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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0 근현대사 교과서와 문명국가 2

고백하건대 저는 14세기 여말선초 이전의 한국사를 주로 관심 있게 탐구하고 있어서 근현대사는 잘 모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권고안을 놓고 다툼이 한창이다. 2010년에 제7차 교육과정이 끝나고 2011년부터 근현대사 과목은 고등학교 1학년 공통 필수과목인 역사 과목에 포함된다. 그런데도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문제를 놓고 건곤일척을 벌어지는 것이 다소 황당하다. 물론 잘못된 내용을 한시라도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이 맞지만 교육의 문제가 정치적 논쟁으로 확산되는 형국이다. 지난 11월 말에 이 논쟁의 한 복판에 서있으신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이하 경칭 생략).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고찰하고 문명의 의미를 조망하는 묵직한 시간이었다.


박 교수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는 식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어서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는 물질적 번영뿐 아니라 문명사적 가치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원주의 사회는 여러 스펙트럼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펀더멘털(fundamental)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는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원주의라고 해서 모든 것이 차이 난다면 정치공동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형식의 정통성 혹은 정체성을 공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국가의 형성이 잘 되었는지 여부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고 선을 그었다.


결국 그의 논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가치에 대해서는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제헌헌법의 정신인 자유, 인권,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논쟁을 벌일 토대가 마련된다는 논리다. 그는 금성교과서 사례를 들며 남북합작세력을 조명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불인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원죄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1955년 반둥회의를 소개한 의도가 광복 후 우리가 나아갈 길이 제3세계였다는 함의를 읽었다고 술회했다.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라는 식의 서술은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6·25 전쟁을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주의가 방어한 문명사적 의미를 누락하는 몰가치적 서술로 귀결되었다는 그의 주장이 매서웠다.


박 교수는 남북 간의 차이를 문화의 차이로 접근하려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역설했다. 문화의 차이는 인간의 존엄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남북의 차이는 문명과 야만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출신 성분에 따라 갖가지 차별을 받는 북한 사회에 대해 침묵하는 교과서를 언급했다. 전체주의 사회에는 사적 영역이 없는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며 비판했다. 또한 북한의 농지개혁은 사적 소유권 없는 집단농장화이며 소유권이 분배된 것이 아니라 경작권에 지나지 않음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은 것도 꼬집었다. 남한의 ‘유상매수 유상분배’와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두고 객관적으로 비교하지 못했다며 질타했다. 그는 문명사적 가치와 함께 가야 건강한 민족주의이며 남한 지도자의 독재를 비판하듯이 북한 전체주의를 비판해야만 건강한 국가정체성, 시민의식, 비판정신을 함양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영화 <300>에 나오는 테르모필레 전투를 예로 들며 문명과 야만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묘사했다. 박 교수는 “인간은 인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라고 여긴 것이 문명의 징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시민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테르모필레의 전투에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에게 전령을 보내 항복을 종용한다. 별 소득 없이 돌아온 전령은 레오니다스와 병사들이 마주보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보고 스파르타군을 규율 없는 오합지졸이라고 보고했다. 감히 왕을 빤히 쳐다보는 자들에게 무슨 기율이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스파르타가 결사항전을 하자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에서 망명을 온 데마라토스에게 자문을 구한다. 데마라토스는 “스파르타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법(노모스)”이라고 말한다. 박 교수가 다른 글에서 그 발언을 좀 더 길게 인용하신 것을 발췌해봤다.


“그들은 물론 자유스럽습니다만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법(노모스)이라는 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정도는 전하의 신하들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합니다. 여하튼 그들은 이 왕이 명하는 대로 행동하는데, 이 왕이 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즉 어떠한 대군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지 말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적을 제압하든지 자신이 죽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박 교수가 헤로도토스의 『역사』 한 토막을 길게 인용한 것은 페르시아라는 야만에 대항했던 스파르타처럼 문명을 옹호했던 대한민국의 역사가 볼만한 것이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나는 북한이 야만적인 사회라는데 기꺼이 동의한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처럼 남북한을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북쪽 나라인 발해를 평가하기 위한 자료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쪽 나라인 신라와의 차이가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북한의 야만을 강조하면 할수록 야만국가는 제외하고 문명국가인 우리만이 선진화를 이룩하자는 식으로 나아갈 까봐 걱정이다. 문명 대 야만의 관점으로만 보면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이 평화적인 방법보다는 요란한 파열음을 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은 야만국가임이 또렷하지만 그것을 상술하는 실익이 어느 정도일지도 따져볼 문제다. 북한의 인권문제와 남북 화해협력 사이의 균형을 찾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만.


여담이지만 나는 북한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알리는데 열중하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문명국을 자처하기에 너무 초라해지고 있는 현실에 더 주목하는 중이다.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현상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당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인터넷 댓글에 적잖이 공감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푸념을 했을까 싶다. 야만에 대한 경계와 문명에 대한 열망이 따로 놀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긴밀하게 잇닿는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조화롭게 발전하는 것이 문명의 시금석이라고 한다면 한국 사회는 얼마나 떳떳한지를 묻는 시도가 마땅히 계속되어야 한다. 이런 고민을 역사 교과서에 자세히 실을 필요는 없어도 좀 더 멋진 문명국가가 되기 위한 자기반성이 살짝 들어가는 게 좋겠다.


현대사는 역사학자 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사람들과 소통해 합의될 만한 가치를 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다만 뉴라이트가 펴낸 대안교과서 필자 가운데 역사학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문제 제기는 적절하다고 본다. 근현대사가 역사학만의 영역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수많은 근현대사 연구자의 참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구색 맞추기를 위해 역사학자를 몇 명 끼워 넣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좌편향을 문제삼는 분들이 우편향으로 달려가는 징조가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3억 원짜리 수면제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 서울시 교육청의 현대사 특강이 대표적 사례다. 교과서 포럼 관계자들은 이 점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박 교수는 좌편향과 우편향은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지만 금성교과서가 그 제한을 넘어 타깃으로 삼았다고 설파했다. 그는 교과서는 학자적 소신을 펼치는 논문이나 학술서적과는 달라서 일정 수준 검증해야 하는데 이러한 검증의 주된 잣대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설령 금성교과서의 잘못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해도 그의 논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정부나 교육 당국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벌이는 억압적인 방식에 반대해야 한다. 이는 헌법 제31조가 보장하는 교육의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 교과서 시장을 권력을 통해 교란시킴으로써 이 땅이 그토록 힘겹게 건사해온 시장경제의 원칙도 무너졌다. 헌법정신을 지키며 절차를 준수하고, 권력의 자의적 남용을 방지하고, 사상의 자유시장을 존중해야 문명국가이며, ‘기적의 역사’가 아닌가?


강연을 듣는 내내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치유하지는 못한다”라는 고종석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이 하는 일에 편향이 없을 수 없지만 거기에는 절제와 금도가 있어야 한다. 정부나 교육 당국이 벌이는 일련의 행각을 사화(史禍)라고 지칭하는 분들이 있다. 절제와 금도를 넘은 사화는 또 다른 치우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괜찮은 문명국가임을 내보이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야만스럽다면 이것은 문명이 아니다. 역사가 정권의 전리품으로 전락한다면 이것은 문명이 아니다. 거대 언론과 정부 여당의 힘을 빌린 세력이 마녀사냥을 자행한다면 이것은 문명이 아니다. 이 정부 아래서 힘센 분들이여, 부디 역사를 그리고 문명을 외경하시길!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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