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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주최한 제3회 우수 리뷰 대회 이벤트에서 도서별(『다산어록청상』부문) 우수리뷰에 뽑혀 적립금 3만원을 받은 글입니다. 놀고 먹느라 가난한 제게는 큰 힘이 되었어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탁(李鐸)이라는 분은 중국의 사마광을 본받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이탁은 사마광이 “사람이 자기가 평생 걸어온 길을 만 사람 앞에서도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산다면 그는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다”라고 한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 ‘나도 나의 일을 남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결심했다. 아마 이탁이 자신의 평생 신조로 삼을 금언을 접한 책은 『소학』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나는 남보다 뛰어난 점은 없다. 다만 내가 평생토록 한 일 중에는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을 뿐이다”라는 사마광의 말씀이 있다. 『소학』의 모든 글은 기존 문헌에서 추출했다. 경전이나 사서를 떠나 유가식 글쓰기에는 이처럼 편집물이 많다. 옛글을 가공하고 재구성해서 또 하나의 책을 내는 방식이다. 사마광의 이야기는 『송명신언행록』에 출전이 있다. 『송명신언행록』은 북송시대 160년 동안에 배출한 명신들의 언행을 모은 저서다. 무려 97명이 실려 있다. 우리가 배울 점이다.


정민 선생님의 『다산어록청상』을 읽다가 한국 고전을 국역하는 일과 더불어 선현들의 어록 혹은 언행록을 정리하는 일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1884년 『소학』의 체계를 따와서 한국의 선현의 이야기로 엮은 『해동속소학』과 같은 책이 더 많이 늘어야 한다. 김종권 선생님이 편저한 『한국의 명언』이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펴낸 『한국선현위인어록』과 같은 작업이 그런 맥락이다. 여기다가 정민 선생님의 『다산어록청상』과 전작인 『죽비소리』도 힘을 보탠다.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출범하면서 고전 국역사업이 장기적이면서 체계적인 안목으로 이뤄지게 되어 기껍다. 계산을 하기 나름이지만 번역된 고전보다 번역되지 않은 고전이 많다는 건 모두 동의하는 바다. 번역은 되었다고는 하나 너무 고어투에다 편집이 조악해서 읽기가 어려운 고전도 많다. 고전을 국역해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학술문화 민주화의 일환이라는 주장에 적잖이 동의한다. 김용옥 선생님은 다산에 대한 학위논문은 수백 편이 넘는데 여유당전서는 완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을 통박하셨다. 무척 공감하며 고전 국역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빨리 빨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다산어록청상』은 다산의 글에서 귀감이 될만한 토막을 가려 뽑아 모양새 있게 정리한 책이다. 공부법과 독서법을 비롯해 다산이 풀어놓는 인생론이 정갈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의 고갱이를 한마디로 줄여보라면 너무 잔인한 요구다. 열심히 착하게 살자 식의 멋없는 이야기만 맴돈다. 정민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고작 땅 주인이 되는 데 인생을 걸어서야 되겠는가?(29쪽)”라고 해도 좋겠다. 다산은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했다. 물론 이건 다산만의 특징은 아니다. 옛사람들은 왜 그토록 인품을 강조했을까? 도덕적 자원을 과시함으로써 피지배층의 반말을 무마하고 지배층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속셈도 있었을 게다. 『목민심서』 청심(淸心)조에서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大貪必廉)”라는 구절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런 꿍꿍이셈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덕본재말(德本財末)을 강조하고 재승박덕(才勝薄德)을 경계하던 당대 분위기는 오늘날과 사뭇 다르다. 식견보다는 태도나 자세를 우선시하는 낯설음이다. 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나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점차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는 유가적 점진주의의 산물이다. 수기적 행위에 치열할수록 동시에 치인적 행위를 통달하게 된다는 논리다.


심심지 않게 불거지는 공직 부패를 바라볼 때 이내 갑갑하다. 고작 저렇게 살려고 그리 뼈 빠지게 공부하셨는지 좀 안타깝다. 나는 그 분들에게 그걸 좀 묻고 싶었다. 그러면 민망해서라도 달콤함과 향긋함에 몸과 마음을 함부로 팔지 않으려는 분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고마운 선배님께서 “공인이라면!”이라고 일갈하는 건 통쾌한 느낌은 있으나 현실적 효용은 거의 없다고 비판하셨다. 나는 돈 몇 푼에 흐트러지지 않는 분이 1%라면 5%로 늘기를 바라고, 5%라면 10%로, 10%라면 20%가 되는 식으로 의미 있는 숫자로 나아가는 모습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제라고 우겼다. 부귀영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는 사람, 제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을 죽음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를 다스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나의 이런 바람은 제도나 시스템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제도와 의식은 거개 상보적이다. 부패를 미워하는 마음이 부패 방지 시스템을 다지지 않았는가. 성공을 자만하는 순간 툭 떨어진다는 다모클레스(Damocles)의 칼을 스스로 매달아 놓고 살피는 건 개인에게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다. 채제공의 몸가짐(46쪽)도 그런 정신의 발현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각성된 개인의 힘이 굳셈을 기대한다.


그렇다고 옛사람의 말을 빌어다가 도덕적 훈계를 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옛 어록을 인용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기실 어록이라는 건 일정 부분 권위주의적 요소가 있다. 권위 없는 어록은 상상하기 힘들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 없다”라거나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라는 말을 일개 경영학도인 내가 발설하는 것보다 유일한 박사님께서 설파하셨을 때 더 큰 힘을 얻는다. 금주령이 내려진 때에 세종대왕의 옥체를 염려한 신하들이 술을 들도록 간청한 일이 있다. 대왕은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予則飮酒, 而禁人用酒可乎)?”라고 답했다. 불법과 편법을 자행하는 우리네 지도자들에게 이 옥음을 늘어놓는 까닭도 결국 세종대왕의 광휘에 기대려는 의도가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더군다나 모범답안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 살아가는 문제를 재는 잣대로 어록을 끌어다 쓰는 건 더욱 위험하다. 앞서 본 이탁의 사례처럼 그건 개인 수준에서 그쳐야 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근사한 문구 오려 붙이는 재미는 쏠쏠하다. 의사들이 진단서를 휘갈겨 쓰고, 공대생이 수식을 즐기는 것과 비슷한 심보다. 


나는 전고(典故)가 잦은 글쓰기가 권위에의 호소가 되기 일쑤며,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는 지적에 동감한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의도보다는 “좋은 걸 좀 배워보자”는 의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마음공부를 둘러싼 다양한 말씀과 사례들을 저마다 품으려는 정성을 너무 흘겨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령 『다산어록청상』을 읽고 갈무리 해둔 구절을 세밑 송년회 자리에서 써먹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담백함이 지나쳐 말라 비틀어져 가는 세태에 적절한 수준의 지적 허영이 순기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겉멋에도 귀천이 있다면 너무 박절하겠지만 고전 인용 같은 겉멋이라면 어느 정도 권장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예기』, 『여씨춘추』를 발췌독한다고 했더니 친구에게서 “호사스럽다”라는 핀잔이 날아왔다.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책 좀 읽으라는 간곡한 충고도 곁들여서 말이다. 나는 차라리 이 팍팍한 삶에 호사스러움을 건사하고 싶다. 조금 투덜거리자면 고전을 읽고 일상에서 언급하는 게 왜 호사가 되고, 겉멋이 되고, 허영이 되어야 하는가. 그건 그만큼 우리가 옛것에 대한 홀대와 괄시 속에 살아왔다는 방증일 따름이다.


기파랑은 무척 기품 있는 인물이었나 보다. <찬기파랑가>를 감상하면 기파랑이 지닌 마음의 가장자리만이라도 따르려는 마음씨가 살갑다. 『다산어록청상』의 모티브가 된 <도산사숙록>도 이런 흠모의 소산이다. 사숙(私淑)은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분을 본보기 삼아 학문과 덕행을 쌓는 과정이다. 맹자가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숙을 통한 사제 관계는 매우 많다. 다산은 퇴계와 성호 이익을 사숙했고, 신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사숙했고, 김춘수는 릴케를 사숙했다. 간디는 소로(Thoreau)를 사숙했고,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사숙했으며, 보들레르는 포(Poe)를 사숙했다고 한다. 우리 둘레를 보면 멋있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역할 모델에게서 영감을 얻고 성찰함을 발견한다. 칸트는 흄의 저작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주위에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자가 될 바지런함이 없지 않았는가 반성한다. 다산은 주희를 구박하는 재미에 살았던 모기령을 높게 보지 않았다(100쪽).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가 된다는 것, 앞사람을 극복하는 뒷사람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도전할 만하지만.


다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툭하면 중국의 일을 끌어다 쓴다.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168쪽)”라고 비판한다. 자식들에게 『고려사』 같은 한국 사서를 읽히려는 부정이 애틋하다. 정민 선생님과 같은 노고가 누적된다면 궁극적으로는 어린이들의 독서에 많은 보탬이 될 듯싶다. 미사여구로 분칠한 위인전에서 멈추지 말고 선현들의 어록을 익히고 평생의 신념이 될 경구를 만나게 한다면 더 흡족하리라. 기왕이면 그 폭이 넓어지길 희망한다. 정몽주의 <단심가>만 알지 말고 고려 말의 충신 변안열의 <불굴가>도 읊었으면 좋겠다. 성삼문에 그치지 말고 이개의 시조도 음미하며 올곧게 살기의 어려움을 곱씹으면 좋겠다. 정조대왕은 『홍재전서』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어록인 일득록(日得錄)을 넘기며 대왕과 좀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만 노래하기보다는 퇴계 선생이 소장한 주자전서 사본 한 질이 너무 낡아서 글씨가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는 일화도 꺼내보면 어떨까. 새파랗게 어린 기대승과 서간문으로 엄밀하게 논쟁하면서도 고깝게 여기지 않고 선조 임금에게 기대승을 천거하는 그 넉넉함도 배워봄직하다. 인사를 맡은 사람이 『성학집요』 용현(用賢)편을 뒤적인다면 유쾌한 일이다. 서양의 그럴듯한 유언에만 눈을 돌리기보다 왕건이 “덧없는 인생이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浮生自古然矣)”라고 유언한 내용도 모아두면 좋겠다. 이렇게 앞서 거닐었던 분들의 말을 기억해내고 창조적으로 이어가려는 노력이 마냥 무익하지만은 않을 게다.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문화사』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가 가슴이 짠하다. 연산군을 충동질해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에게 어떤 사람이 “후세의 사필(史筆)이 무섭지 않으냐?”고 따졌단다. 유자광은 의기양양하게 “누가 『동국통감』을 읽나?”고 응수했다. 『동국통감』은 조선 성종 때 서거정이 단군 조선에서 고려 때까지의 역사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즉 누가 조선사를 읽어 내 행적을 기억하겠는가 하며 안심한 셈이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더 애호하고 시시비비를 간직할 때 한가로운 소리가 아니라 실용적인 기능도 수행하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도두보는 국민이 많은 나라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만만치 않을 듯하다. 흔히들 한국에는 영웅이 없다고 한다. 부러 영웅을 만드는 건 억지스럽다. 하지만 앞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하고 끊임없이 반추할 때 영웅보다 더 훌륭한 삶의 거울이나 나침반을 만들어 봄직하다. 오늘날의 이탁이 사마광도 좋지만 한국의 누군가를 우러르며 가슴 뛴다면 이 또한 반가운 일이다. 어색한 짜릿함보다 친숙한 푸근함을 꾀하자. 편집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좀 더 많은 편집자가 필요하다. 케인즈가 역설했듯이 위험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사상(思想)이다. 우리의 사상을 풍요롭게 할 편집의 만개를 고대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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