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한달 고심 끝에 겨울학기를 안 듣고 영어학원을 수강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숙제도 꼬박꼬박하고 모르는 단어 하나하나 샅샅이 뜻을 찾아보고 텍스트도 뒤적거리는 성의를 보였던 나는 새터 준비가 겹친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하나둘 소홀히 하다가 결국 나중에는 강의 시간에 앉아 있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아마 토익 시험을 보라고 한다면 별로 실력 향상이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전무했던 토익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절박한 생존상의 문제의식에서 시작한 영어 공부는 이번에도 시원치 않은 성과를 가져왔다.


물론 despite가 전치사이고, though가 접속사라는 사실과 이 둘을 뒤에 구나 절이 오느냐의 여부에 따라 적절하게 구사하는 법 같은 몇 가지 공식과도 같은 것들을 접한 것이 아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정법 과거완료의 문장 구조라든가, 동명사와 TO부정사, 관계대명사나 분사구문, 복합명사 같은 시험의 단골소재들을 수박 겉핥기로 걸쳐간 보람은 없잖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습이 거의 없었던 만큼 죄다 망각의 강을 한참은 건넜으니 답답할 뿐이다.^^;


영어공부의 효용은 나에게 모멸감을 선사하면서 나의 무식함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다는 점과 갑자기 학구열을 불태울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인 것 같다. 함께 다닌 친구가 나보다 문법 문제를 몇 개 더 맞추는 모양을 보면 나의 조급증은 폭발하고 졸지에 나는 영어도 못하는 촌놈이 되어버린 극도의 소외감을 맛보기 일쑤다.


대학을 졸업하기 위한 졸업요건 중에 토익 780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늘 마음 한구석의 짐이 되고 있다. 아직 토익 시험 한 번 제대로 본 적도 없는 나는 장래에 대한 고민이 없는 놈,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녀석으로 전락하고 만다. 토익점수를 위해 부지런히 매달 시험을 보고 보면 볼수록 점수가 오른다며 권하는 친구 앞에서 나는 영어만능주의 비판이나 하는 고집불통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중학교 1학년 제도권 교육에서 처음으로 영어를 접하게 되면서 영어 단어 외우기를 왜 그리 게을리 하고, 영어문장 암기 시험을 그토록 저주했는지 후회스럽다. 그 때 좀 영어에 애정을 가지고 공부했다면 지금 이러한 몰골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핑계다. 지난날의 언어 국수주의 혹은 폐쇄적 국어사랑에 대한 질타로 지금의 내 초라한 모습을 무마해보려는 속셈이다. 또 고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한 친구에게 내가 한 덕담은 고작 “전성기의 대국인 미국에 가서 영어라도 건져 오시게”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영어학원을 수강하던 시기에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김영명 교수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책이다. 영어 사대주의를 신랄히 비판하고 있는 책을 영어 학원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틈틈이 펼쳐보는 부조화의 극치였다.^^; 여하간 글쓴이는 책에서 영어 공용화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우리말 사랑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역설한다. 나도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부분 동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빼어나게 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특히나 영어회화는 더더욱 말이다. 그런데도 가스검침원에게조차 토익 성적표를 요구하는 현실은 황당할 따름이다.


글쓴이는 영어 공용화 정책을 펼치라는 자들을 사이비 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 체제에서나 가능한 동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홍세화 선생의 비판과도 일맥 상통한다. 자유주의자가 영어가 공용화되는 것이 대세라면 막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까지는 이해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영어 공용화에 앞장서는 것도 해서는 안될 일임은 자명하다. 어떤 방향이든 강제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책무인데 대체 그것 어디다 엿 바꿔 먹고 영어 타령만 하는지 모르겠다.  


글쓴이는 기득권, 권력, 부를 가진 세력은 언제나 현실론과 효용을 앞세운 사대주의 세력이었다고 말하며 민족주의 이념은 우리 역사상 한번도 지배층의 주도 이념이었던 적이 없었다며 한탄한다. 중립적 세계화는 허구라며 힘센 자는 중립의 논리를 좋아하게 마련이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아울러 저항 민족주의로서 한국어 사랑은 의미가 있다고 역설한다.


특히 한자파들이 한글하고만 싸우려 하지말고 영어와의 싸움에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는 글쓴이의 지적에 크게 동감했다. 적의 적은 동지인 법이고, 한자파도 영어라는 거대한 적 앞에서는 공동의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고3 수험시절에 틈틈이 한자공부를 해서 한자능력검정 2급 자격증을 딸 정도로 한자를 좋아한다. 조선일보와 내가 유일하게 생각을 같이 했던 때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공문서 한자병용에 대한 논쟁이 붙었을 때 한자병용을 옹호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한자혼용도 아니고 괄호 안에 한자를 표기하겠다는 수준의 한자병용은 충분히 양해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국어 공부를 위해서 일정정도의 한자공부가 병행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변함 없다.


나는 어차피 배우고 가르쳐야할 한자라면 될 수 있으면 일찍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말 어휘의 절반 이상은 한자어이며 한자어들의 상당수가 한자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없이는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글 전용이라는 밥상을 차리고 싶어도 한자라는 반찬이 없으면 곤란할 정도로 한자어는 한국어에 깊게 침투해있다. 한자어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적정 수준의 한자 학습이 부당한 노동력 낭비이며 인권 유린(?)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물론 아무리 한자의 매력에 빠진 나라고 해도 한글 전용의 대원칙은 건드리지 않으며 우리 말글살이가 한글만으로 충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미 한글 전용이 대세인데, 한자를 쓰겠다는 욕망을 금기시할 필요까지 없다는 소수자 보호(?) 수준의 논의일 뿐이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샜다. 다시 영어 공용화 논쟁으로 돌아오면... 1998년 여름 출간된 소설가이자 경제 평론가 복거일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刊)라는 책인 우리 사회에 ‘영어 공용화’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세계화와 국가경쟁력이라는 논제가 깔려 있다. 그는 영어는 지구촌의 ‘표준’ 언어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제국의 언어'라고 말한다. 따라서 ‘주변부’의 우리가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해서, 또는 중심부의 지식과 담론을 제대로 빠르게 흡수하여 중심부 못지 않은 경쟁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이른바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 시민들이 보다 더 "영어"에 능숙해져야 한다는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는 것이다. 복거일이 자신의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점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닫힌" 민족주의를 버리고 "열린" 민족주의로 나가야 한다는 그의 말도 맞는 말이다. 편견이나 아집을 버리고 세계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경쟁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많이 나갔다.


물론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일은 지금 우리의 감정에 너무 거슬른다. 우리 말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는 우리 말을 아끼고 써야 한다는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이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191쪽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에게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리고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고 그것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은 오롯이 남는다. - 같은책, 194쪽



일면 맞는 말이기는 한데 정서적 거부감은 어쩔 수 없다. 복거일이 말한 민족주의의 사슬에 걸려있다는 죄책감이 더해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의문이 든다. 한 민족의 언어라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효용성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일까? 과연 영어 공용화가 합리적 대안인가?


영어 공용화를 옹호하는 입장은 대개 다음과 같다. 언어는 생활 속에서만이 습득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영어권 국가로 이주하지 않고는 영어를 마스터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어학 연수로 인한 외화 낭비의 절감과 세계화시대에 발 맞추어 간다는 의미에서 영어의 공용화는 필수 불가결 한 것이다. 영어 공용화가 민족성을 해친다는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일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국어에 대한 입장은 갈리게 된다. 복거일은 민족어는 박물관 언어로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대개의 영어 공용화 옹호론자들이 반드시 민족어의 사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민족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문화 주체성 운운하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식의 논리가 더 많아 보인다. 아이들의 언어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한국어는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데 매우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고도로 발달, 분화된 언어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일시적인 언어 지체현상을 지나 세 돌이면 두 가지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영어 공용화 옹호론자들은 영어 공용화는 세계화의 추세에 걸맞은 행동이며,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편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물론 영어가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고, 국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공용어로 제정함으로써 비롯되는 많은 혼란과 비용을 감수할 정도로 절실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공용어로 제정한다고 해도 실제 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분야는 전문가의 영역이고 영어 공용화보다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영어가 공용화되면 더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지 않느냐는 옹호론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따진다. 당장에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영어가 공용화된다고 해서 원서를 줄줄 읽어 내려갈 일은 없다. 또한 전문적인 입장에서도, 실제 실험을 하거나 연구를 하는 데는 영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다만 대외적인 경향이나 추세를 파악하고 우리의 연구 실적을 발표하는데 영어가 필요한데, 그 분야에서 사용되는 영어 역시 고난도의 전문적 수준을 요구할 정도는 아니다는 것이다. 공용화 보다는 단기적으로 통역과 번역에 능통한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학교 교육 정상화를 통해 영어 교육을 시작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봐야지, 전 국민을 영어의 바다에 빠뜨리는 것은 위험한 짓이라는 것이다.


영어 공용화를 반박하는 숱한 논거들이 있지만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거가 대개는 현실적 이익을 도모해보자 수준에서 그치는 빈약한 수준이니 별로 반박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대중들을 현혹시키는 두 가지 정도의 주장에 대해서는 확실히 반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영어를 잘 해야 잘 살게 된다는 미신이다. 걸핏하면 드는 것이 싱가포르의 예인데 그들이 현재와 같이 발전한 것은 그들이 영어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선진화된 제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또한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보다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시급한 인구 300만의 도시국가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찬양을 하는지 정말 배알도 없는 처사다. 또 홍콩을 영어 공용화의 표본이라고 받들기도 하는데, 그네들의 영어 문화가 영국 식민 통치의 산물일 따름이며, 설령 2개 국어를 능숙한 홍콩의 모습에 침을 흘릴지언정 그밖에 우리가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영국 연방이 44개국이고 영어를 대부분이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데 그들 가운데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는 5개국도 안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되새겨봤으면 좋겠다. 영어 사용과 국가발전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게다가 영어 공용화는 우리 ‘모두’를 잘 살게 해줄 것 같지도 않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게 되면 국민의 약 20%가 영어 상용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로 인해 상류의 기득권층은 영어를 쓰고 그 이하 계층은 한국어를 쓰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사실 뻔할 뻔자 아닌가). 결국 기득권층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점점 더 유리해지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계층은 더 불리해질 것이다. 이미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인도, 필리핀, 나이지리아 등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실례로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인도에서는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소수라고 한다. 다수의 빈곤층은 자기 모국어밖에 모르는 실정이다. 필리핀에서도 영어를 제대로 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은 미국, 호주, 중동 등 외국 이민으로 빠져나가는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영어 공용화로 이른바 ‘영어 특권 계급’ 같은 것이라도 나타난다면 우리 사회 통합에도 큰 지장을 줄 것이다. 아울러 일부 소수 계층만이 영어를 배우는 북한의 실정을 고려할 때, 다가올 통일한국 시대에 남북 간의 영어로 인한 괴리감도 충분히 생각 가능하다.


둘째로, 영어 공용화가 세계화에 발 맞추는 것이라는 미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세계화’의 개념에 대한 것이다. 아마 세계화 시대에 발 맞추는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정글 세계화’의 개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화란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사회로서, 영어를 쓰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쳐지게 되고, 의식주 해결도 쉽지 않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먼저 이런 세계화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싶다. 영어를 공용화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 정도의 세계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올바른 미래의 사회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세계화에 대해서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인가? 올바른 사회는 아니지만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이런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사회가 우리 미래 사회 모습인지 묻고 싶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의 관찰하는 행동이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즉, 한 사람이 그냥 흘러가는 역사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찰한다는 행동 자체가 역사의 변화 방향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역사는 대세의 흐름대로 저절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미래의 모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냥 "영어공용화가 될 테니 영어 공부나 열심히 하자"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영어 공용화 사회로 바꿔 놓는 것이다. 반대로 "영어 공용화는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올바른 사회로 가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정글세계화에 어떤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좀 더 바람직한 세계화의 모습은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 아프리카 흑인이라고 천시하지 않고, 유럽 백인이라고 우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이다. 인간의 개인 가치를 중요시 여기며 어느 누구의 희생도 바라지 않는다. 각기 다른 점을 인정하며, 그 개성을 바탕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다른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성을 죽이지 않고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이다. 세계화를 이런 다른 점을 존중하고 평등한 것을 추구하는 사회로 생각할 때, 영어 공용화와 모순이 일어난다. 티베트족이 중국어를 공용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티베트어를 잘 간직해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지금까지 고유한 문화를 이어가고 있듯이, 또 캐나다의 퀘벡주가 영어의 바다 속에서도 프랑스어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세계화가 아닐까?


한국에서 영어 공용화를 한다는 것은 필히 전 국민에게 영어를 강제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러한 강제적인 행위는 세계화 정신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아울러 앞서 말했듯이 자유주의자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자발적으로 영어 공용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가정은 세계화가 되면 한국어가 불편한 생활을 강요할 것이라는 예측에 기반한다. 한국어를 쓴다고 해서 생활이 힘들 정도의 불편한 생활을 해야 한다면, 이것은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는 세계화 기본 이념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또 지적하고 싶은 점은 가장 큰 다른 점 중의 하나인 언어를 개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없애려 든다는 것은 역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획일화된 세계화는 없는 것이 낫다.


기실 공용어화에 대한 논리는 이미 우리 역사에 있었다. 주요한은 “대동아 공영권의 공용어로서 일본어가 등장할 것”이라며 우리가 빨리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부르짖으면서 우리 민족이 모두 일본인처럼 일본어를 잘 해야 한다고 했다. 친일의 논리는 ‘힘의 논리’였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는 그들의 논리를 다시 듣고 있다. 지금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하는 많은 이들도 애국하는 심정으로 주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구조는 친일파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힘의 논리는 “힘은 변한다”는 기본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서정주의 "일본이 그렇게 망할 줄 몰랐다. 못 가도 100년은 가리라고 생각했다"는 솔직한 고백은 이러한 비극적 현실인식을 전형적으로 나타낸다.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과 함께 친일의 논리가 망한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한국어로 잘 포장해 놓는다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한국어만 가지고도 진리를 잘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중심이 어디로 변하든지 한국어만 지키고 있다면 그들은 진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어 교육은 세계의 중심이 변했을 때, 그 중심에 맞춰서 다시 교육하면 된다. 지금 불고 있는 ‘중국어 교육 열풍’을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영어교육이지 영어공용화가 아니다. 우리는 이 둘을 잘 구분해야 한다.


한 민족이 외세의 침략을 받고 강압에 못 이겨 외세의 언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경우는 있지만 스스로 외국어를 자기 국어로 끌어들이는 일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고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외국어로서의 영어 교육과 공용어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불변인 것은 한글이 우리의 언어고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게 지켜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말글의 지위를 높이자면 우리가 잘 되는 수밖에 없다. 즉 영어를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우리나라를 좀 더 발전시키고 또 우리말글의 지위를 높이는 방편으로 생각해야할 것이다.


끝으로 영어 잘하는 지식인들에게 청컨대, 영어가 좋으면 남에게 강요하지 마시고 그 속에서 좋은 정보 많이 뽑아 국민들에게 쉽게 소개해주는 ‘지식 소매상’의 역할을 많이 좀 해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당신네들이 타박 안 해도 한국어는 자꾸 소멸되어 가고 있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마시라. 불난 집에 부채질하지 않는 것이 그대들의 마지막 상도덕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근대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 개념을 일본말(한자어)로 번역하려고 노력한 것을 생각해보시기를 권한다. 한국어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우리말의 조어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만들 말을 통용시킬 힘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그것은 물론 언중의 책임도 있겠지만 남 위에서 시켜먹기 좋아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길 바란다.


이렇게 시원하게 쏘아붙이고 나서 또 걱정이 된다. 토익 점수는 언제 따며, 대학 영어강의는 또 어떻게 들어야 하나 같은 고민들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으면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글로 쓰려는 노력, 조금 어색해도 한국어 용어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다. 고종석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모국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다. 외국어를 배우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이 처음 배운 언어, 가장 익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외국어 공부량에 비례한 만큼 새록새록 피어날 것이다. 영어 문법 틀렸을 때의 곤혹스러움의 반의 반이라도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채우기를 다짐해 본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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