 있다. (아직도 고대는 다른 대학에 비해 한문관련 강좌가 많이 개설되어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문 경시대회에 참가해서 가까스로 입상을 하게 된 과정도 참 웃기다. 고등학교 2학년 11월에 한자능력검정시험으로 3급 자격증을 딴 나는 고3 5월에 2급 자격증에 도전하게 된다. 고3 수험생의 일탈에 손가락질도 좀 받았지만, 그 때는 무식하게 한자 써대며 외우는 것 만한 낙이 없던 터라 짬을 내어 공부해서 다행히 2급 자격증을 따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고대에서 주최한 경시대회 한문분야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한자’와 ‘한문’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지만 대충 머릿속에 많이 싸돌아다니는 한자들을 조합해서 때려 맞힌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장려상 턱걸이를 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어쨌든 이로써 예비대학 참가자격을 얻게 된 나는 예비대학을 재미나게 마치고, 2학기 수시모집을 대비한 입시 전략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대학으로 고대를 꼽게 된다. 여기서 그간 은밀히 감춰왔던 비밀을 공개하겠다. 이로써 내가 어쩌다가 경영학도가 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비대학 참가자에게 학교에서 내려온 공문에는 지원가능한 학과가 배정되어 있었다. 내게는 경영대, 법과대, 문과대가 배정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워낙 법대, 법대 하는 분위기에 넘어가서 법학과를 지망해 볼까라는 마음이 조금 있었지만, 막상 기회가 주어지니 어느 정도 불리한 내신성적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곧 단념해버렸다.
법대를 제외하니 경영대와 문과대가 남았다. 평소 사회학과, 국문학과 등의 문과대 관련 학과들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처음에는 문과대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내심 정치외교학과나 행정학과가 있는 정경대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문과대를 택하려는 분위기가 마구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예비대학 전형이라는 좋은 조건까지 있는데 기왕이면 경영대에 지원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반응들이 쏟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까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던 경영학과에 대한 고민을 그제서야 시작했고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던 중에 경영학도이시던 당시 수학 과외형이 해주신 “경영학이 그리 어렵지 않고 재미난 점이 많은 학문이다” 비슷한 말 한마디에 넘어가 버렸다. 고심 끝에 빵을 위한 학문에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는 솔직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결국 예비대학은 1지망 경영대, 2지망 문과대, 3지망 법과대로 결정했고, 다행히도 1지망 경영대학으로 예비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8월 말부터는 본격적인 2학기 수시모집 시기가 도래했고, 나는 고대 경영학과를 비롯해서 연대 사회학과, 서강대 경영학부, 외대 정치행정계열 네 군데에 원서를 집어넣었다. 연대 사회학과는 어릴적 꿈이던 사회학자를 좇아서 지원해 본 것이고, 서강대 경영학부는 고대 경영대를 준비하면서 공부 범위를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특히 외대에서 어문계열도 아닌 정치행정계열을 넣은 것은 고대 예비대학 배정 대학에 정경대가 배정되지 않은 아쉬움의 발로였다. 고대 예비대학 전형은 경쟁률인 2 대 1로 고정되어 있었고, 나머지 대학들의 경쟁률은 연대가 13.86 대 1, 서강대 10.48 대 1, 외대 28.5 대 1로 확률상 고대 입성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임이었다.
나는 1차에서 연대와 외대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스레 서강대는 1차를 붙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고대의 경우는 예비대학 전형은 곧바로 2차 전형으로 직행하는 것이었고, 결국 4개 중에 2개의 대학이 1차를 붙고 2차 전형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가 일정이 빠른 터라 먼저 논술, 면접 시험이 있었고 그 때가 2001년 9월 14일이었다. 지금은 LG-POSCO 경영관까지 완공되어 여기저기 질투의 눈초리를 받고 있지만, 그 때 당시의 경영대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게다가 중앙광장 공사가 한창이어서 무척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학교 배치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2년여만에 경영관 주변 풍경들은 많이 바뀌어 버렸다.
논술 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영관 어느 강의실에 앉은 나는 통일에 대한 내용을 벼락치기로 준비하며 논술 시험을 기다렸다. 영어 제시문 등장하는 통합 논제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지만 애써 담담하려고 노력했다. 주제는 ‘언어’였고, 다행히 습작을 한 번 해둔 적이 있어서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글을 느리게 쓰는 나는 논술 시험 같이 제한된 시간에 글을 쓰는 것에 영 소질이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터라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달래며 부지런히 써내려갔다. 제한 시간에서 2분 정도 넘기기는 했지만 분량을 다 채우고, 뺏기다시피 논술 답안지를 내고 1차전을 마무리했다.
논술 시험을 마친 후 지금은 공사로 사라진 경영관 앞 매점에서 빵 한 조각과 바나나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 무거운 마음으로 면접 시험 전까지 학교를 배회했다. 그러던 중에 이비에스 방송국 인터뷰에 응하게 되어 몇 초간이나마 방송에 나오는 최초의 경험까지 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영관 본관 1층의 화장실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화장실을 들른 나는 다시 이 화장실을 들를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나만 이 유치한 짓거리를 한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발견한 ‘아무개 04학번 되어 다시 온다’라는 문구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다. 하기사 대한민국 고3 수험생만큼이나 마음 여려지고 빌기 잘하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오후 1시 학우강당에 모여 면접 순서를 기다렸다. 수시 모집 확대 원년에서 불었던 심층면접 열풍에 휩싸여 이런저런 잡식들을 꾸역꾸역 채워넣은 나는 한 보따리나 되는 자료더미들을 불안하게 넘겨보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내가 속한 조 24명중에 12번째로 면접을 보게 되었다. 별 것도 아니지만 평소 좋아하는 숫자인 12가 걸린 것에 쾌재를 부르면서도 이런 것을 짜맞추는 마음에 이내 처량해졌다. 4시가 넘어서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뒤적거리던 책과 서류뭉치를 주섬주섬 챙겨서 면접장소로 향했다. 크게 한숨을 쉬었던 기억은 분명한데 그 때의 광경을 재연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나 가공할 만한 영어 제시문 앞에 쩔쩔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실로 무거운 걸음을 옮겨야 했다. 이 문장을 해석하라는 질문에 몇 번 버벅거리다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 어쨌든 의사결정에 대한 두 상반된 견해의 영어 제시문에 대한 물음을 이것저것 답하면서 실패한 문장 해석의 상흔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영어 면접이 끝나고 이어진 기본소양 면접은 인터넷과 정치참여 등에 관한 문제였는데 당시 있었던 필리핀의 피플파워 등을 예시하며 익구 특유의 낙관적인 해법을 그럭저럭 늘어놓았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면접이었지만 놓친 영어 해석에 대한 아쉬움은 내내 나를 짓눌렀다. 그 문장에 포함된 단어 중에서 secure와 severe를 헷갈려서 해석한 것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면접은 두 분의 교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두 분은 지청, 장하성 교수님이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고대역에서 집으로 오면서 면접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갖 슬픈 척은 다하는 호들갑을 떨었다. 그 때 내게 위안이 되었던 것이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능력에 버거운 일을 맡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자신의 능력 전부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이었다. 소심한 나로서는 앞으로 이런 가슴 뛰는 두려운 일 앞에 서야될 일이 많으니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어쨌든 합격자 발표날까지 무척이나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아마도 그 날이 개천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오차는 ±1일) 휴일이라 학교 자습도 5시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자다가 대략 8시쯤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놓고 여기저기 들어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대 누리집에 들어갔는데, 이게 웬일 합격자 발표가 떡하니 뜬 것이 아닌가... 당초 공고보다 하루이틀 정도 빨리 발표가 난 것이었다. 그런데 초긴장의 상태로 보내야 할 그 순간을 너무나 허망하게도 잠결에 합격 여부를 확인하고 말았다. 아 다행스레 합격 되었구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엄마에게 한 마디... “합격자 발표 나왔는데 붙었네.” 엄마의 한 마디... “아 그래? 잘 됐구나...” 정말 너무 쿨하다 못해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그 날의 풍경이었다.^^;
어쨌든 수시 모집의 수혜자가 되어 수능시험도 별로 떨지도 않고 평안하게 해치우고, 잠시 숨 돌리다보니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내일모레면 나름대로 고학년이 되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고대라는 공간에서 얼치기 경영학도로 지내온 세월도 이제 제법 무게를 더해가려는 찰나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수험시절에 지원했던 학교 중에서 연대가 있었다. 어릴적 멋도 모르고 그려보던 사회학자의 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점수 맞춰 대충 지원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역사에서 가정을 들이미는 것은 언제나 촌스런 짓이지만 만약 덜컥 붙어버렸다면 어찌했을까. 연대 사회학도로서의 익구와 고대 경영학도로서의 익구 중에서 무엇을 선택했을지는 아직도 결론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본인은 사회학도가 되겠다는 제스추어를 보내면서도,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얼치기 경영학도의 빵을 선택했으리라는 것이 다수설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가끔씩은 지금 가진 큰 빵보다 못 먹어본 작은 빵이 더 그립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누구나 잘 빠지기 쉬운 인식 오류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소속된 고대 경영대는 ‘고대 속의 연대’라 불리우는 개인주의 문화를 자랑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여담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연대를 참 좋아한다.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연대하면 떠오른다는 개인주의 문화와 세련된 감수성이 내 코드와 맞다고 자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연대는 고대를, 고대는 연대를 닮아가고 있어서 두 학교가 비슷해지고 있다고 하니 이런 분석들도 다 옛말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 혹자들은 불평하고 괄시하지만 나는 이런 경영대의 학풍이 끔찍이도 좋다. 다만 조금 지나친 점이 있다면 다듬으면 될 일이다. 개인주의 물결이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그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 내가 부대끼는 경영대는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런 보금자리다.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겠지만, 그렇지는 않아도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딛고 있는 곳을 좋아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의 불만과 내 배움과 익힘의 조악함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그냥 너그럽게 씨익 웃어버리고 마는 것 같다. 가끔씩 녹차 한 잔 마시며 고3 수험시절의 그 뜨겁고 우습던 나를 추억하는 재미는 참 쏠쏠하다. - [憂弱]
나는 수시모집 예비대학 전형으로 고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예비대학은 고대 주최 경시대회 입상자와 각 학교에서 내신성적 우수자를 추천 받아 모집한 학생들에게 고대를 홍보하고 교양강좌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이를 마친 학생들에게 수시모집에서 특전을 부여하는 것인데 운 좋게도 내가 거기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나는 한문 경시대회 장려상 입상으로 예비대학에 참가하게 된다. 경시대회 중에서 가장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취급되던 한문 경시대회에서, 그것도 가장 낮은 상위인 장려상을 발판 삼아 고대 경영학도가 된 것이다.^^; 경시대회 시상식에서 한문 경시대회는 맨 끝 순서였고, 당연히 장려상은 맨 나중에 호명되므로 나는 끝에서 몇 번째로 상을 타야했던 지루한 기다림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래도 감지덕지인 것은 민족 고대라고 해서 전통을 중시하는 학풍이 아직 남아 있다보니 한문 등에 대한 관심을 가져주고 있는 고대 덕분에 이렇게 대학생으로 안온하게 지내고 있다. (아직도 고대는 다른 대학에 비해 한문관련 강좌가 많이 개설되어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문 경시대회에 참가해서 가까스로 입상을 하게 된 과정도 참 웃기다. 고등학교 2학년 11월에 한자능력검정시험으로 3급 자격증을 딴 나는 고3 5월에 2급 자격증에 도전하게 된다. 고3 수험생의 일탈에 손가락질도 좀 받았지만, 그 때는 무식하게 한자 써대며 외우는 것 만한 낙이 없던 터라 짬을 내어 공부해서 다행히 2급 자격증을 따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고대에서 주최한 경시대회 한문분야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한자’와 ‘한문’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지만 대충 머릿속에 많이 싸돌아다니는 한자들을 조합해서 때려 맞힌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장려상 턱걸이를 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어쨌든 이로써 예비대학 참가자격을 얻게 된 나는 예비대학을 재미나게 마치고, 2학기 수시모집을 대비한 입시 전략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대학으로 고대를 꼽게 된다. 여기서 그간 은밀히 감춰왔던 비밀을 공개하겠다. 이로써 내가 어쩌다가 경영학도가 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비대학 참가자에게 학교에서 내려온 공문에는 지원가능한 학과가 배정되어 있었다. 내게는 경영대, 법과대, 문과대가 배정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워낙 법대, 법대 하는 분위기에 넘어가서 법학과를 지망해 볼까라는 마음이 조금 있었지만, 막상 기회가 주어지니 어느 정도 불리한 내신성적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곧 단념해버렸다.
법대를 제외하니 경영대와 문과대가 남았다. 평소 사회학과, 국문학과 등의 문과대 관련 학과들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처음에는 문과대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내심 정치외교학과나 행정학과가 있는 정경대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문과대를 택하려는 분위기가 마구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예비대학 전형이라는 좋은 조건까지 있는데 기왕이면 경영대에 지원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반응들이 쏟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까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던 경영학과에 대한 고민을 그제서야 시작했고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던 중에 경영학도이시던 당시 수학 과외형이 해주신 “경영학이 그리 어렵지 않고 재미난 점이 많은 학문이다” 비슷한 말 한마디에 넘어가 버렸다. 고심 끝에 빵을 위한 학문에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는 솔직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결국 예비대학은 1지망 경영대, 2지망 문과대, 3지망 법과대로 결정했고, 다행히도 1지망 경영대학으로 예비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8월 말부터는 본격적인 2학기 수시모집 시기가 도래했고, 나는 고대 경영학과를 비롯해서 연대 사회학과, 서강대 경영학부, 외대 정치행정계열 네 군데에 원서를 집어넣었다. 연대 사회학과는 어릴적 꿈이던 사회학자를 좇아서 지원해 본 것이고, 서강대 경영학부는 고대 경영대를 준비하면서 공부 범위를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특히 외대에서 어문계열도 아닌 정치행정계열을 넣은 것은 고대 예비대학 배정 대학에 정경대가 배정되지 않은 아쉬움의 발로였다. 고대 예비대학 전형은 경쟁률인 2 대 1로 고정되어 있었고, 나머지 대학들의 경쟁률은 연대가 13.86 대 1, 서강대 10.48 대 1, 외대 28.5 대 1로 확률상 고대 입성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임이었다.
나는 1차에서 연대와 외대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스레 서강대는 1차를 붙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고대의 경우는 예비대학 전형은 곧바로 2차 전형으로 직행하는 것이었고, 결국 4개 중에 2개의 대학이 1차를 붙고 2차 전형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가 일정이 빠른 터라 먼저 논술, 면접 시험이 있었고 그 때가 2001년 9월 14일이었다. 지금은 LG-POSCO 경영관까지 완공되어 여기저기 질투의 눈초리를 받고 있지만, 그 때 당시의 경영대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게다가 중앙광장 공사가 한창이어서 무척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학교 배치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2년여만에 경영관 주변 풍경들은 많이 바뀌어 버렸다.
논술 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영관 어느 강의실에 앉은 나는 통일에 대한 내용을 벼락치기로 준비하며 논술 시험을 기다렸다. 영어 제시문 등장하는 통합 논제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지만 애써 담담하려고 노력했다. 주제는 ‘언어’였고, 다행히 습작을 한 번 해둔 적이 있어서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글을 느리게 쓰는 나는 논술 시험 같이 제한된 시간에 글을 쓰는 것에 영 소질이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터라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달래며 부지런히 써내려갔다. 제한 시간에서 2분 정도 넘기기는 했지만 분량을 다 채우고, 뺏기다시피 논술 답안지를 내고 1차전을 마무리했다.
논술 시험을 마친 후 지금은 공사로 사라진 경영관 앞 매점에서 빵 한 조각과 바나나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 무거운 마음으로 면접 시험 전까지 학교를 배회했다. 그러던 중에 이비에스 방송국 인터뷰에 응하게 되어 몇 초간이나마 방송에 나오는 최초의 경험까지 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영관 본관 1층의 화장실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화장실을 들른 나는 다시 이 화장실을 들를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나만 이 유치한 짓거리를 한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발견한 ‘아무개 04학번 되어 다시 온다’라는 문구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다. 하기사 대한민국 고3 수험생만큼이나 마음 여려지고 빌기 잘하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오후 1시 학우강당에 모여 면접 순서를 기다렸다. 수시 모집 확대 원년에서 불었던 심층면접 열풍에 휩싸여 이런저런 잡식들을 꾸역꾸역 채워넣은 나는 한 보따리나 되는 자료더미들을 불안하게 넘겨보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내가 속한 조 24명중에 12번째로 면접을 보게 되었다. 별 것도 아니지만 평소 좋아하는 숫자인 12가 걸린 것에 쾌재를 부르면서도 이런 것을 짜맞추는 마음에 이내 처량해졌다. 4시가 넘어서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뒤적거리던 책과 서류뭉치를 주섬주섬 챙겨서 면접장소로 향했다. 크게 한숨을 쉬었던 기억은 분명한데 그 때의 광경을 재연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나 가공할 만한 영어 제시문 앞에 쩔쩔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실로 무거운 걸음을 옮겨야 했다. 이 문장을 해석하라는 질문에 몇 번 버벅거리다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 어쨌든 의사결정에 대한 두 상반된 견해의 영어 제시문에 대한 물음을 이것저것 답하면서 실패한 문장 해석의 상흔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영어 면접이 끝나고 이어진 기본소양 면접은 인터넷과 정치참여 등에 관한 문제였는데 당시 있었던 필리핀의 피플파워 등을 예시하며 익구 특유의 낙관적인 해법을 그럭저럭 늘어놓았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면접이었지만 놓친 영어 해석에 대한 아쉬움은 내내 나를 짓눌렀다. 그 문장에 포함된 단어 중에서 secure와 severe를 헷갈려서 해석한 것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면접은 두 분의 교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두 분은 지청, 장하성 교수님이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고대역에서 집으로 오면서 면접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갖 슬픈 척은 다하는 호들갑을 떨었다. 그 때 내게 위안이 되었던 것이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능력에 버거운 일을 맡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자신의 능력 전부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이었다. 소심한 나로서는 앞으로 이런 가슴 뛰는 두려운 일 앞에 서야될 일이 많으니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어쨌든 합격자 발표날까지 무척이나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아마도 그 날이 개천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오차는 ±1일) 휴일이라 학교 자습도 5시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자다가 대략 8시쯤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놓고 여기저기 들어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대 누리집에 들어갔는데, 이게 웬일 합격자 발표가 떡하니 뜬 것이 아닌가... 당초 공고보다 하루이틀 정도 빨리 발표가 난 것이었다. 그런데 초긴장의 상태로 보내야 할 그 순간을 너무나 허망하게도 잠결에 합격 여부를 확인하고 말았다. 아 다행스레 합격 되었구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엄마에게 한 마디... “합격자 발표 나왔는데 붙었네.” 엄마의 한 마디... “아 그래? 잘 됐구나...” 정말 너무 쿨하다 못해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그 날의 풍경이었다.^^;
어쨌든 수시 모집의 수혜자가 되어 수능시험도 별로 떨지도 않고 평안하게 해치우고, 잠시 숨 돌리다보니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내일모레면 나름대로 고학년이 되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고대라는 공간에서 얼치기 경영학도로 지내온 세월도 이제 제법 무게를 더해가려는 찰나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수험시절에 지원했던 학교 중에서 연대가 있었다. 어릴적 멋도 모르고 그려보던 사회학자의 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점수 맞춰 대충 지원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역사에서 가정을 들이미는 것은 언제나 촌스런 짓이지만 만약 덜컥 붙어버렸다면 어찌했을까. 연대 사회학도로서의 익구와 고대 경영학도로서의 익구 중에서 무엇을 선택했을지는 아직도 결론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본인은 사회학도가 되겠다는 제스추어를 보내면서도,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얼치기 경영학도의 빵을 선택했으리라는 것이 다수설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가끔씩은 지금 가진 큰 빵보다 못 먹어본 작은 빵이 더 그립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누구나 잘 빠지기 쉬운 인식 오류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소속된 고대 경영대는 ‘고대 속의 연대’라 불리우는 개인주의 문화를 자랑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여담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연대를 참 좋아한다.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연대하면 떠오른다는 개인주의 문화와 세련된 감수성이 내 코드와 맞다고 자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연대는 고대를, 고대는 연대를 닮아가고 있어서 두 학교가 비슷해지고 있다고 하니 이런 분석들도 다 옛말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 혹자들은 불평하고 괄시하지만 나는 이런 경영대의 학풍이 끔찍이도 좋다. 다만 조금 지나친 점이 있다면 다듬으면 될 일이다. 개인주의 물결이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그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 내가 부대끼는 경영대는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런 보금자리다.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겠지만, 그렇지는 않아도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딛고 있는 곳을 좋아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의 불만과 내 배움과 익힘의 조악함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그냥 너그럽게 씨익 웃어버리고 마는 것 같다. 가끔씩 녹차 한 잔 마시며 고3 수험시절의 그 뜨겁고 우습던 나를 추억하는 재미는 참 쏠쏠하다. - [憂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