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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花>, 콩 가는 소리

문화 2010. 9. 26. 06:38 |

2010년 10월을 끝으로 MBC 주말의 명화가 41년 만에 폐지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9월 25일 오전 1시에 MBC 주말의 명화로 본 <황후花>가 제가 본 마지막 주말의 명화가 될 듯합니다. 2008년 2월경에 설 연휴 특집영화로 보고 난 뒤에 썼던 잡글을 조금 손질해서 올려봅니다.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며 설렜던 마음을 추억합니다.


<황후花>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주걸륜이 부른 국화대(菊花臺)라는 노래가 참 좋다. 가사도 많고 시간도 길어서인지 티비에서 틀어줄 때는 통째로 들어내 하마터면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DVD나 IPTV 등을 이용해 관람하시는 분들은 놓치지 말고 챙겨 들으셨으면 좋겠다. 복수를 모티브로 한 <황후花>와 이야기나 전개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한 영화인 <야연>의 엔딩곡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니지만 중국 영화에서 이따금 등장하는 이런 곡들은 스토리의 애잔함을 깊어지게 한다. 마치 한시를 연상시키는 노래를 삽입함으로써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다르다는 문화적 자부심을 드러내겠다는 속셈이 엿보인다. 눈 가리고 아웅 일지언정 OST 차별화에 쏟는 정성이 나쁘지만은 않다. 한국 영화도 배울 필요가 있다면 야박한 요구일까.


<황후花>의 원제는 <滿城盡帶黃金甲>이다. 황소(黃巢)의 시구로 온 성안이 황금갑옷에 점령당한 모습을 묘사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혹자들이 말했듯이 인해전술이 번뜩이는 부부싸움이라고 간단히 정리해도 무방하다. 황제 주윤발의 절대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잔뜩 고조시켜 놓고는 허무하게 꺾어버린다. 콩가루 집안이니까 그 놈이 그 놈이라며 투덜거리다가도 황제에게 구박을 더 건네도록 상황을 꾸민다. 정략결혼을 해서 사랑하지 않는 황후 공리를 서서히 독살하려 하는 것도 모자라 지난날 사랑했던 연인을 두 번이나 배신하는 파렴치한 황제를 변호하고픈 마음을 가시게 한다. <야연>에서 황후 장자이가 건넨 독배를 마다하지 않는 황제와는 확실히 다른 인간이다(장쯔이로 많이 부르지만 통일성을 위해 한국어 발음을 부러 썼다). 영화는 시종일관 권력이 사람을 무섭게 만든다는 식의 흔한 핑계를 둘러대지 않도록 유도한다. 개인적으로는 위장 보약으로 사람을 서서히 죽여 가는 방식이 너무 쩨쩨하게 여겨졌다. 사람을 간질여서 죽이는 게 이런 고통일까?


장예모 변절론을 설파하는 분들은 그의 영화 이력을 고찰하며 안타까워한다. ‘까불지 마라’로 요약되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바람을 은밀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영화 자체로만 본다면 그런 의도를 읽기는 힘들다. 전작인 <영웅>에서처럼 진시황의 천하통일이 무고한 생민을 살리는 길이라며 낯뜨겁게 제국주의를 찬미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황후花>는 적어도 그보다는 덜 노골적이다. 그 당시의 유치함을 보강해 이번에는 좀 더 세련함을 추구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 영화에서 중화주의와 국가주의를 선전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의심의 눈초리가 마땅할 정도로 장예모의 궤적에는 아쉬운 구석이 적잖지만. 그가 그렇게 살기로 했다면 그 자체로는 존중할 일이다. 물론 배우와 감독에게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서는 곤란하다. 배우가 변신에 성공하면 대개는 칭찬 받을 일이지만, 감독이 표변하면 산뜻함을 느끼는 팬도 있고, 서운함에 돌아서는 팬도 있게 마련이다. 감독이나 작가가 학자처럼 변화의 근거를 제시해야할 의무는 없겠으나 상당한 책임감은 품어야 한다. 작품 세계의 다양성과 일이관지(一以貫之)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중양절의 기념해 황후와 황제가 함께 써 내려간 글자는 忠孝禮義!  영화는 이 네 글자 모두를 보란 듯이 어긴다. 대다수 관객이 기대했을 반란의 성공은 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그러나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셋째 아들 원성의 몸부림은 차라리 재롱이었다. 황금 갑옷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범하던 둘째 아들 원걸을 응원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으리라.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라면 긴 환멸이 견딜 만하도록 잠시나마 통쾌함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심보다(2007 대선의 민심이 그랬을까?). 설령 공리가 파안대소를 했더라도 그다지 해피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리라. 그저 주윤발의 입에서 권력무상을 술회하는 장면을 보고야 말겠다는 소박한(?) 마음뿐이다. 권선징악마저 사치스러워질 때 사람 사는 세상이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지를 가슴 저미게 알려준다. 절대선이 사라진 시대에 사는 우리는 가상세계에서나마 절대악을 만나서 극단적인 상대주의 혹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둑을 쌓는다.


황제는 모반을 태연하게 진압한다. 이왕 밉상을 보이기로 작정한 김에 인간성의 바닥을 치다 못해 아예 운하를 판다. 황제는 생포한 원걸에게 황후를 위해(?) 독을 탄 보약 시중을 하면 용서하겠다는 더러운 거래를 제안하고, 원걸은 자결로 항거한다. 영화는 “죄를 짓고 얻은 권력이, 선한 목적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라고 꼬집은 역사가 타기투스의 외침을 끄덕이게 만든다. 인간은 (착하게) 변할 수 있다는 개과천선의 믿음을 송두리째 헝클어뜨린다. 영화 내내 콩 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은지라 적잖은 평자들이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냐며 비판한다. 하지만 복합적인 인간이 아니라 절대악에 가까운 인물을 그려낸 것이 마냥 무익하지만은 않다. 압도적인 미움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북돋는 효과가 있다고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진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황제의 냉혹함이 황후가 전처 소생의 첫째 아들과 통정하게끔 만들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황후는 공격을 했지만 결국 방어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의 패악질에 정당성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황제의 행태를 중국 공산당에 포개어 생각한다면 당사자들이 발끈할 일이다(장예모-공산당 결탁설은 너무 넘친다). 오히려 권력의 집중은 골육상쟁에 흩뿌릴 피의 양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린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싶다. 어차피 감독의 손을 떠난 영화는 관객이 주무르는 게 순리다. <황후花>는 단조로운 구성과 허망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창조적 재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주는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황제에 대한 비호감을 절대권력에 대한 경계로 치환하고프다. 도덕적 자원이 부족한 권력에 어떤 유지비용이 드는 가도 잘 보여주고 있다.


여담이지만 영화가 시작할 때 公元 九二八年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만큼 영화의 배경은 서기 928년이다. 이에 따르면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의 후당(後唐) 명종(明宗) 이사원이 주윤발의 모델이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이사원의 치세는 볼만한 점이 있었다는 평가에 비추어볼 때 주윤발의 악독한 이미지와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다만 후계자 서열에서 유리했던 둘째 아들이 반역죄로 죽임을 당했다는 건 영화와 어느 정도 상통한다. 이사원의 뒤를 이은 건 셋째 아들 이종후였다. 영화에서는 주윤발이 과대(銙帶)로 팼던 셋째 아들이 죽지 않고 그의 뒤를 이었다고 하면 어찌어찌 맞아떨어지기는 하지만 억지스런 노력이다. 공리가 열연했던 양나라(後粱) 공주 출신의 황후가 가공의 인물이니 영화는 어디까지나 허구의 인물들이다.


이사원은 후당을 세운 장종(莊宗) 이존욱의 수양아들이다. 당시에 절도사들은 수양아들을 두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존욱은 반란군이 수양아들 이사원을 옹립함으로써 죽임을 당한다. 이사원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방기했다. 이존욱이 885년생이고 이사원이 867년생이니 자식이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이상한 광경이기도 하다. 이사원의 선정도 부질없이 후당은 4대 13년 만에 멸망했다. <대장금>이나 <왕의 남자>가 사서의 몇 줄에서 출발한 것처럼 <황후花>도 당대의 시대상에서 영감을 얻었음은 또렷하다. 영화는 콩가루들이 요란하게 흩날리던 오대십국의 다반사 한 조각(황실의  치정)을 묘사하는데 그쳤다. 당대에 민초들이 겪었을 고초는 안 봐도 선하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묵공>은 <황후花>의 대체재일까, 보완재일까? - [無棄]


<군소리>
구슬픈 노래를 선사해준 주걸륜에게 보답할 길이 없을까 해서 그가 출연한 <이니셜D>를 찾아본 나도 좀 야릇하긴 하다. <황후花>처럼 뻔한 결말에다 밋밋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한바탕 속도감을 즐기다 보면 속풀이 효과는 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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