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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30 ‘앎’과 ‘삶’의 거리

“배움이라는 것은 장차 그것으로써 행하려고 하는 바이다(學者 將以行之也)”라고 정이천(鄭伊川)은 말했다. 간명하면서도 정곡을 찌른다.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놓고 선현들도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게다. 지와 행을 두고 벌어진 주희와 왕수인의 논변은 매력적이다. 정이천은 행동의 기초가 되는 앎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희 역시 제대로 알면 행하게 되며,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앎이 얕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먼저 이치를 깨우쳐야 행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은 직관적으로 수긍이 가는 면이 많다.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해서 우선 무엇이 옳은지 알아야 한다는 견해를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정조대왕 역시 주희의 견해를 좇아 “만약에 지식에 참되지 못한 바가 있다면, 실천에도 부족한 점이 있게 된다(若知有所未眞 則行有所未逮)”라거나 “배움(學)이라는 한 글자는 넓게 말하면 지(知)와 행(行)을 겸하지만, 좁게 말하면 지에 중점이 있다(學之一字 專言則兼知行 偏言則主乎知)”라고 말했다(정조대왕어록인 『일득록(日得錄)』 참조).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앎을 쌓는데 열중하느라 영원히 실천을 못하고 인생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듯싶다. 어쨌든 실천보다는 앎을 중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지식의 습득을 강조할수록 많이 배울 여력이 있는 사대부 계급의 통치가 자연스럽게 공고해진다. 이 때문에 주자학이 체제유지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배움이 깊어질 여력이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 상층부에 좀 더 몰려있을 테니 말이다.


주자학에서도 누구나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양명학은 좀 더 적극적으로 누구나 윤리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왕양명은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내세우며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단지 아직 알지 못한 것(知而不行 只是未知)”이라거나 “참된 앎은 행하기 위한 까닭이다. 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앎이라 말할 수 없다(眞知所以爲行 不行不足以爲知)”라고 목청을 높였다. 지행합일의 참된 앎(眞知)이 발현되지 않는 것은 사욕(私慾)에 가로막힌 것이며 사욕을 배제해 지행의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변이다. 주자학의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은 부러 실천을 강조한 면도 적잖다.


선지후행설에 건네는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선지후행설이 지배계급의 이익에만 복무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호소력을 갖추고 있다. 지에는 지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조회하고 고치는 반성의 능력까지 포함한다면 선지후행이 예의 편협함을 상당 부분 덜어낼 수 있으리라. 여기다가 생활 속의 소소한 실천에 인색하지 않는 정성까지 보탠다면 선지후행설은 지행합일설과 거의 의견일치를 볼 수 있다. 이렇게까지 단서조항을 덕지덕지 달아가며 선지후행설의 불씨를 살리려는 까닭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라도 많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위인 앞자리에 잠곡 김육 선생을 둔다. 잠곡은 ‘앎’과 ‘삶’의 거리를 줄여나가는 노력의 전범으로서 내게 각인되어 있다. 칠순이 넘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동법(大同法) 확대 실시에 일생을 걸었던 잠곡의 신념을 흠모한다. 당시 대동법 반대론자들도 공납의 폐단이 심각한 지경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호패법을 강화해 농민의 유망을 막자는 해법을 내놓았다. 잠곡은 백성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민생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호패법을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장기 비전은 한결같은 소신이 되었고, 실무파악능력은 수행력으로 뒷받침되었다.


대동법 반대론자가 권세의 눈치를 보느라 호패법을 제시했다기보다는 그네들도 자신의 생각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 산물이었다. 잠곡의 삶이 선지후행인지 지행합일인지를 가르는 건 무의미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지의 문제가 좀 더 중요하게 조명될 필요는 있겠다. 대동법 찬성론자와 대동법 반대론자가 모두 지행합일에 충실했다면 그들 각각의 세계관을 조회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동법이 보다 나은 대안이라는 것을 호기롭게 주장하자니 뒷사람의 이점을 악용하는 것만 같아 스스럽다. 그 시대에 놓였을 때 대동법을 주창할 혜안이나 용기를 갖추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대동법과 호패법의 맞섬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 실제로는 비율과 조합의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도덕적인 가치판단에는 어느 정도 합의 가능한 부분이 넓지만 정책적인 가치판단에는 합의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가령 선지(先知)에 가까운 경제학자들이 벌이는 논쟁 가운데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의 선택 문제가 있다. 효율성 측면에서 볼 때 인플레이션이나 실업이 자원배분을 왜곡하거나 자원낭비를 유발한다는 건 또렷하다. 하지만 공평성 측면에서 살피면 판단 내리기가 어렵다(이영환·김진욱, 『경제학 강의』, 율곡출판사, 2007. 참조).


실업은 전체 인구의 일부에 해당하는 문제이지만 인플레이션은 모든 국민이 겪는 문제이므로 인플레이션 퇴치를 우선하는 것이 공평성을 충족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인플레이션의 증가보다는 실업률이 증가하는 것이 빈곤율을 더 상승시켜 피해가 저소득층에 집중되게 만들므로 이에 대한 처방이 더 중요하다는 견해가 있다. 후자의 견해로 대표적인 학자가 앨런 블라인더(Alan Blinder)인데 그는 『단단한 머리, 부드러운 가슴(Hard Heads, Soft Hearts)』라는 책에서 인플레이션이라는 감기를 치료하기 위해 (높은 실업률이라는) 뇌수술 받는 건 어리석다고 질타했다.


블라인더는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기침체는 소득분배를 악화시키기 때문에 공평성을 해친다고 봤다. 경미한 인플레이션을 수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블라인더는 공직에 나가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부의장을 역임하면서 그린스펀 의장과의 마찰을 빚어 18개월만에 사퇴했다. 블라인더가 옹호하려고 했던 공평성과 인플레이션 중시론자들이 건사하려 했던 공평성 사이에는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 것일까? 양측의 지식과 행동에 우열을 가리는 건 가능한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다 보니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앎’과 ‘삶’의 관계를 두 갈래로 봐야하는 건 아닐까 싶다. 도덕적인 실천의 문제에서는 지행합일이 좀 더 맞고, 사회현상에 대한 정견은 선지후행이 좀 더 적합하다. 잠곡이나 블라인더의 사례를 보니 정책은 지행합일을 금과옥조로 내세우기 곤란하다. 두 영역이 매끄럽게 나눠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 헛갈려서는 곤란하다. 지행합일이 요구되는 곳에서 지를 핑계되며 미적거리고, 선지후행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 행이 급하다며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하는 건 모두 경계할 일이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동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지식 없는 행동은 맹목적이다(언뜻 보면 지행합일을 논하는 것 같지만 뜻빛깔에서 차이가 난다).


고작 이런 이야기나 늘어놓으려고 쓸데없이 끼적였다. 알기도 너르게 알아야하고, 살기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무미건조한 한마디나 읊조린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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