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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애도하며

문화 2008. 2. 18. 00:44 |

나는 2005년 5월 숭례문 광장을 기꺼워했다. 옹성까지 남아있는 데다 개인적으로 더 자주 지나가는 흥인지문도 이런 식의 광장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올해 개통될 예정이다). 한창 진행중인 광화문 복원 공사가 잘 마무리되면 세종로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정면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문화유산의 복원과 개방이 미진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너무 한쪽으로만 말하고 다녔다. 나 또한 충분히 품었어야 하는 안전 관리에 대한 의심을 소홀히 했다.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문화유산 개방 움직임이 움츠러들 가능성이 높아 안타깝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숭례문마저 지키지 못한 마당에 산골벽지에 있는 문화유산들을 멋대로 열었다가 관리를 못하면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이번 소실과 문화유산 개방 사이의 개연성을 따지자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충격이 좀 다독거려지면 꼼꼼한 관리 감독과 별개로 문화유산 개방은 더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그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대에 음미하지 않은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고이 물려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화유산의 전승은 그것을 향유한 추억과 감동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시행정으로 잃어버린 숭례문에서 배운 교훈이 고작 답사객들의 손발을 묶는 방향이라면 우리는 또 다른 전시행정의 늪에 빠질지도 모른다. 꾸준한 안전 대책은 어렵지만 관람객들의 다가감을 막는 건 쉽다. 예산 부족이라는 핑계로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머잖아 국보와 보물의 일련번호가 없어지기 때문에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상징성은 소멸될 처지였다. 1등이나 1호를 선망하는 한국적 정서 탓인지 그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올라 있어 습관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국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부러 지워내기 힘들다. 국보 1호라서 좀 더 슬퍼하는 태도를 무턱대고 마뜩잖아 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숭례문의 소신공양은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대한민국을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애틋함이 지속될지 자신하기 힘들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숭례문은 그나마 괜찮은 관광자원이라 여겨 각별히 아쉬워했다면 정말 남세스럽다. 돈이 되지 않는 문화유산에 대한 냉대는 앞으로도 이어질 테니 말이다. 2000년 5월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이 난입해 훼손한 풍납토성 경당지구의 치욕을 반복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에 귀천을 나누는 건 서글프다. 문화유산에도 차이는 숙명적이고, 차이는 자연스럽게 차별을 낳는다. 문화유산을 완상하는 저마다의 감상은 있게 마련이고 숭례문보다 더 보살피는 문화유산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의 취향과는 별개로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는 국가적 관리의 우선순위를 확립함으로써 후손에게 좀 더 잘 물려줄 목록을 작성한다. 문화유산을 두고 벌어지는 국가적 차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반면에 개인적 차별은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가령 나는 국보나 보물은 아니지만 사택지적비가 무척 살갑다. 숭례문의 참화는 국가적 차별을 제대로 못했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개인적 차별을 희석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다(전국민이 숭례문의 상주가 되어 침통해하는 걸 보라). 보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편애의 폭은 넓혀나가고, 국가적 편애는 좁혀나가야 한다.


이 분위기를 틈타 문화유산이 경제를 살리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라고 역설하지만 그 디딤돌은 큼직한 몇 녀석뿐이다. 서울시청사 신축을 계획할 때 거치적거렸던(?) 덕수궁을 놓고 시민이 건넨 쌀쌀맞은 시선은 현재진행형이다. 태조 왕건의 사택지로 추정되는 철원군의 구 철원향교터에 대한 발굴작업이 예산 부족 등으로 연기되었다가 올해 들어 2년 만에 재추진된다는 소식은 지방지가 아니면 접하기 힘들다. 가까스로 확보한 예산 2억원은 숭례문 복원을 위한 추정예산인 200억원의 100분의 1이다. 딱히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은 국가 지정문화재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모아져 아슬아슬하다. 거식증보다는 편식이 낫겠지만. 우리처럼 목조건축물이 많은 중국과 일본의 사례가 잇따라 보도되고 있는데 그네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단지 경제적 이득에 대한 기대감만은 아니라고 본다.


타다 남은 기왓장 하나도 교육의 자료, 참회의 유물로 삼자는 목소리가 높다. 숭례문의 비극을 원망이 아닌 애정으로 치유하려는 노력이 고맙다. 이런 몸짓보다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의 균형을 찾는 일이 절실하다. 2007년 서울 중구청이 숭례문 관리에 쓴 예산은 1억 7,200만원이었으나, 숭례문 앞까지 행진하는 수문장 교대식 예산은 20억원이라고 한다. 방재 설비를 하나 줄이고 밤을 수놓는 조명을 하나 더 달고 싶은 마음을 눅이는 계기로 삼는다면 비싼 수업료이기는 하지만 얻는 바가 적잖다. 눈에 보이는 명확한 위험을 다스리는 것과 체계적인 방재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상충하는 가치는 아니다. 철길 옆에서 신음하고 있는 국보 안동 법흥동 7층 전탑이 기울어진 건 오래된 일이다. 이제 죽음을 방기하고 장례를 후하게 치르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지금 혹독하게 겪고 있듯이 문화유산은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는 존재가 아니다.


일관성은 결국 일상성이다. 세계 주요 박물관 가운데 루브르는 유난히도 마니아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만든 루브르 후원회인 “루브르의 친구들”은 연간 30억 원이 넘는 회비로 루브르에 작품을 기증하는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문득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환수한 보물 김시민 선무공신교서의 감동이 떠오른다. 사건이 터지거나 언론매체의 선전에 기대어 이뤄지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에 녹아든 문화유산 애호를 모색했으면 좋겠다. 프랑스 화가 밀레(J. F. Millet)는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감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잘 된 작품이라도 결코 생명이 없다”라고 했다. 감동하려면 먼저 좀 알아야 한다. 싸이월드 첫 화면에 올려진 ‘황룡사 9층 (  )’이라는 퀴즈에 석탑 56%, 목탑 44%로 잘못된 응답이 더 많았다(2월 18일 0시 현재). 문화유산 사랑이 관념화되고 당위적인 구호가 된다면 경계할 일이다. 자신의 가슴을 흔드는 문화유산을 찾아보자.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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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에 서울시 중구 답사를 할 때 찍었던 숭례문 사진입니다. 숭례문 광장이 있기 전이라 근처에 조성된 포토존에서 촬영했습니다. 당초 동선에 없어서 좀 돌아가야 했는데 이게 마지막이 되었네요. 애도하는 의미로 당분간 제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쓸 예정입니다. 너무 슬퍼하지도 넘치게 성내지도 맙시다. 그 힘을 아껴서 궁궐이나 박물관을 한번 들려보는 게 어떨까요. 클릭해서 보세요.ㅜ.ㅜ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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