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영을 위한 변명

문화 2007. 3. 15. 00:30 |

무료신문 <데일리줌>을 펼쳐들었다가 발견한 하얀 달(http://blog.daum.net/literarywork)님께서 쓰신 드라마 <하얀 거탑> 감상 글을 여러 번 읽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장준혁은 가엽다>는 제목의 글에서 글쓴이는 “장준혁은 명예도, 친구도, 자기를 따랐던 수간호사와 막내레지던트도, 종국적으로는 생명마저도 잃었지만, 대척점에 서 있던 ‘선량한’ 최도영은 사실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심지어 친구마저도. 장준혁에겐 경계심을 푼 눈으로 찾아갈 친구가 최도영 외엔 없으니 말이다”고 안타까워한다.


호기심에 글 쓴 분의 블로그를 찾아가 <장준혁을 위한 변명>이란 연재 글을 모두 읽었다. “장준혁을 악한 사람의 위치로 내몰아친 건 이주완이나 우용길과 같은 겉으로도 비열한 이들뿐만이 아니라 오경환이나 최도영, 이윤진과 같은-사실은 이해관계도 없는-선량한 다수들이다”라는 분석이 흥미롭다. “선량한 다수가 한 명의 천재를 ‘정의’의 이름으로 밟는 폭력은, 사필귀정은 교훈이 아니라 또 다른, 전도된 약육강식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신다. 누가 누구를 버렸는지 주객전도의 의혹이 짙다. 나는 선량한 다수가 악한을 응징하는 것보다 소수의 착한 사람이 독불장군이라고 지탄받는 걸 더 많이 보아왔다는 점만 지적하고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장준혁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항변이다. “‘부르주아는 자기 계급을 선택한다’는 말이 있다. ‘삼대째 의사인’ 집안의 이윤진이나 ‘형제가 줄줄이 의사인’ 최도영은 자신의 선함과 여유로움을 ‘선택’할 수 있다. 가진 자는 이처럼 ‘자비로움’을 선택할 수 있어도, 못 가진 자는 일단 ‘가지기’ 이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논리다. 만약 최도영도 배곯고 자라고, 이윤진도 월세 집에서 사는 시민운동가였다면, 즉 최도영이나 이윤진의 집안도 변변치 못해 장준혁에 견주어 그다지 나을 바가 없었다면 이 상대적 비교는 무의미해진다. 그런데 장준혁 만큼 집안이 대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염동일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볼 때 반드시 이 논리가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배경론(환경론) 대신 등장할 건 의리론 혹은 인성론일지 모르겠다. 친구의 의리를 저버리고 스승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거나, 남 잘 되는 걸 못 보는 미성숙한 인간이니 어쩌니 하는 시청자 소견들을 봐도 그렇다. 이런 것들보다 장준혁의 처지에 가슴 짠하게 만드는 건 역시 배경론이다. 장준혁과 대비되는 최도영과 이윤진의 유복한 집안은 그에게 최소한의 명분을 부여하기 위한 작가의 교토삼굴(狡ꟙ三窟)이 아닐까 싶다. 개천의 용이 되기까지 갖은 설움을 겪었을 장준혁을 애처로워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최도영을 비난하는 이들이 의사 집안에서 자란 최도영의 윤택한 환경을 핀잔하고, 돈 걱정 없이 시민단체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을 누리는 이윤진을 흘기면서 장준혁의 바보 산수화나 돈이 담긴 케이크 상자를 건네는 행위에 면죄부를 발급한다.


사실 그 면죄부는 장준혁을 옹호하는 자기 자신에게 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면죄부를 마구 발급한 분들께서는 재벌기업의 편법 경영권 승계에는 어떤 분노를 느낄까 궁금하다. 아마 최도영과 이윤진의 앞선 출발을 개운치 않게 여기는 마음으로 재벌기업을 바라본다면 우리 사회의 균형감각 내지 기회의 평등이 한층 더 넓어졌을 것만 같다. 분노는 위에서 아래보다는 아래에서 위로 향할 때 좀 더 쓸모가 있다. 그러고 보면 외과의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시점의 장준혁은 적어도 돈 없고 빽 없는 절대 약자는 아니었다. 혹자는 젋은 시절의 고생이 그를 메마르게 했다며 동정을 표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렵게 자라면 구김살이 있다 식의 근거 없는 편견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장준혁도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다. 장준혁은 선택의 여지가 생겼을 때도 그 여유를 활용하지 않았다. 장준혁이 명인대학병원장쯤 되면 욕망의 질주를 좀 그치고 자비로움을 선택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건지 회의적이다.


드라마는 선악의 명백한 대립구도를 보여주지 않고 복합적 인간, 양가적 감정이 상존하는 인간 모습을 잘 그려냈다. 하지만 어머니를 향한 사모의 정이나 내연녀와의 애틋함이 장준혁을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고 해서 그가 내면 갈등을 심하게 앓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자신의 신조대로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갔고 차분한 성찰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원체 행동파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정확히는 그가 유능한 확신범이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힘겹게 눌러쓴 상고 이유서가 그 증거다. 장준혁을 현대판 파우스트라 칭하는 건 좀 넘쳤다. 짧은 드라마에서 한 개인의 내면까지 판단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며 개인의 판단 영역이겠지만. 그러나 장준혁의 인간적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인물들의 비인간성을 부러 강조한다면 형평성을 잃은 판단이 될 것이다.


장준혁은 실력 있는 의사였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의술로 많은 환자들을 살렸다. 너무 가파른 의료 윤리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의사 선생님”이라는 칭호에 붙은 사회적 존경 역시 비현실적이긴 매한가지다. 물론 보통 사람이 지키기 힘든 행위를 비현실적이라고 일컫는 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최도영이 철부지가 되고 염동일이 배신자가 되며, 이윤진이 오지라퍼(오지랖 넓은 사람)로 조롱받을 때 우리 사회는 좀 더 현실적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비현실적’이라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노린 건 아니었을까? 너무 양자택일로 묻는 건 같지만 우리 사회에 장준혁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나, 너무 적어서 문제였나? 최도영이 너무 넘쳐서 이 모양인가? 너무 모자라서 이 모양인가?


한국일보 1월 30일자 기사에 우리 사회의 공익제보자(내부고발자) 20인과의 인터뷰 결과를 보면 전체의 90%가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됐고, 절반 가량은 수년에서 10여년 동안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장준혁의 도피처인 현실주의가 먹고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저지른 단계를 넘어 집단적 폭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조사대상의 95%(19명)는 집단따돌림을 당하고, 60%(12명)는 제보 직후 파면과 해임 등으로 직장을 잃었으며, 소송 등을 거쳐 복직에 성공한 일부를 제외한 11명은 아직도 무직 상태라고 한다. 이게 진짜 ‘현실’이다. 공익제보자들은 이러한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55%(11명)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져도 다시 제보하겠다고 답했다. 이들의 비현실성은 그렇게 우스운 걸까?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사람을 왕따시키면서 자신은 현실적이라고 희희낙락할 수 있는 건가? 군대 폭력을 지금 수준으로나마 낮추고, 차떼기 정치가 잦아들게 만든 건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고발했던 이들의 공로였다.


자칭 현실주의자들에게는 늘 성역이 많다. 그네들이 자랑하는 추진력을 위해서는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 성역을 돌아서 가는 게 인간미라며 추켜세우기까지 한다. 의리의 돌쇠가 마냥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일말의 책임의식도 없이 세속적 꿍꿍이 때문에 의리를 사칭한다면 딱히 곱게 볼 까닭도 없다. 한국 남자들이 사이비 돌쇠에게 건네는 넉넉한 시선은 우리 사회를 곪게 만든다. 문제의식 없이 거침없이 달려가는 현실주의자의 폐해를 곱씹으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엄중히 물어야 한다. 현실을 빙자해서 자신의 태만을 방어하지 않았는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핑계 대며 약자에게 칼자루를 휘두르지 않았는가. 양심을 버리면서 그것이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불의에 타협하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위안 삼지 않았는가.


인간은 악하고, 인간들이 모여 사는 국가 또한 악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국가의 유일성, 단일성, 합리성을 가정하는 현실주의는 국제 관계는 무정부 상태에 놓여있다고 보고 결국 힘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상주의 경향을 비판하며 등장한 현실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학계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군림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에 맞서는 자유주의에 진보라느니 이상적이라니 하는 수식어가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상호의존을 강조하고 다원주의를 주창했던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야말로 현실을 바로 보고 있으며 적절한 처방을 내려놓고 있다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현실주의가 무조건 현실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여기는 건 명칭에서 오는 과도한 믿음 때문이다.


현실적이라거나 현실주의자라는 말은 그리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현실상 존재하는 제약조건을 명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응해 실천 가능한 대안을 궁리하는 이에게 주어져야 하는 칭호다. 인간이란 존재의 비루함을 알기에 더욱 인간다움이 고양되는 사회를 위해 가능한 일부터 조금씩 해나가는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인간사의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모순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줄여나가려는 의지도 필요하다. 단기적 이익과 사리사욕에만 집착하고 사람을 이용가치로만 환산해서 주판알 굴리기 바쁜 게 현실주의자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현실주의가 소비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헤겔의 명구는 오역 시비가 있다. 헤겔은 모든 현실을 이성적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성에 맞지 않은 현실을 바로 잡아서 이성과 합치되도록 만들면 현실이 참되게(wirklich) 된다고 논증했다. 존재자의 현존이 본질과 조화를 이룰 때, 즉 고유한 개념이나 기능과 일치할 때에만 참되다, 진정하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것은 이성적이지만, 현존하는 모든 것이 진정한 것은 아니다. “이념은 이상이나 당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이념과 현실은 일치하며, 이 때의 현실은 곧 진정성을 지니게 된다(백훈승. 2004.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가?” 『범한철학』 제33집. pp. 153~171 참조)”는 새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이 논변에 따르면 헤겔은 현실 자체를 합리화함으로써 생존력을 척도로 삼고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 반동적 주장을 하지 않은 셈이다.


이성과 현실의 관계를 놓고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가 대립하고 포퍼를 위시한 사람들이 논박했다. 그만큼 이성과 현실의 좌표 설정은 어려운 문제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복잡미묘한 철학적 용어를 헤집는 것은 내 역량 밖이다. 나는 그저 현실과 이성이 서로 배타적일 때 너도 나도 현실만을 따르지 않는 문화를 구축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의사결정의 단순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개별 인간성에만 천착하지 말고 사회 전반적인 기본 룰로서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상과 도덕으로 빛나는 사회가 아니라 원칙과 상식이 흐르는 사회다. 이와 같은 무던한 지향점은 다시 개별 인간의 주체적 행동이 가능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불가항력이라며 현실을 추수하지도 않고, 부조리를 고치기 위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지도 않아도 되는 게 진짜 ‘인간적인’ 사회다. 나는 이 땅에 그런 인간다움이 좀 더 커지기를 희망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과 비슷한 시기에 올라온 하얀 달님의 마지막 연작에는 “선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몹시 ‘인간적’이었다. 그를 괴롭혔던 ‘인격의 덜 됨’에서 그 인간성의 잣대는 매우 첨탑처럼 놓다랗고 이상화되어 있으나, 그에게서 내가 느낀 ‘인간적임’은 우리가 하루하루의 삶에서 공감할 것들이다”라고 논의를 마무리하신다. “인간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인간적이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들린다. 장준혁에게서 자화상을 발견했다는 분들이 진정한 의미의 현실주의자가 되고, 진짜배기 소신을 건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장준혁의 실력이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 현실주의자들이 할 일이 적잖다. 가령 염동일을 구박하기는 쉽지만 공익제보자들에게 가해지는 집단적 보복이 온당치 않다고 외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현실주의자들이 근시안적이라는 법은 없다. 현실주의자들은 조금 까다로운 일에도 도전해볼 필요가 있다. 장준혁 정도를 역할 모델로 삼기에는 좀 허전하지 않나요?


끝으로 최도영이라는 인물을 추억한다. 그는 절차에 대한 원칙을 견결하게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좀 느린 감이 있지만 과정에 충실하면 저절로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신뢰하는 자세는 배울 점이 많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는 논리가 넘쳐나는 세태에 과정과 결실의 아름다운 일치를 꾀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달갑다. 살맛나는 사회는 과정과 결실의 상관계수가 높아지는 세상이 아닐까. 결실의 달콤함에 취하기보다 과정의 쌉싸래함을 만끽하는 이들이 늘기를 바란다. 우리 둘레에 최도영이 좀 더 늘기를 바란다. 그가 단지 드물기에 숫자를 좀 맞춰보자는 소극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가 옳기 때문에 상식이 되고,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에서다. - [無棄]


추신 - 하얀 달님의 정성스런 글들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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