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14일, 고 3 겨울방학 때 익구는 계속 미루던 [새즈믄해 큰다짐]을 선포했다. A4 용지 한 장에 사색의 짬을 엮어냈을 때는 꽤나 희열에 휩싸였지만 지금 보면 애들 장난도 이런 것이 없다.^^; 그 다짐의 내용을 소개한다.
하나, 나는 올바른 이상을 세우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하나, 나는 한결같음과 너그러움을 지닌다.
하나, 나는 건설적인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하나, 나는 진리탐구에 헌신하며 깨달은 것은 실천한다.
하나, 나는 끊임없이 사유하며 비판해서 그릇된 것을 고쳐 나간다.
1.
나의 이상주의는 1996년 1월 14일, 즉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뜬금없이 떠올랐던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는 꽤나 적극적인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익구의 사회철학’이라고 거창한 포장을 하며 기리고 있고 1월 14일을 ‘사색의 날’로 지정해 개인적인 명절로 지정하고 있다) 올바른 이상이란 ‘인간의 행복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는 단 하나의 전제조건을 두었다. 나는 이상을 세우는 것보다는 그것의 실현에 더 무게를 두었다. 그래서 현실과의 타협이 내게는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상의 실현을 위해 이상을 계속 깎아 내려가고, 현실과 타협하기 때문에 이상을 실현해도 늘 아쉬움이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이상주의라기보다 ‘이상실현주의(理想實現主義)’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가끔은 현실주의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는 나의 이상실현주의이지만, 理想이라는 근사한 단어에 너무 일찍 중독이 되어 버려서 아마 쉽사리 던져버리지 못할 것 같다.
2.
한결같음, 너그러움의 두 가치는 내게는 이분법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는 녀석들이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결같음’의 그 은은한 느낌에 넘어가서 평생의 삶의 좌표로 삼자고 호들갑을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전을 위한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 가의 문제에 봉착했고, 원칙주의와 실용주의의 대립으로 보이거나, 나중에는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의 논쟁으로 혼자서 끙끙 앓아댔다. 결국 실용주의, 합리주의의 이름을 걸친 ‘발전의 위한 변화’가 판정승을 거두면서 중학교 3학년 말 무렵에는 배보다 배꼽이 커져 한결같음보다 변화추구가 더 큰 가치가 되어버린 형국아 되었다. 이런 모종의 패배감(?)을 만회하기 위해 수입한 개념이 ‘너그러움’이다. 한결같음을 너그러움으로 보완하면 될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조금 삐딱하게 보면 그냥 내버려두고 좋게 좋게 보자는 것인지도...^^;) 결국 어설픈 봉합으로 말미암아 이런저런 실랑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결같음과 너그러움, 변화에 대한 나의 정의는 대충 이랬다.
‘한결같음’이란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지켜나가는 굳건한 신념을 말한다.
‘너그러움’이란 이해하지 못해도 인정은 해주는 다양성을 용인하는 관대한 정신을 말한다.
‘발전을 위한 변화’는 한결같음의 필수사항이므로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2001년 1월 14일판과 2001년 7월 17일 개정판이 동일)
여기서 발전을 위한 변화라고 굳이 길게 늘어 쓴 것은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변화를 용인하는 것일 뿐, 굳이 불필요한 변화는 최소화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변화에 두려움이 앞서며, 변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하려는 노력을 뒷구멍으로 끊임없이 하는 것은 아마 이 때의 습속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한결같음에의 천착은 내게 있어 영광과 모멸의 양날의 칼이다.
3.
건설적인 휴머니즘에 대한 정의는 대략 이러했다.
건설적인 휴머니즘이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며,
상호간의 행복 추구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 반폭력의 의지를 수호한다.
이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와도 상통한다. (2001년 1월 14일판)
건설적인 휴머니즘이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과 무연(無緣)하지 않은 것들에게 인간적일 의무를 지닌다.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상호간의 행복 추구에도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폭력을 단호히 거부하는 반폭력의 의지를 수호한다.
이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와도 상통한다. (2001년 7월 17일 개정판)
개정판에서 “인간과 무연(無緣)하지 않은 것들에게 인간적일 의무”는 루소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반폭력의 의지’ 부분에서 처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개정판에서는 폭력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것으로 조금 후퇴했다. ‘비폭력(非暴力)’보다 적극적인 개념인 ‘반폭력(反暴力)’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극단적인 반폭력주의를 실현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완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다시 고쳐보라고 한다면 반폭력字도 던지고 ‘가능한 비폭력을 사용한다’ 정도로 대대적인 후퇴를 할지도 모르겠다. 건설적인 휴머니즘은 결국 개인주의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개인주의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이렇게 치졸하게 돌려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개인주의라고 하지 않고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라는 수식어를 치렁치렁 달은 것도 개인주의를 떳떳이 등장시키기 힘든 척박한 집단주의 풍토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외쳤다지만, 나는 “개인주의가 휴머니즘”이라고 외쳤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의 “주체성이 진리”라는 외침처럼 실존주의는 결국 개인주의와 맞닿는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하간 요즘은 “자유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주의보다는 눈총을 덜 받아서 좋은 것 같다.^^;
약간 샛길로 빠지면... 익구의 개인주의적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일부 선행 개방’이라고 하는 것인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는 남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참 고약한 심보다^^;) 선행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해 쓰기에도 바쁜 것이라고 생각했다.(당시에 나 좋은 일 하는 것이 善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책도 좀 읽고, 학교 선생님들의 끊임없는 훈육을 접하면서 생각이 좀 바뀌게 된다. 타인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일부 선행 개방’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즉 나에게만 쓰던 선행을 남들에게도 좀 나누어주자는 정책이었다. 유치찬란한 어린 시절의 흔적들이지만 나는 여기서 개인주의의 떡잎을 발견했다. 또 다른 하나는 ‘개인 소국가론’이었다. 이건 말 그대도 개개인은 하나의 국가라는 인식론이다. 한참 뒤에 스토아 학파의 개인은 소우주라는 말을 듣고 “이건 내 것인데...”라며 2000여 년 전에 선수 당한 것에 대해 배 아파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쩌면 어쩌다가 스토아 학파 내지 그 비슷한 이야기 주워듣고 그 변주곡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때의 인식 틀이 남아서 친구관계를 비롯한 대외적 관계를 아직도 ‘외교’라고 칭하는 것이 그 당시의 언어들 중에 아직도 남겨진 거의 유일한 것이다.
4.
진리탐구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진리탐구에의 헌신이란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지적 성실성을 그 방법으로 한다.
또한 호학(好學)이념을 발전시킨 낙학(樂學)이념을 이른다.
지혜는 배운 것을 실제 행동에 옮기는 고귀한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성립한다. (2001년 1월 14일판)
나는 지적으로 순수하고 성실하며, 학문적으로 진실 되고 당당하도록 한다.
지혜는 배운 것을 실제 행동에 옮기는 고귀한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성립한다.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참다운 지성이 아니다. (2001년 7월 17일 개정판)
‘낙학 이념’이란 논어의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에서 연유한 개념으로 큰 의미는 없다. 개정판에서 보이는 ‘실천지성(實踐知性)’은 칸트의 ‘실천이성’에서 따온 것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으리라. 진리탐구에 헌신한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은 학생이라는 신분이 크게 좌우한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다고 학교공부에 충실하자를 내걸기는 너무 볼품 없지 않는가.^^;
5.
지금 생각해보니 네 번째 다짐과 유사한 점이 많다.
나의 사유는 인문학적 소양을 토대로 하며, 정의와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비판하고 고쳐나가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행한다. (2001년 1월 14일판)
나의 사유는 진보적이며, 정의와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비판하고 고쳐나가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행한다.
나의 사상과 양심에 따라 시대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2001년 7월 17일 개정판)
처음에는 ‘인문학적 소양’을 토대로 한다고 했다. 아마도 당시 나를 지배하던 철학적 감수성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한 것 같다. 개정판에서는 ‘진보적 사유’를 한다고 했는데, 이것 또한 진보의 세례를 받은 여진(餘震)에 휘감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내가 골수 진보주의자인 줄 알았으니 이념의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했다^^;) 본의 아니게 인문학적 소양은 ‘순수’라는 가치를 대표했고, 진보적 사유는 ‘참여’라는 가치를 대표했다. 같잖게도 순수와 참여의 대립각을 나도 흉내내보고 싶었던 것이다.^^; 책상머리에서 잡생각을 하는 것이 유일한 유희였던 고3 수험시절에 나는 가장 급진적이었고, 소위 진보로 굴레 지워지는 생각들에 많이 젖어 있었다. 이 놈의 지긋지긋한 수험생 신분을 벗어 던지면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참여하며 살겠다며 이런저런 공약들을 쏟아 부었지만, 나답지 않게 너무 뜨겁게 타올랐든지 얼마가지 않아 식어버렸다. 열정이 한바탕 휩쓸고 간 후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몸서리만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새즈믄해 큰다짐]은 자구 하나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할 정도로 정성을 쏟아 부은 것이지만, 정작 그 실천이 제대로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악한 한 장의 다짐은 나의 성장이 함축되어 있고, 나의 목표가 반영되어 있는 소중한 녀석이다. 6(^.^)9
하나, 나는 올바른 이상을 세우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하나, 나는 한결같음과 너그러움을 지닌다.
하나, 나는 건설적인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하나, 나는 진리탐구에 헌신하며 깨달은 것은 실천한다.
하나, 나는 끊임없이 사유하며 비판해서 그릇된 것을 고쳐 나간다.
1.
나의 이상주의는 1996년 1월 14일, 즉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뜬금없이 떠올랐던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는 꽤나 적극적인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익구의 사회철학’이라고 거창한 포장을 하며 기리고 있고 1월 14일을 ‘사색의 날’로 지정해 개인적인 명절로 지정하고 있다) 올바른 이상이란 ‘인간의 행복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는 단 하나의 전제조건을 두었다. 나는 이상을 세우는 것보다는 그것의 실현에 더 무게를 두었다. 그래서 현실과의 타협이 내게는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상의 실현을 위해 이상을 계속 깎아 내려가고, 현실과 타협하기 때문에 이상을 실현해도 늘 아쉬움이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이상주의라기보다 ‘이상실현주의(理想實現主義)’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가끔은 현실주의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는 나의 이상실현주의이지만, 理想이라는 근사한 단어에 너무 일찍 중독이 되어 버려서 아마 쉽사리 던져버리지 못할 것 같다.
2.
한결같음, 너그러움의 두 가치는 내게는 이분법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는 녀석들이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결같음’의 그 은은한 느낌에 넘어가서 평생의 삶의 좌표로 삼자고 호들갑을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전을 위한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 가의 문제에 봉착했고, 원칙주의와 실용주의의 대립으로 보이거나, 나중에는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의 논쟁으로 혼자서 끙끙 앓아댔다. 결국 실용주의, 합리주의의 이름을 걸친 ‘발전의 위한 변화’가 판정승을 거두면서 중학교 3학년 말 무렵에는 배보다 배꼽이 커져 한결같음보다 변화추구가 더 큰 가치가 되어버린 형국아 되었다. 이런 모종의 패배감(?)을 만회하기 위해 수입한 개념이 ‘너그러움’이다. 한결같음을 너그러움으로 보완하면 될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조금 삐딱하게 보면 그냥 내버려두고 좋게 좋게 보자는 것인지도...^^;) 결국 어설픈 봉합으로 말미암아 이런저런 실랑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결같음과 너그러움, 변화에 대한 나의 정의는 대충 이랬다.
‘한결같음’이란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지켜나가는 굳건한 신념을 말한다.
‘너그러움’이란 이해하지 못해도 인정은 해주는 다양성을 용인하는 관대한 정신을 말한다.
‘발전을 위한 변화’는 한결같음의 필수사항이므로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2001년 1월 14일판과 2001년 7월 17일 개정판이 동일)
여기서 발전을 위한 변화라고 굳이 길게 늘어 쓴 것은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변화를 용인하는 것일 뿐, 굳이 불필요한 변화는 최소화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변화에 두려움이 앞서며, 변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하려는 노력을 뒷구멍으로 끊임없이 하는 것은 아마 이 때의 습속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한결같음에의 천착은 내게 있어 영광과 모멸의 양날의 칼이다.
3.
건설적인 휴머니즘에 대한 정의는 대략 이러했다.
건설적인 휴머니즘이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며,
상호간의 행복 추구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 반폭력의 의지를 수호한다.
이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와도 상통한다. (2001년 1월 14일판)
건설적인 휴머니즘이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과 무연(無緣)하지 않은 것들에게 인간적일 의무를 지닌다.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상호간의 행복 추구에도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폭력을 단호히 거부하는 반폭력의 의지를 수호한다.
이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와도 상통한다. (2001년 7월 17일 개정판)
개정판에서 “인간과 무연(無緣)하지 않은 것들에게 인간적일 의무”는 루소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반폭력의 의지’ 부분에서 처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개정판에서는 폭력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것으로 조금 후퇴했다. ‘비폭력(非暴力)’보다 적극적인 개념인 ‘반폭력(反暴力)’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극단적인 반폭력주의를 실현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완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다시 고쳐보라고 한다면 반폭력字도 던지고 ‘가능한 비폭력을 사용한다’ 정도로 대대적인 후퇴를 할지도 모르겠다. 건설적인 휴머니즘은 결국 개인주의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개인주의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이렇게 치졸하게 돌려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개인주의라고 하지 않고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라는 수식어를 치렁치렁 달은 것도 개인주의를 떳떳이 등장시키기 힘든 척박한 집단주의 풍토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외쳤다지만, 나는 “개인주의가 휴머니즘”이라고 외쳤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의 “주체성이 진리”라는 외침처럼 실존주의는 결국 개인주의와 맞닿는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하간 요즘은 “자유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주의보다는 눈총을 덜 받아서 좋은 것 같다.^^;
약간 샛길로 빠지면... 익구의 개인주의적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일부 선행 개방’이라고 하는 것인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는 남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참 고약한 심보다^^;) 선행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해 쓰기에도 바쁜 것이라고 생각했다.(당시에 나 좋은 일 하는 것이 善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책도 좀 읽고, 학교 선생님들의 끊임없는 훈육을 접하면서 생각이 좀 바뀌게 된다. 타인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일부 선행 개방’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즉 나에게만 쓰던 선행을 남들에게도 좀 나누어주자는 정책이었다. 유치찬란한 어린 시절의 흔적들이지만 나는 여기서 개인주의의 떡잎을 발견했다. 또 다른 하나는 ‘개인 소국가론’이었다. 이건 말 그대도 개개인은 하나의 국가라는 인식론이다. 한참 뒤에 스토아 학파의 개인은 소우주라는 말을 듣고 “이건 내 것인데...”라며 2000여 년 전에 선수 당한 것에 대해 배 아파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쩌면 어쩌다가 스토아 학파 내지 그 비슷한 이야기 주워듣고 그 변주곡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때의 인식 틀이 남아서 친구관계를 비롯한 대외적 관계를 아직도 ‘외교’라고 칭하는 것이 그 당시의 언어들 중에 아직도 남겨진 거의 유일한 것이다.
4.
진리탐구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진리탐구에의 헌신이란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지적 성실성을 그 방법으로 한다.
또한 호학(好學)이념을 발전시킨 낙학(樂學)이념을 이른다.
지혜는 배운 것을 실제 행동에 옮기는 고귀한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성립한다. (2001년 1월 14일판)
나는 지적으로 순수하고 성실하며, 학문적으로 진실 되고 당당하도록 한다.
지혜는 배운 것을 실제 행동에 옮기는 고귀한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성립한다.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참다운 지성이 아니다. (2001년 7월 17일 개정판)
‘낙학 이념’이란 논어의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에서 연유한 개념으로 큰 의미는 없다. 개정판에서 보이는 ‘실천지성(實踐知性)’은 칸트의 ‘실천이성’에서 따온 것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으리라. 진리탐구에 헌신한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은 학생이라는 신분이 크게 좌우한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다고 학교공부에 충실하자를 내걸기는 너무 볼품 없지 않는가.^^;
5.
지금 생각해보니 네 번째 다짐과 유사한 점이 많다.
나의 사유는 인문학적 소양을 토대로 하며, 정의와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비판하고 고쳐나가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행한다. (2001년 1월 14일판)
나의 사유는 진보적이며, 정의와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비판하고 고쳐나가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행한다.
나의 사상과 양심에 따라 시대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2001년 7월 17일 개정판)
처음에는 ‘인문학적 소양’을 토대로 한다고 했다. 아마도 당시 나를 지배하던 철학적 감수성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한 것 같다. 개정판에서는 ‘진보적 사유’를 한다고 했는데, 이것 또한 진보의 세례를 받은 여진(餘震)에 휘감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내가 골수 진보주의자인 줄 알았으니 이념의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했다^^;) 본의 아니게 인문학적 소양은 ‘순수’라는 가치를 대표했고, 진보적 사유는 ‘참여’라는 가치를 대표했다. 같잖게도 순수와 참여의 대립각을 나도 흉내내보고 싶었던 것이다.^^; 책상머리에서 잡생각을 하는 것이 유일한 유희였던 고3 수험시절에 나는 가장 급진적이었고, 소위 진보로 굴레 지워지는 생각들에 많이 젖어 있었다. 이 놈의 지긋지긋한 수험생 신분을 벗어 던지면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참여하며 살겠다며 이런저런 공약들을 쏟아 부었지만, 나답지 않게 너무 뜨겁게 타올랐든지 얼마가지 않아 식어버렸다. 열정이 한바탕 휩쓸고 간 후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몸서리만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새즈믄해 큰다짐]은 자구 하나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할 정도로 정성을 쏟아 부은 것이지만, 정작 그 실천이 제대로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악한 한 장의 다짐은 나의 성장이 함축되어 있고, 나의 목표가 반영되어 있는 소중한 녀석이다.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