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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경영학도?

경제 2006. 6. 14. 01:00 |
그러나 5.31 지방선거가 보여주듯이 한국의 진보는 정점에서 다시 추락하고 있고 한국의 보수는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보수의 부활은 다음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추동되었다. 첫째, 한국 진보의 실패가 한국의 보수에게 부활이라는 반사이익을 안겨주었다. 한국의 진보는 정권을 장악했을 때, 통치능력 (governability)을 보여주지 못했다. 진보정권은 세계화의 도전에 대응하여 성장촉진형 분배정책, 분배개선형 성장정책의 개발을 통해 경제영역에서 헤게모니를 구축하는데 실패하였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나 동반성장이라는 수사학은 요란했으나, 성장은 부진했고 분배상황은 악화되었다.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진보의 지지기반은 약화되었다. ‘고용없는 성장’으로 청년 실업층이 증가하면서 진보의 강고한 지지층을 형성해왔던 20대의 이반이 일어났다.
- 임혁백. “한국사회는 보수화되고 있는가” 교수신문. 2006. 06. 05.


도둑처럼 다가온 한나라의 천년왕국(?)에서 영락을 누리기를 마다하는 내 자신이 밉다.^^; 임혁백 교수님의 글 중에서 “성장촉진형 분배정책, 분배개선형 성장정책”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 왔다. 앞으로 짬을 내어 그 쪽을 고심해보고 싶다는 야심에 불타 올랐다. 가령 파이는 언제까지 키워야하는 것인가, 성장우선주의는 극복할 수 없는 절대선인가, 양극화 문제를 좀 더 합리적으로 조정가능한 방안은 무엇인가 같은 주제들을 놓고 궁리해봐야겠다는 의욕이 생겨버렸다. 조세정책을 비롯한 분배정책, 공정거래/재벌 문제/소유지배구조를 검토하는 기업이론, 균형 잡힌 노사관계, 납득 가능한 국민연금 개혁, 부동산 문제 해법, FTA를 위시한 통상정책 등의 주제를 놓고 모자란 머리를 신나게 굴려보고 싶다. 사실 내 학부 전공과 적잖이 관련도 있고 말이다. 그간 너무 외도(?)가 심했는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돌아온 탕자(蕩子)가 되어 볼 참이다. 돌아온 탕자가 올바른 길을 간다는 법은 없지만 말이다.


기실 명색이 경영학도이면서도 내 전공을 조금 업신여겨왔던 거 같다. 수리에 약한 내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구차한 숫자놀음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아주 좋아서 경영학도가 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굴러들어간 것이지만 이 운명 같은 만남을 통해 내 자신이 많이 배우고 성장했음을 이제야 밝힌다. 경제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경영, 경제에 대한 이해와 기업인에 대한 합리적 비판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을 좀 더 확장해봐야겠다. 내가 돌아가는 까닭은 한번뿐인 삶을 대충 살지 않기 위해서다. 경영, 경제학적 지식을 좀 더 연마해야겠다. 몰라서 당하기는 싫다. 가령 서울대 박세일 교수는 부유한 국민이 사는 덕 있는 나라라는 “부민덕국(富民德國)”이라는 이상을 제시했다. 나도 실질적 분배를 구현하는 성장전략을 어떤 식으로든 모색해보고 싶다. 부민(富民)은 그 누가 독점하기에는 너무 소중하고 절실한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외우고 싶지는 않다.


2005년 4월에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 11기 3차 회의에서 공개된 북한의 2005년 예산은 북한 돈으로 3,885억원인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이 미화 1달러에 북한 돈 135원50전 정도의 공식 환율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28억7,000만 달러가 2005년 북한 예산이라고 추정했다. 그 당시 환율 1달러에 1,000원으로 계산하면 한국 돈으로 2조 8,700억원이 북한의 한해 예산인 셈이다. 한국 정부 예산 195조원의 약 1/70 규모다. 2005년도 한국 국방비가 20조8,226억원이었던 것을 따져볼 때 북한의 예산 전액이 국방비에 투입되더라도 한국 국방비의 1/8 수준이라는 점이 충격적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고 북한은 국방비가 전체 예산의 15.9%인 618억원(한국 돈 약 4,600억원)을 배정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실제 국방예산은 공개된 것보다 2배 이상 많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의 계산에 따르더라도 북한의 국방 예산은 1조원 이상에 불과해 우리 국방비의 1/10도 안 된다.


북한의 예산체계가 우리의 그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물가도 차이가 난다는 점을 참작하더라도 이 수치는 놀랍다. 왜 훈련소의 정훈 장교는 미군이 없으면 우리가 북한을 이기기 힘들다고 열변을 토했을까. 당최 우리나라 군대는 이 압도적으로 차이나는 예산을 가지고도 북한 하나 이기지 못하는 국방력을 보유하고 있다니 기가 막히다. 물론 공격을 하는 쪽이 방어를 하는 쪽보다 쪽수나 물자가 우세해야 한다는 건 병가의 상식이다. 그런데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을 우리가 먼저 침공할 일도 없을 터이고 방어를 위한 전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이쯤 되면 군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문책해야 하는 거 아닌가. 군 장성부터 예비군 동대장에 이르기까지 매일 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베갯잇을 물기로 적셔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여하간 이런 식으로 조금만 유식해지면 사기도 덜 당하고 남 좋은 일을 나 좋은 일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된다.


성경에 있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찾아 음미했다.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 있는 이 이야기에는 아버지로부터 재산 상속분을 미리 받아 머리 떠났다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나온다. 돌아온 못난 자식을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달려 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준다. 그간 아버지 곁을 지켰던 착실한 맏아들은 “그동안 내 벗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도 주지 않으시더니 놀다 온 아들에게는 이렇게 잔치를 베풀어 줄 수 있느냐”며 불평한다. 아버지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지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며 달랜다. 사실 내가 탕자 흉내를 낸다고는 했지만 묵묵히 실천으로 보여줬던 맏아들의 심정은 충분히 동감할 수 있을 듯싶다.^^;


아버지를 떠날 때는 스스로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돌아올 때는 다시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탕자의 마음이 되어 본다. 나는 둘째 아들처럼 내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경영, 경제의 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돌아온 탕자의 마음처럼 다시는 내 전공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경영학의 이름으로 기도한다(어느 목사님의 설교문의 표현을 데려와 바꿔봤다). 어쩌면 내 전공은 집 나간 경영학도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축복하기를 빨리 하시는 사랑의 경영학은 인내하심으로 기다리는 사랑, 내 더러움을 개의치 않는 사랑, 좋은 것으로 바꾸어주시는 사랑, 내 방황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랑을 주신다. 어찌 아니 경배할 수 있겠는가.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다. 이제 경영학 어버이의 품으로 돌아가야겠다. 이제는 경영학의 전능(?)을 뼛속에 새기며 경영학을 나의 지적 스승으로 모시고 경제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새 인생을 살아야겠다. 내게도 잔치를 베풀어주시리라. 금의환향을 못한 귀거래사일지언정 고향은 언제나 그립다. 돌아가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맸지만 멀어진 건 아니다. 비로소 지금이 옳고 어제가 그릇됨을 알았기에(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 경영경제宗敎(?)에 귀의하면서 너무 요란을 떨었나.^^; 다시금 강조한다. 몰라서 당하는 게 싫어서 돌아간다. 내 마음의 고향으로. - [小鮮]


혁명적 변화는 사람들에게 영웅적 행위 속으로 개인의 삶을 투척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의 경우 일상적 삶에서 잃어버릴 것이 없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발전 단계에 두드러진 것은 일상적 삶의 성장이다. 그것을 넘어, 해야 할 많은 일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얻은 것에 기초하면서 그것을 넘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마르크스적 혁명 이상에 공감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성쇠를 지켜보면서 사회 혁명의 바른 방법은 마치 시인이 사실을 비유적으로 변화시켜 원래의 의미를 확대하듯이 사회가 드러내주는 사실 자체의 성격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현실의 핵심적인 사실에 충실하면서-이 현실이 사람의 삶의 기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그것을 보다 온전한 것으로 바꾸어 가고, 그것을 보다 나은 다음 단계로 유도해 가는 것이다.
- 김우창. “[시대의 흐름에 서서] 정치와 일상적 삶” 경향신문. 2006. 06. 07.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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