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잘 논 하루

문화 2005. 8. 24. 15:22 |
나는 종종 혼자서도 잘 논다는 평을 듣는다. 자기만의 세계를 꾸리면서 사색에 빠져 지낼 듯한 이미지에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잡글 쓰는 것을 즐기는 행태... 게다가 역사 공부나 문화유산 탐구 같은 대중성 떨어지는 취미를 보유하고 있다 보니 그런 혐의가 짙게 드리우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도 많이 타고 대부분의 경우 함께 하는 일을 선호한다. 혼자 있는 시간도 무척 즐기지만 그 이상으로 지인들과 알콩달콩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특히 내가 잘 못하는 일이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산책이나 서점 방문은 혼자서도 곧잘 만끽하는 편이지만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떠나거나 문화유산 답사 같은 건 도통 혼자서 못하겠다. 젊은 시절 흔히들 꿈꿔보는 나홀로 배낭여행 같은 건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독립심이 부족하다는 핀잔을 줄 수 있겠으나 진정한 독립심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견결히 지켜내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혼자서 하는 일은 대개 독립적이게 마련이니 말이다.^^; 마치 진정한 자유는 제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얽히고설킨 인연들 속에서 찾아야하듯이 말이다.


굳이 이런 사설들을 늘어놓은 까닭은 간만에 혼자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사직단, 태릉, 의릉, 동묘 등을 혼자서 다닌 전례가 있긴 하다). 토요일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서 갑자기 필 받아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잡힌 일정이라 함께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해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하였으나 이날로 예정된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갤러리 가이드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청산유수 같은 청장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는 좋은 기회였다. 이런 식으로 대중과 호흡하며 우리 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무척 좋았다. 사람이 유식해지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겠구나라는 생각도 해봤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일부만 개관한 것이고 2007년 완전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과 더불어 양대축으로 키우겠다는 유 청장의 야심 찬 포부에 찬사를 보낸다. 아직도 창고에 잠자고 있는 숱한 유물들을 어서 만나보고 싶다. 내 나라가 그렇게 꾀죄죄한 나라만은 아니었음을, 우리 선조들이 맨날 신음만 하고 지낸 것은 아니었음을 이렇게나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너무 유물론적 관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인천국제공항에 커다란 백자 달항아리를 전시해 놓으면 어떻겠냐는 유 청장의 제안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유 청장 말씀대로 우리 문화유산을 널리 알릴 수 있는 활동들이 많이 있었으면 한다. 자칫하다가 중국과 일본 틈에 끼어서 별 볼일 없는 나라로 전락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깔끔한 내부 전시실은 새로운 볼거리들로 풍성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규장각에 걸어놨다는 임금의 지침을 적은 주련(柱聯, 기둥이나 바람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씨)이었다. 선생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非先生勿人), 손님을 봐도 일어서지 말라(見來客不起)는 글귀는 얼마나 학자들을 아끼고 면학 분위기(?) 조성에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궁궐 정전 천장에서 쓰였을 법한 용무늬, 봉황무늬 천장 장식도 인상적이었다. 창덕궁 인정전 천장 양식은 목을 쭈욱 빼야만 볼 수 있고, 선정전은 비공개 지역이니 가볼 수도 없다. 경복궁 근정전, 창경궁 명정전, 경운궁 중화전도 높이 올려져 있다보니 세밀하게 관찰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니 나도 몰래 가슴이 뛰었다. 이동식 행궁에서 소맷돌로 썼을 법한 나무 해태와 경회루 연못에서 나온 청동용도 볼거리였다.


이 밖에 왕실에서 쓰던 가구나 장신구, 의복과 종묘 제례 때 쓰던 제기들도 질박한 듯 미려했다. 화려한 구석도 적잖았지만 대체적으로 수수함이 지배적인 듯했다. 고려말 불교의 폐단을 지적한 신흥사대부가 새 왕조를 개창한 이래로 유교 문화는 적어도 대외홍보용으로는 사치와 향락을 배격했다. 조선시대 건축기술의 최고 집약체라고 할 궁궐건축에서도 가장 화려한 등급의 금단청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니 말이다(단청 종류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서울 5대 궁궐에서 금단청이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의 백자와 회화들은 고려의 청자와 불화에 비하면 너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혹자는 유교의 선비정신을 내세워 절제미를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불가의 고승과 선사들도 만만치 않은 자기수양을 했다. 유교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성리학(주자학에 한정된) 일당독재가 너무 심했다는데 조선의 비극이 있었다.


때마침 개관 특별전으로 백자 달항아리 9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조선 백자의 최고봉으로 뽑히는 백자대호(白瓷大壺)를 보러가기 전에 고려 청자의 최고봉으로 뽑히는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잘나봤자 얼마나 잘났겠나 하는 고약한 심보를 품었다.^^; 하지만 이내 백자의 은근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작은 전시실을 선뜻 떠나지 못하고 뱅뱅 돌면서 음미하다가 살짝 어지럼증까지 느낄 정도였다. 높이가 40cm 이상이 되는 보름달마냥 둥그런 달항아리를 만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의 장인들은 두 개의 사발을 접붙여서 원형을 만들어냈다. 콜럼버스의 달걀도 울고 갈 재치다. 백자대호의 허리부분에는 이음매가 보이는데 이 때문에 완전한 원형이 아니라 둥근 느낌은 한껏 주면서 약간 이지러진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엿보였다.


전시실 여기저기에는 백자를 찬양한 여러 시인묵객들의 글귀들을 적어놨는데 그 애틋함이 절절하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고 최순우 선생이 “달항아리는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한 것부터 온갖 찬사들이 쏟아진다. 그만큼 한국인의 심성에 착 달라붙는 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청자의 귀족적이고 호사스러움보다는 백자의 서민적이고 검박한 풍취를 노래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기도 하다.^^; 여하간 이번 특별전은 백자에도 제법 정을 붙이는 계기가 되어 청자에 올인했던 것에서 백자와의 포트폴리오(?)를 이루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진짜배기를 백자를 보며 감탄하는 마음 이면에는 제대로 된 청자를 봐야겠다는 열망도 커졌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달항아리 중에서 가장 먼저 국보로 지정된 국보 제262호 백자대호 앞에서 약간 찌그러진 듯한 모양이 굴곡미를 만들어 내며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효험이 다가왔다. 가장 어설퍼 보인 작품이었지만 눈을 씻고 유심히 바라보면 뭉클한 기운이 치솟는다. 결국 참다못해 디카로 사진을 몇 장 후닥닥 찍어버렸다. 석굴암에서 사진을 못 찍게 하듯이 백자도 사진을 찍으면 훼손할 우려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간 조금 못된 짓을 했지만 그간의 문화재 애호정신에 비추어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유물 보호를 위해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비싼 도록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딜레마다.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 폐관 기념으로 열렸던 한시적으로 국보 제78호와 제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 사진촬영을 허용한 것과 같은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한국 미술사의 개척자인 우현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의 특질을 “무기교의 기교”라고 평했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의 극치를 백자대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도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못하는 일 없이 다하고 있다”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의 정신을 만난다고나 할까. 백자는 유교 문화의 정수였으나 도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셈이다.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서문을 보면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고 말하며, “실로 삼교(유불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들이 만나서 관계를 맺으며 변한다(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고 했다. 장인들은 풍류나 현묘지도를 체득했을지 모르겠으나 위정자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올해는 고유섭 선생의 탄생 백돌 되는 해이다. 열화당에서 여덟 권짜리 전집이 나온다고 하니 쉽게 읽을 수 있는 몇 권은 장만해볼 참이다. “전통이란 결코 손에서 손으로 손쉽게 넘어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피로써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치러 ‘피로써’ 얻는 것”이라고 했던 선생의 말씀이 따갑다.


기왕 나온 김에 경복궁도 잠시 들렀다. 지인들을 데리고 가이드도 몇 번 해줘서 3000원 본전 생각이 조금은 났다.^^; 햇살은 따가웠고 덕분에 흥례문의 단청은 눈부셨다. 우리의 단청은 햇살을 받으면 그 휘황찬란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땀은 좀 흘렸을지언정 그간 다닌 답사 중에서 가장 즐거운 단청 완성을 했다. 이래서 세상만사는 일장일단이다.^^ 김영삼씨가 무식하게 부셔버렸다고도 하지만 중앙청 건물을 철거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본다. 옛사람의 솜씨보다 못할지는 몰라도 이렇게 멋진 건물을 새로 지어서 탄성을 자아내게 하니 말이다. 또한 72억2500여 만원을 들여 3년 10개월간의 보수공사를 마친 근정전도 퇴락했던 단청들에 생명이 불어넣어져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흥례문이나 근정전을 볼 때마다 우리 문화유산 중건 혹은 복원에 대한 강한 의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은 한국인의 미감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동산이다. 중국 자금성 뒤편의 거대한 인공산인 경산과 비교했을 때 지나친 기교를 삼가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려는 우리 장인들의 정성을 읽을 수 있다. 백자대호의 정신을 여기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보물 제 811호인 아미산의 굴뚝 또한 앙증맞은 볼거리인데 굴뚝 장식은 온돌 문화인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나가는 길에 늘 빼먹고 왔던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현묘탑을 찾았다. 국립고궁박물관 옆 뜰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보니 대부분 그냥 놓치고 가능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놈들이 멋대로 가져다 놓은 경천사터 10층석탑을 비롯한 석조 문화재들이 대부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도탑만은 떠나지 못하고 홀로 외로이 서있다. 이 부도탑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박살이 나서 지금 것은 파편들을 모아 간신히 복원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유심히 쳐다보면 여기저기 땜질용 시멘트가 슬프게 처발라져 있다. 이처럼 속으로 골병이 들어서 함부로 손을 댔다간 다시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한다. 부도탑 너머로 근정전 지붕이 보이면서 불교 문화유산과 유교 문화유산의 오묘한 조화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불협화음이 날 듯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탑파의 미려한 모습이 참 쓸쓸해보였다.


답사를 다 마치고는 외대 근처의 헌책방인 신고 서점에 가서 충동구매를 살짝 했다. 헌책방은 늘 가봐야지 해놓고도 선뜻 못 찾아갔는데 모처럼 마음을 다잡았다. 규모도 크고 분야별로 정리도 잘 되어 있어 헌책의 구수한 향기에 넋을 잃었다. 고종석 선생은 “[민음사만의 일은 아니겠지만](한국일보, 2005/05/11)”라는 칼럼에서 좋은 시집들의 절판을 아쉬워하며 우리 출판문화를 개탄했다. 인문과학 서적에서도 그런 경우는 부지기수다. 절판된 책들을 학교 도서관에서 그나마 대부분 빌려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물욕이 발동해서 꼭 손에 넣고 싶은 책도 있게 마련이다. 대출 기간 동안 몇 장 읽다가 말고 반납해야할 때 영 마뜩잖다. 며칠 만에 읽는 것이 아니라 늘 곁에 두고 가끔 꺼내보고 싶은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을 때 참 난감하다. 읽는 것이 사 모으는 것을 못 따라갈 때가 많아서 민망하지만 좋은 책들이 일찍 절판될까 저어해서 미리 사둘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의 책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때였지만 그래도 마냥 신명이 났다. 혼자서도 잘 논 하루였지만 그래도 다음번에는 함께 거닐며 노닥거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혼자서도 잘 놀지만 함께 있으면 더 흥겨운 녀석이니까 말이다.^^ - [憂弱]


추신 - 절판된 도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절판되어서 찾기 힘든 책 중에 내가 갖고 싶은 책 두 권이 있다. F. Copleston 著, 임재진 譯의 [칸트](중원문화 刊)노명식의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민음사 刊)이 그것이다. 서양철학사 정리로 유명한 코플스톤의 열권짜리 History of Philosophy 중에서 칸트 부분만 번역한 [칸트]는 도서관에 딱 한 권 있을 뿐 시중에서는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칸트 관련 저작이야 하고 많지만 내가 읽을만한 책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레 이 책은 꼭 좀 소장하고 싶다.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는 도서관에서 빌릴 때마다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앞부분만 좀 읽고 반납하기 일쑤였던 기구한 인연의 책이라 괜스레 애착이 간다. 이건 이 책을 집에다 놓고 보라는 하늘의 뜻인가라고 착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혹시나 이 두 책의 행방을 아시는 분은 꼭 좀 신고해주세요. 그래서 제 소박한 물욕을 잠재워주시길. 푸하하^^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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