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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그리고 개혁

사회 2007. 12. 12. 23:23 |

1.
세상을 떠나 홀로 서있는 사람(離世獨立之人)을 얻어 크게 써서 오래 묵은 폐습(因循之弊)을 혁파하려고 (왕이) 생각했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


공민왕과 신돈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나? 동상이몽은 아니었을까? 가장 먼저 이런 의문을 품어 본다. 공민왕 14년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 신돈은 국정의 전반에 등장한다. 공민왕은 재위 23년 동안 원년, 5년, 12년, 20년 4차례에 걸쳐 개혁조서를 반포했다. 그런데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조서의 형태로 일괄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사서의 기록에 산재되어 있어 복원하기가 힘들지만 많은 학자들의 연구로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은 신돈 집권기의 기록이 누락되어 그 시대를 온전히 복원할 수 없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그 실례로 신돈 집권기 인사 이동 내역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를 든다. 하지만 기록이 없는 게 오히려 득이 되기도 한다. 가령 왜구의 침략을 분석한 기록을 보면 상황이 다르다. 신돈의 집권 이전 13년 간 44회, 집권기 5년 7개월 간 7회, 실각 이후 3년 간 23회 있었다는 기록을 들어 군사조직 개혁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사서의 기록을 불신하는 측에서는 나쁜 기사는 빼놓지 않고 실었을 것이라고 항변하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신돈의 시대를 곱씹는 일은 부족하고 편향된 사료를 헤집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공민왕 8년과 10년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이 있었다. 개경이 함락되기까지 했고, 삼원수(三元帥)를 둘러싼 극심한 내부 알력도 있었다. 12년에는 흥왕사의 난으로 말미암아 홍언박을 비롯한 공민왕의 측근세력이 제거되고 무장세력이 권력의 일선을 자치했다. 그래서 12년에 발표했던 개혁교서를 선언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13년에는 덕흥군이 원나라의 세력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격퇴했고, 그 해 10월에는 원의 공민왕 복위교서가 도달했다. 이러한 내우외환을 가까스로 수습함으로써 공민왕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 국면을 이용해 내정개혁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인용했듯이 신돈을 등용한 목적은 비단 무장세력의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신돈의 등용을 통하여 기존의 정치세력을 모두 억누르고 국왕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려는 의도는 공민왕이 기존의 정치세력들을 세신대족(勢臣大族), 초야신진(草野新進), 유생(儒生)으로 나누며 비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공민왕 5년에 있었던 반원 자주화이라는 대외적 개혁이 성공적이었다면, 사회경제적 모순을 타파하는 대내적 개혁은 신돈 집권기에 가장 빛났다.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민생문제의 해결, 정치운영의 정비와 교육개혁으로 요약된다. 가장 주목되는 건 역시 공민왕 15년(1366) 5월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다. 관리의 근무일수를 승진의 기준으로 삼은 순자격제(循資格制)의 실시, 성균관 중영(重營)과 과거제도 개편 같은 행동도 궁극적으로 전민변정사업을 보완하고 개혁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계개편의 일환이라 볼 만하다. 전민변정도감은 전(田)과 민(民), 즉 토지와 노비를 판정하는 기관을 말한다.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를 본래의 신분으로 만드는 기능을 하기 위해 꾸렸던 기구다. 기실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 시기의 고유 제도가 아니다. 고려 후기에 토지 및 노비에 대한 행정이 어지러워지자 원종 10년(1269) 처음 설치한 이래 충렬왕, 공민왕을 비롯해 우왕 14년(1388)까지 실시되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 원종 10년, 충렬왕 14년과 27년, 공민왕 원년, 우왕 7년과 14년에 두었다고 쓰여 있다. 공민왕 15년에 설치한 기록은 빠져있다. 식화지나 형법지(刑法志)에 신돈 집권기에 있었던 전민변정사업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애석하다. 이는 앞서 밝혔듯이 신돈 집권기가 조서의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은 여파와 더불어 신돈에 대한 폄훼의 산물이다. 『고려사절요』에는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이라고 하고, 『고려사』 신돈열전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고 적혀 있다. 조금 용어가 다르지만 기능은 비슷했다고 본다.


고려말의 토지 문제는 체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다. 당시 권문세족들은 평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국가의 땅을 몰래 차지하면서 조세는 내지 않고 백성들에게는 고리대를 받는 등의 수탈을 자행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고려말의 전민변정사업은 번번이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돈 집권기에는 제법 볼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의 판사(判事)가 되어 전민(田民)을 권세 있는 무리들(豪强之家)이 강제로 빼앗아 차지해서 백성들은 병들고 나라는 여위게 되었다(病民瘠國)고 비판하며 변정사업을 시행한다. 신돈은 병든 백성(病民)만큼이나 여윈 국가(瘠國)를 걱정했을 것이다. 억울하게 토지를 뺏기거나 노비가 된 경우를 바로 잡아서 납세와 역(役)을 담당하는 양인이 느는 건 왕권 강화에도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런 연유로 신돈의 개혁이 친민중적이라 보기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민변정사업은 토지 겸병의 현실과 그 발생의 구조적 모순은 묵과했다. 사패전(賜牌田)의 폐단을 시정하고 농장(農莊)을 해체하려는 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신돈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고려사』 편찬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2.
명령이 발표되자 많은 권세가와 부호들이 빼앗은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온 나라가 기뻐했다. 신돈은 하루건너 도감에 출근했으며 이인임과 이춘부 이하의 관리들이 소송을 듣고 결정을 내렸다. 신돈이 겉으로 공의(公義)를 가장하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답시고 천민노예(賤隸)로서 양인이라고 호소하는 자는 모두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에 주인을 배반한 노예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인(聖人)이 나셨다”라고들 하였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


이 기록을 따져보면 신돈이 소인들의 환심을 사는 인기정책을 써서 노비가 주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비판이다. 성인이 났다는 열광도 신돈을 깎아 내리기 위해 인용했을 확률이 높다. 이 빈정거림이 신돈의 본모습을 추적하는데 결정적 증거로 활용된다니 아이러니다. 사가들은 신돈은 토지 및 노비 분쟁에서 편파적으로 판정(偏聽)했다고 비난한다(『고려사』 권111, 열전24, 임박전). 이는 바꿔 말하면 일반민의 입장에서 권문세족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제임스 팔레 교수는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사회경제적인 의미는 거의 없는 정치변동이라 평가절하하면서도 전민변정도감이 실질적으로 소유권을 건드린 대담한 개혁 조치였다고 평했다(함규진, 『역사법정』, 포럼, 2006에서 재인용) 이러한 가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당대에 잦았던 외침과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전적(田籍)과 노비문서가 망실되었다면 관계 당국이 누구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처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신돈은 “노예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奴隸背主者)”의 편을 들어서 기막힌 반전을 펼쳤다. 아무리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전민변정사업은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은 설득력 있다. 과전법(科田法)에 견주어 제도적 측면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돈의 기용 자체가 제도를 초월한 것이었고 이러한 파격을 통해 개혁추진세력을 육성하고 제도화를 노린 건 아니었을까. 관료체제 정비 등과 같은 제도적인 보완이 개혁의 지속을 위한 노력이라고 볼 여지는 없을까.


아무튼 전민변정사업은 권력자의 선의와 양심에 맡겨진다. 이는 국왕의 강인한 의지와 결단에 의한 집행을 촉구했던 이색을 위시한 사전개선론(私田改善論)자들의 방법론이다. 그들은 전주를 1인으로 한정하는 일전일주(一田一主)의 원칙에 따라 조세징수권이 중첩되는 데 따른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다. 합법적인 토지 겸병 대토지 소유자의 이익을 결과적으로 옹호하게 되는 셈이다. 조준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전혁파론(私田革罷論)자들은 사전문제의 원인과 해법에 차이가 있었다. 혁파하려는 사전의 개념(소유권이나 수조권이냐)과 대상(합법적인 사전을 포함하느냐 마느냐)을 둘러싼 논쟁도 있어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복잡한 측면이 많다. 개선론과 혁파론 모두 자신의 방안이 조종(祖宗)의 전법(田法)을 구현한다고 표명하고 있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인간의 내면을 중시했던 이색은 제도 자체의 변경보다는 운영의 묘와 부분적인 제도 개선을 주창했다.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의 관리나 수조권자의 책임의식 강화와 도덕성 함양이 필요하다고 봤다. 사마광의 구법당이 연상된다. 이에 반해 조준은 제도 개혁에 역점을 뒀다. 수조지의 몰수와 재분배를 주요 골자로 해서 합법적인 사전마저 혁파하려고 했다. 왕안석의 신법당에 비견될 이러한 시도는 고려의 통치체계가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하다. 사실 사전개혁에 반대했던 인물 가운데는 이성계 일파에게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인물이 많다. 이네들은 사전이 혁파되더라도 경제적 기득권을 크게 훼손 받지 않았을 공산이 컸다. 그럼에도 양측이 갈등한 까닭은 사전개혁 논쟁이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였음을 말해준다.


물론 사전개선론자들은 경제적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욕구가 충만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개량을 통해 현 지배질서를 존속하려는 측면이 적잖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전개선론자들을 수구의 온상으로 매도할 수 있을지는 조심스럽다. 사전혁파론자들에게서도 생산자인 농민계층에 대한 특별한 대책은 찾기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과전법은 당초 혁파론자의 계획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혁파론자들은 기본적으로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일반 백성을 비롯한 모든 국민들에게 배분하려고 했다. 정도전은 권문세족들이 온갖 방해를 해서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하면서도 고려의 문란한 전제에 비하면 몇 만 배가 낫다며 자부했다. 하지만 혁파론자 가운데 정도전이 급진적인 입장이었음을 감안하면 혁파론이 일반민을 위한 개혁을 표방했지만 지배계층의 교체를 통한 권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된 개혁은 아니었나 흘겨보게 된다. 조준의 혁파론과 이색의 개선론의 간극은 생각보다 작을지도 모른다. 민생을 내세웠지만 이는 다분히 역성혁명의 명분에 이용된 느낌이 짙다. 진정 권문세족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당초의 개혁안이 후퇴한 것인지 표면상 걸어놓은 구호와 달리 통치질서의 교체에 주안점을 두었는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여하간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개인 소유지는 그대로 두고 이에 대한 수조권을 국가가 가졌다. 수조권 토지와 불법적 탈세지는 몰수해 수조권을 재정비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과전법에 대한 다채로운 평가가 많아 취사선택하기가 어렵다. 과전법을 박하게 평가하는 이는 고려의 전시과(田柴科) 제도와 본질상 동일하다고 보기도 한다. 집권세력의 몰락과 신흥세력의 득세를 초래한 지배층 내부의 개혁에 그쳤다는 지적도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른 토지 소유권 조정이 아니라 수조권을 재분배했을 뿐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과전법상 토지(관직복무의 대가로 부여되는 토지) 수요가 늘어나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은 신랄하다. 실제로 과전법은 공신, 관리의 증가로 사전이 계속 부족해졌고 세조 12년(1466)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했다. 현직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다 보니 퇴직을 대비해 재직 중에 수탈이 심하다는 폐해가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점이 토지 국유제를 관철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다. 결국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향상은 단순히 지배층의 제도 개혁으로 만족할 사안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소유권에 기초한 지주전호제가 일반화되자 농민들은 창조적 방법으로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소작쟁의를 통해 경작권을 인정받는 등의 공력을 기울였다. 소작농에서 자영농이 되기 위한 끈질긴 분투가 기득권 세력의 양보를 받아냈으리라. 이 험난한 과정은 기득권 세력이 스스로 기득권을 내어놓은 역사가 없다는 걸 담담히 증언해주고 있다.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했던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꼬박 100년이 걸렸다. 개혁은 결코 국민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민주주의 좋다는 게 뭔가. 그것은 계몽군주에게 기대지 않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3.
신돈의 개혁은 위법적인 토지 점유를 방지하고 감찰과 재판 위주로 진행되었다. 전국적으로 얼마만큼의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기록상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다만 공양왕 4년 2월의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이 정한 소송법에서 공민왕 15년 당시에 내려졌던 전민변정도감의 판결을 인정해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정확성을 짐작하기도 한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소송조)<각주>. 신돈의 개혁은 일견 사전개선론자들의 논리와 유사하고, 심화된 문제의식을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돈의 전민변정사업의 흐지부지되자 더 이상 이런 수준의 개혁마저도 속행되지 못했다. 신돈의 몰락 후에 발표된 공민왕 20년의 개혁에는 토지관계 조항이 하나도 없어 신돈의 개혁을 부정하는 세력에 장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돈의 개혁마저 감내하지 못했던 고려는 자체 정화능력을 상실한 듯싶다. 신돈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던 것은 어느 정도 실제적 효과를 거둬 일반민의 기대를 충족시킨 실행력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내용상에서 큰 차이가 없었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신속하거나 광범위하게 추진했다. 물론 신돈의 지지세력에는 부원배나 권문세족들이 참여해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이 뒤섞인 측면이 있다. 여기다가 국왕의 신임에 의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취약한 기반 때문에 전제개혁을 추동할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의 정책이 한시나마 실효를 거뒀다면 집행역량을 바탕으로 기층 민중에게 정책 신뢰성을 획득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이러한 실천적 모습은 사전혁파론자의 적극적 자세와 잇닿는 면이 있다. 아니 신돈의 개혁이 실패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사전혁파론자들은 이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채워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으나 망설여지는 건 역시 조선조 사가들의 갖은 악평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신돈에 대한 사료는 정사가 유일하다. 신돈은 신하로서의 법도를 무시하고, 뇌물과 아첨을 좋아하고 여색을 밝혔으며, 호화주택을 과다하게 보유했다는 등의 비난을 받는다. 신돈의 사치와 방탕이 과장되었다는 심증이 있으면서도 그의 도덕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막막하다. 1968년 민현구 교수의 연구 이후에 신돈이 개혁가였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사료가 나오지도 않았으면서 행간의 의미를 재해석했기에 개인적인 추단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필이 왜곡되었다는 건 통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될 때도 그의 정통성은 부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1389년 우왕 복위사건이 벌어지자 비로소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는 대의를 내걸고 우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잔혹한 조작은 고려 말기의 사료가 얼마나 윤색되었을까 불안하게 한다. 당대의 기록이 허구라면 오늘날 과연 실체적 진실을 복원 가능할까라는 회의가 든다.


그러나 중기(中期) 이후로 임금노릇을 잘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폐신(嬖臣)에게 혹(惑)하고 밖으로는 권간(權姦)에게 제어(制御)되었으며, 강한 적들이 번갈아 침노하여 전쟁이 빈번하였고 나라가 쇠퇴(衰退)하여 가성(假姓: 우왕(禑王)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한 것)이 왕위를 빼앗아 왕씨(王氏)의 제사가 끊어지기에 이르러서 공양왕(恭讓王)이 반정(反正)하였으나, 마침내 어둡고 나약해서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으니, 대개 하늘이 진주(眞主)를 낳아서 우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신 것은 진실로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고려사절요』를 올리는 전(箋)


하늘이 장차 한 나라를 망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임금을 내고, 마음이 간사하고 흉역(凶逆)한 신하로써 그 사이에서 죄악을 양성(釀成)하여 임금을 미혹시키고 정신을 손상시킨 뒤에야 나라도 따라서 망하게 됩니다. 고려는 개국한 지가 장차 5백 년이 되어 가므로, 하늘의 돌보아줌이 이미 느슨해져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공민왕을 내었으며, 또 간사하고 흉역한 신돈을 내었습니다.
『동국통감』 공민왕 20년(1371) 신돈 처형 후 사론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서를 보면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신돈의 자식이 왕위에 올랐으니 고려의 멸망은 천명이라는 논리가 도출된다. 오백 년 고목을 찍어내기가 녹록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신돈과 우왕 부자는 망국의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희생제의였다. 신돈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악마성의 표지가 된 건 아니다. 정사의 기록을 수용한다면 그의 집권기 전후로 이미 반대하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신돈의 시책에 대한 반발이었든 그 자신의 덕망이 부족해서 빚은 문제였든 간에 신돈은 당대에도 적잖은 미움과 견제를 받았다. 공고한 연줄망 속에서 고립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적들을 과도하게 징벌한 면도 있다. 자신의 권세가 지나치게 커져서 시기심 많은 왕이 이를 꺼릴까 두려워 반역을 모의했다는 기록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 또한 신돈의 죽음은 공민왕의 선택이었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신돈 권력의 비대화가 우려되었을 수도 있고, 측근정치로서의 쓸모가 다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요인과 더불어 중국대륙의 판도 변화도 작용했다고 본다. 신돈의 집권기에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영전을 짓느라 애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공민왕은 17년(1368) 1월 명나라가 건국되고, 그 해 8월 명이 원나라의 대도(大都)를 함락시키는 국제정세를 챙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명나라의 침략되는 만큼 내정개혁을 보류하고 무장세력을 주축으로 전시태세를 갖추고, 권문세족의 경제력을 지원 받기 위해 신돈을 처형했다. 왕의 결단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신돈은 집권 초기에 왕에게 건넨 말대로 “백성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평안을 누리게 한 연후에 옷 한 벌과 바리때 하나만 들고(一衣一鉢) 다시 산으로 돌아갈 생각”이 서서히 가셨는지도 모른다. 절대권력 앞에 그라고 절대부패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요승이라는 누명을 벗겨줘야겠다는 욕심이 지나쳐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나 돌아본다. 그래도 그가 죄보다 많은 벌을 받는 건 안쓰럽다. 이는 반대로 조선 건국자가 공보다 많은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조선 건국이 고려 후기의 심각한 체제 동요를 극복하고 민생 안정을 이뤄 역사 발전을 일구었다고 하자. 우리는 이 대목에서 목적은 수단을 어디까지 합리화할 수 있는가, 결과만큼이나 과정을 중시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을 품어야 한다.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의 좌표를 삼는 건 목적과 수단, 과정과 결과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일 테다. 여말선초를 단순히 개혁과 반개혁의 대립으로 가르지 못하는 이유다. 개혁은 절대선도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개혁은 늘 언제나 무결하지 못하다. 우리는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많이 접했다. 개혁은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허물어지기도 하고, 지지층의 환멸로 어그러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권태와 부단히 싸워나가야 한다. 스스로를 욕되게 한 다음에 남으로부터 모욕을 받는다는 말씀을 실감한다. 개혁을 말하는 이들이여, 부디 실패에서 배우시길. 원칙 있는 패배 또한 아름답지 않는가. - [無棄]


<각주>
병신년(丙申年) 이전에 소송에 대한 명확한 문건이 없으므로/없는 것, 정미년(丁未年) 이전의 일과 무진년(戊辰年) 이후 변정도감 및 도관(都官)이 이미 판결한 것은 다시 신고하지 못한다.
丙申年前無爭訟明文 丁未年前事及戊辰以後 辨正都監及都官已決者 不許陳告
『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소송3
* 형법지 소송조에는 4건의 기사가 있다. 논의의 편의상 순서대로 소송2, 소송3, 소송4라고 번호를 매겼다.


이 구절에서 병신년이 공민왕 5년(1356)이고, 무진년이 우왕 14년(1388)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정미년이다. 공민왕 16년(1367)과 충렬왕 33년(1307)으로 견해가 갈린다. 일찍이 민현구 교수는 無爭訟明文을 병신년 이전에는 소송의 명문이 없어 논의될 여지가 없으므로, 이 때를 상한으로 그 이전은 문제삼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보았다(민현구,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下)”, 『역사학보』 제40집, 역사학회, 1968, pp. 53~119 참조). 다시 말해 1356년 이전의 쟁송명문이 없다는데 1307년을 거론하는 건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丁未年前事는 공민왕 5년~15년(1356~1366)까지를 가리키게 된다. 공민왕 15년은 신돈이 전민변정사업을 주재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당시의 판결을 인정한다는 자료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주본은 소송3의 바로 앞 기사로 공양왕 3년의 상소문을 실은 소송2에 忠烈王丁未年以前事라고 명기된 구절이 있는 만큼 충렬왕 33년(1307)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봤다(김일권 외, 『고려시대연구 8』,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참조). 그래서 無爭訟明文을 “쟁송한 명문이 없는 것”이라고 풀이해 상한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1307년에서 1356년 사이에도 쟁송한 명문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정미년이 충렬왕 27년(1301)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의 활동을 의미한다거나, 충숙왕 원년(1314)에 완성된 전적(田籍)인 갑인주안(甲寅柱案)의 작성 이전 시기를 통칭한다는 논거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볼 경우 굳이 1307년이라는 기준을 세웠어야 했느냐는 물음이 남는다.


본문에서는 정미년을 민 교수의 견해에 따라 1367년으로 봤다. 오기나 결락이 없다고 가정할 때 정미년을 1307년으로 볼 근거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어색한 부분도 다소 보인다. 소송2는 토지에 관련된 기록이라면 소송3은 노비에 관한 기록이다. 비슷한 문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정책목표가 다소 다른데 같은 기준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민 교수도 충렬왕 1307년 무렵에 노비 변정(辨正)에 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고 논설한다. 그나마 인접한 시기인 1301년의 전민변정사업은 유명무실했다고 평가받는다. 아울러 소송4의 기사를 보면 “신축년(辛丑年) 겨울에 적이 수도를 범하였을 때 공사 문권이 망실되어 거의 다 없어졌는데, 간악한 자들이 이것을 계기로 하여 사건의 단서를 꾸며 일으키고 있다”면서 신축년의 쟁송명문이 없는 자는 다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게 하라는 상소가 나온다.


여기서 신축년의 일은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수도가 함락되었으니 1361년 이전의 쟁송명문이 상당수 소실되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356년 이전의 쟁송명문도 마찬가지로 많이 망실되었을 텐데 1307년이라는 기준을 내세우는 건 동떨어진 감이 있다. 설령 1307년이 맞다고 해서 그것이 신돈 집권기의 판결 효력이 완전히 부인되는 건 아니다. 소송2, 소송3 기사 모두에서 “다섯 번의 판결에서 세 번 이긴 것과 세 번의 판결에서 두 번 이긴 것을 따른다(五決之三 三決之二/五決從三 三決從二)”라고 했는데 신돈 집권기에 이루어졌던 판결의 효력은 이 대목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다섯 번 심리할 것을 세 번으로 하고 세 번 심리할 것을 두 번으로 한다”라고 해서 판결의 신속성을 강조하는 문구로 해석하면 또 달라진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돈의 실각 이후에 신돈 집권기의 판결이 아예 배제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하기 힘들다. 고려말 여러 전민변정사업 가운데 신돈 집권기가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나쳤을 수도 있다. 이런 머뭇거림에 얽매이지 않고 정사의 기록을 비판하며 재해석하려는 입장에서는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다. 신돈 집권기의 성과가 철저히 부정된 증거라고 투덜거릴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정사는 우왕과 창왕 아래서 녹을 먹던 이들이 우창비왕설을 내세우고, 그네들이 진짜라고 옹립했던 공양왕마저 비참하게 죽였던 자들의 기록이다. 그네들의 양식을 얼마나 신뢰해야 하느냐를 따지는 건 참 고심스럽다. 애매한 자구 해석은 이 정도 톺아봤으면 됐지 싶다. 들인 품에 비해 실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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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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