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문자문화쇠망약사]라는 책에서 "이제 전자문화는 싫고 좋음이나 옳고 그름 또는 수용과 거부와는 무관하게 마치 바람처럼, 공기나 바다처럼 그렇게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나 또한 쓰러져 가는 문학의 고목 아래서 서성이며 전자제국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이다"라며 문자문화의 몰락을 씁쓸하게 전망하고 있다. 문자제국의 유민들은 전자제국을 향해 비이성적이고 천박하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촉한(蜀漢)이 망할 때 성도 백성들이 향불을 피워 들고 위나라 군사들을 맞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담담히 받아들일 따름이다.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는 적어도 글쓰기 영역을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네티즌 모두에게 개방했다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다. 과거에는 선비들만이 거의 독점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며 자기들끼리 즐겼지만 이제는 그런 제약은 많이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손쉽게 책을 뚝딱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미치지는 못해도 웹 상에서나마 자신의 잡글을 가지고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고종석 선생은 "글쓰기의 민주주의"는 시간을 우군으로 삼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특히 인터넷은 대중으로서의 지식인을 탄생시키며 즐김으로서의 글쓰기, 아마추어리즘으로서의 글쓰기를 격려해, 교육적ㆍ계급적ㆍ연령적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나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글을 쓰는 문자의 민주주의를 머지 않은 미래에 실현할 것이다.
- 고종석. "글쓰고 책 내는건 특권층의 향유물?." 한국일보. 2001. 02. 13.


하지만 이처럼 글쓰기의 민주화가 되었다고 해도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에 무게중심이 가있다. 과거처럼 이미지가 텍스트를 보조하는 기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미지 자체가 새살림을 차린 "이미지 글쓰기"라는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자향(文字香)의 그윽함을 설교할 생각은 없지만 문자언어의 성찰 없이는 창조적이면서 생산적인 영상문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읽고 쓰지 않고, 보여주고 보는 것에 급급하다보면 우리의 문화는 까칠해질 것이다. 편식은 결국 스스로를 야위게 만들뿐이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고도의 문화적인 활동이다. 문자를 통해 제 생각을 표현하고, 남의 의견을 분석해나가는 것은 인간 이성과 감성을 동원하는 사고 훈련이다. 향을 옆에 두면 옷에 향냄새가 배고,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반복적인 행동으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을 불가에서는 훈습(薰習)이라고 말한다. 글을 읽고 쓰는 훈습은 당장에 눈에 띄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 같지 않아도 시나브로 우리 내면에 변화를 일으킨다. 글로 이루는 훈습은 롤즈가 말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을 향해 나간다.


반성적 균형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검토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라며 마냥 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시 한번 평가하고, 스스로 다시 궁리하여 보다 나은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중용(中庸)과 비슷한 개념이다. 결국 조금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직관적 판단(개인적 선호)에서 시작하여 끊임없이 숙고하여 적절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서 반성적 균형상태는 단순한 산술평균이 아니라 숙고한 반성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무수한 글 읽고 쓰는 활동이 있고, 그것은 각 개인의 잣대로 만든 체를 통해 걸러져 다양한 지혜와 성찰을 낳는다. 오늘날 글쓰기의 민주화를 통해 더욱 많은 지식이 창조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문화가 쇠락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나오고 있다. 다양한 영상문화의 발달로 책을 좀 덜 보고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책 대신 다른 매체를 통해 다양한 성찰과 폭넓은 경험을 이룰 수 있음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오만이다. 하지만 글쓰는 행위가 오히려 줄고 있다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가령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얻고 표현의 욕구를 발산하는 온라인 보금자리인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경우 게시판 기능보다는 사진첩과 방명록의 활용도가 압도적이다.


물론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통해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편의성과 저비용은 인정할 만 하다. 하지만 몇 줄 안 되는 방명록과 사진에 대한 왈가왈부를 통해서만 의견을 나누다 보니 긴 호흡의 글이 낯설어지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지는 않은가 의심스럽다(이건 어디까지나 미니홈피를 하는 이들의 대체적인 경향을 말한 것이다). 나도 잠시 싸이 미니홈피를 가꾼답시고 일촌도 많이 맺어 여기저기 인사 나누느라 발이 닳도록 뛰어 다녔고 사진도 1500장 넘게 올려봤다. 이를 통해 소통하고 대중성을 가지려고 꾀했다. 하지만 역시 나란 녀석을 표현하고, 남과 교류 맺는데는 내 정성과 고심이 스민 글을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지금은 폐가로 버려 둔 상태다.


나는 글을 쓰지 않을 권리를 옹호한다. 아무리 보배로운 일이라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좋은 일일수록 자발적인 의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틈만 나면 지인들에게 잡글이나마 많이 읽고 쓰기를 권한다. 이는 글을 쓰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권리를 함께 누리고, 그 쏠쏠한 이문(利文)을 맛보라는 충심일 뿐이다. 굳이 세속적 꿍꿍이(?)를 밝히자면 타는 목마름 끝에 마시는 물 한 모금이 달콤하듯이 매서운 세파 속에 내어놓는 잡글 한 편이 참으로 달콤쌉싸름해서 우리네 강퍅한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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